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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눈물 이야기 (히 11:32,33, 시 16:6, 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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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일 “사무엘의 끝내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무엘은 혼란하고 무질서한 사사시대를 ‘끝내고’ 선지자 시대와 다윗 왕국의 새 시대를 연 ‘끝내주는’ 사람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끝내주는’ 사람이 되었던 비결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무엘은 첫째 아기 때부터 정성껏 예배 드리며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고, 둘째 평생 기도하기를 쉬지 않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셋째 부모와 하나님의 종과 하나님께 순종한 순종의 사람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린 사무엘의 이야기를 하다가 저의 손자 이야기를 하며 손자 자랑을 한 값으로 초가집 누릉지 한 봉지씩을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성도는 한 주일 내내 누릉지 받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예배 후 누릉지 한 봉지씩 모두 받아 가지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누릉지를 드시고 모두 누릉지처럼 구수하고 고소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에는 “다윗의 눈물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눈물은 보석과 같이 귀한 것입니다. 눈물은 마음과 가슴의 언어입니다. 눈물은 진실의 상징입니다. 눈물은 사랑과 기쁨과 슬픔의 진솔한 표현입니다. 기독교는 눈물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교는 눈물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눈물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셨고 사도 바울이 울었고 성 어거스틴을 비롯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통곡하며 울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이제라도 울며 애통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요사이 눈물이 많아졌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눈물이 흐릅니다. 오늘 아침 “다윗의 눈물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되었던 중요한 비결 중의 하나는 다윗이 눈물의 사람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던 중요한 비결 중의 하나도 다윗이 눈물의 사람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 중의 하나도 다윗이 눈물의 사람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이 진실의 상징이고 소박함의 상징이고 순수함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세 가지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첫째, 다윗은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짓고서도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태연한 모습을 나타내 보입니다. 최근에 청와대의 어느 고위 직원 한 사람이 밤에 자기의 아내를 죽이고서도 다음 날 아침에 태연하게 청와대로 출근을 했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간음죄를 짓고서도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기는커녕 태연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며 위선을 떨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다윗의 죄를 지적했을 때 다윗은 태연하게 위선을 떨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솔직하게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나단 선지의 말과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상12:7-13).

  다윗은 그 후 평생토록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어두웠나이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시6:6-8). 다윗은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그리고 죄 값으로 당하는 환난 때문에 평생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대부분의 시에는 슬픔과 탄식과 울음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13: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시22:1-15).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시38”4-6).

  다윗은 한 평생을 다음과 같은 참회의 시를 읊으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후에 어거스틴이 그 시를 읊으면서 살다가 죽었고, 김치선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그 분들의 흉내를 내면서 그 참회의 시를 읊으면서 살다가 죽기를 바랍니다. 그 참회의 시는 시편 51편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10). 다윗은 울다가 또 울다가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56:8). 다윗은 한 평생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회개의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다윗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삼상30:4). 다윗은 시글락에 살던 자기의 동족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침략을 당하여 사람들이 붙잡혀 가고 온 성이 불 탄 것을 보고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삼상30:3,4). 자기의 동족이 불행을 당했을 때 울 수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고 권면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윗의 울음의 귀중함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어려운 때에 우는 것은 약자들의 하는 일이라고 한다. 더욱이 시글락에서 다윗이 통곡한 것은 일국의 대왕이 될 사람으로서 체통을 지키지 못한 것같이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울 수 있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보다 용이하게 신앙으로 들어간다. 사람이 울 때에는 그 심령이 부드러워져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울음이 없는 자는 대부분 심령이 마비되어 있는 자로 판단된다.”(박윤선 목사).

  다윗은 시글락 사건 바로 후에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던 사울 왕이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사무엘하 1장 1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의 죽은 후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와서 시글락에서 이틀을 유하더니 제 삼일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에서 나왔는데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저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저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뇨 너는 내게 고하라 저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서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중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삼상1:1-4,11,12).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하던 사울 왕이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대신에 슬퍼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슬퍼한 이유 중의 하나는 사울 왕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윗은 근본적으로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고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착한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착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을 바라보시면서 슬퍼서 우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2-4). 예수님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좋아서 기뻐하시지 않았고 슬퍼서 우셨다고 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19:41-44).

  지금 우리들의 가슴에는 원수들에 대한 분노만이 있고 슬픔과 눈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은 아닙니다. 니느웨 성을 바라보시면서도 하나님은 우셨습니다. 물론 요나는 분노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북한을 바라보면서 우는 마음보다는 분노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마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것을 바라보면서 다윗은 좋아서 기뻐하지 않았고 슬퍼서 울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심판을 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슬퍼서 우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의 시편들 중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고 감탄하는 시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감탄사들을 계속해서 발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8:4-5).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139:17,18). 마음이 부드럽고 감성이 풍부한 다윗이 이와 같은 고백을 할 때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무디고 강퍅한 저 같은 사람도 이 고백들을 읽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면 이 시의 원 저자인 다윗은 얼마나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까?

  제가 1983년 7월 암스텔담에서 열린 빌리 그레함 국제순회자전도대회에 참석하여 너무나 깊은 은혜를 받은 후 7월 21일 아스랜드의 리카벡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잔 후 카나다 뱅쿠버에서 열린 WCC 총회에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7월 21일 아이스랜드의 리카벡에서 하루 밤을 머무는 동안 제가 시편139편을 읽다가 17절과 18절을 읽으면서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을 정도로 가슴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해서 그저 방 바닥에 엎드려 혼자서 통곡을 하면서 울기만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저는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의 한 평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선하신 손길이 너무 많고 너무 보배로운 것을 깨달으면서 그저 호텔 방에 엎드려 통곡하면서 울기만 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기행문을 “세계교회의 동향”이란 제목으로 56페이지나 되도록 길게 썼지만 리카벡에서의 일은 지극히 간단하게 기록했을 뿐입니다. “이 3일간은 나에게 있어서 영혼과의 깊은 대화를 나눈 잊을 수 없는 기간이었다.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다윗은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고백하며 너무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감격의 시들 중에서 하나만 여기 옮깁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8-14).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1-5).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제가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 드린 대로 저의 금년도 기도 제목 중의 하나는 저의 가슴에 주님의 눈물을 품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저의 소원대로 하나님께서 메마르고 강퍅한 저의 가슴에 눈물을 조금씩 채워주시고 계십니다. 저의 허물을 바라보면 가슴에 눈물이 흐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어린이들이나 캄보디아의 어린이들을 생각하면 저의 가슴에 눈물이 흐릅니다. 어제 캄보디아에 같이 갔던 목사님 한 분이 캄보디아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내왔습니다. 그 사진들 중의 하나는 버스 고장으로 시골 길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는 중 지나가는 어린이 세 명에게 제가 스티커를 나누어 주었는데 그 세 어린이들이 스티커를 손목이 붙이고 저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어린이들이 귀엽게 보였는데 그 어린이들을 바라보면서 제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저도 다윗처럼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통곡하며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울 기력이 없도록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눈물을 내 가슴에 내 눈에 채워주시옵소서. 북한 동포들을 바라보며 분노의 눈물이 아닌 긍휼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하시옵소서! 길선주 목사님의 눈물을 나에게 채워주시옵소서! 김치선 목사님의 눈물을 나에게 채워주시옵소서! 손양원 목사님의 눈물을 나에게 채워주시옵소서! 다윗의 눈물을 나에게 채워주시옵소서! 아니 주님의 눈물을 내 가슴에 채워주시옵소서!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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