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혜가 넘치는 예배(5) : 교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빌 2:1-11)

  • 잡초 잡초
  • 289
  • 0

첨부 1


<교회는 놀꾼의 자리인가?>
교회에는 네 가지 꾼이 있답니다.
말꾼, 심술꾼, 놀꾼, 일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꾼만 보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지 않습니다.
구색을 맞추어서 말꾼도 있고 심술꾼도 있고 놀꾼도 있고 일꾼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일꾼이 훨씬 더 많은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놀꾼 교인들은 언제나 놀러갈 생각만 한답니다.
"봄이 됐는데 산으로 갈까요? 들로 갈까요? 강으로 갈까요?"
"5월은 가정의 달이라 다른 교회도 버스 타고 다 놀러 가는데 우리도 놀러 갑시다."
교회를 친목 단체로 생각하는지 늘 놀러 가는 생각이 앞섭니다.

한 30년 전에 어떤 목사님이 천막을 치고 개척교회를 하는데 놀꾼 교인들이 들어왔습니다.
교회가 금방 부흥이 안 되고 늘 제자리걸음을 하니까 놀꾼 집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다른 교회는 부흥이 잘 되는데 왜 우리 교회는
개척이 된 지 3년이 지나도록 20명밖에 안 되는 지 아십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목사님, 현대 교회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요즘 남자들은 고스톱을 좋아하니까 목사님도 고스톱을 좀 배우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6개월 간 그 놀꾼 집사님한테 고스톱을 배웠답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 목사님은 그만 고스톱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수요일 밤에 강대상에 올라가면 교인들 이마가 다 팔공산처럼 보입니다.
하여간 눈만 감으면 사껍데기 흑싸리가 왔다갔다하고 고스톱에 푹 빠졌습니다.

남자 교인들의 마음 한 번 잡아보기 위해 고스톱판을 벌렸는데
처음 석 달 동안은 늘 돈을 잃었답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난 후부터는 실력이 붙었던지 돈을 따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돈을 잃었을 때는 가만히 있더니만 돈을 따기 시작하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놀꾼 집사님을 비롯한 남자 교인들이 목사가 기도는
안 하고 고스톱만 치고 다닌다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만 30명 모이던 교회가 고스톱 하는 바람에 10명으로 줄어들고 말았답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집에서 읽은 이야긴데 그 목사님의 결론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락하고 친교하고 놀러 다니는 곳이 교회가 아니더라는 것이지요!

오늘 여러분이 내리 예배당에 나온 것은 놀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끌고 즐겁게 하기야 교회보다 더 좋은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즈음 따뜻한 봄이 되어서 사람들이 들로 산으로 많이 나갑니다.
무슨 무슨 축제해서 축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무슨 무슨 놀이해서 놀이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에는 교회보다 세상이 훨씬 더 좋습니다.

<먼저 이웃과 화목하세요>
오늘 저는 "은혜가 넘치는 예배" 연속설교의 마지막 순서로서
'교제'(KOINONIA)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난주까지 말씀드린 예배의 네 가지 요소는 다 중요합니다.
기도와 말씀과 찬송과 봉헌,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참 중요한 시간들입니다.

그런데 교제는 어떻습니까?
예배 시간에 성도의 교제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우리 교회에서는 주일 대예배 시간에 성도의 교제를 앞서 합니다.
광고를 가장 먼저 하고 바로 그 다음에 서로 인사 나누는 교제 시간을 갖습니다.

사실, 미국 교회가 대개 이런 식으로 합니다.
제가 미국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하면서 배웠는데 이 모습이 너무 좋더라고요.
교제 시간만 되면 온 교인들이 일어서서 멀리까지 가서
서로 허깅하고 덕담을 나누는데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그대로 해보는데 참 좋습니다.
본격적인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눔으로서 모든 벽을 허물어뜨립니다.
서로 불편했던 감정, 미워했던 마음, 상처 준 일 등등을
다 풀어버리고 예배를 드리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은 마 5: 23-2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여러분,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기 이전에 형제 자매와 관계회복부터 먼저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이웃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또 용서받은 후에서야
비로소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성도들과 나누는 교제가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계층과 연령과 성과 인종 등등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어 어울리는 것,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지요.

다윗은 시 133편에서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노래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니 곧 영생이로다."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위한 세 가지 원리>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교제를 나누어야 할까요?
본문 1절 말씀을 다같이 보세요.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오늘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무슨 격려(encouragement)를 하든지,
사랑의 마음으로 무슨 위로(consolation from love)를 하든지,
성령 안에서 무슨 교제(sharing in the Spirit)를 하든지,
무슨 동정심이나 자비(any compassion and sympathy)를 나누든지 간에,
반드시 명심해야 할 원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도가 나누는 교제의 세 가지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① 한 마음이 되어서 교제해야 합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일체성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한 형제 자매가 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우리를 갈라놓았던 일체의 장벽이 교회 안에서는 사라져야 합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등등의 모든 장벽이 없어져야 합니다.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끼리 모인다."는 서양의 속담이 있듯이,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도 비슷한 수준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 사는 사람들은 잘 사는 사람들끼리,
많이 배운 사람들은 많이 배운 사람들끼리 모이려고 합니다.

서울의 어떤 교회는 아예 목사도 없이 평신도들끼리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는데 전부다 대단한 분들이라고 합니다.
장관을 지낸 분, 대학 총장을 지낸 분, 유명한 대학교수 등등,
이른바 최고 수준의 엘리트들만이 모인다고 합니다.   

글쎄요.
저는 이런 교회가 과연 주님의 참 정신을 잇는 교회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참 아름다운 교회는 가난한 사람, 부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이
전혀 장벽을 느끼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그런 교회입니다!

제가 미국에 살 때 미국 교회도 그랬습니다.
흑인들은 흑인들끼리 백인들은 백인들끼리 황인종은 황인종들끼리만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고 자연스러우니 그렇겠지요.
그러나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든지 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가 되는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 3: 28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옳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나누는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난번에 미국에서 열린 세계 야구대회(WBC)에서
우리나라가 일본을 이긴 장면을 다들 보셨지요?
캘리포니아 주 에너하임 에인절 스타디움에서 경기가 열렸는데
관중들의 대부분이 한국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관중들 가운데에는 미국에 건너간지 수십 년이 된 한국계 미국인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을 응원하는 데에는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마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한국인들이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낮에도 샌디에고에서 다시 한번 일본과 4강전을 벌이게 될 터인데
한국이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외치는 응원에 있어서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육신의 피를 나눈 친형제 자매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사이가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교제할 때 마다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② 겸손한 마음으로 교제해야 합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우리가 교회 안에서 교제할 때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해서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까지 다툼이나 헛된 자랑으로 교회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내 형제 자매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교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교회가 될까요? 
세상에서 지위가 높은 분이 낮은 분들을 섬기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지요!
부유한 분이 가난한 분들을 겸손히 위하는 교회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 지요!
많이 배운 지식인이 많이 못 배운 형제 자매들을 겸손히 섬기는 모습은 또 얼마나 좋은 지요!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섬김과 겸손의 공동체, DIAKONIA의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③ 다른 사람의 이익을 구하는 마음으로 교제해야 합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여러분, 이게 무슨 뜻일까요?
표준 새번역 성경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해놓았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그런데 영어성경 NRSV는 "서로 자기 이익만 돌보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이익도 돌보라."고 번역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타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지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기적입니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이익을 먼저 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교회 안에서는 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이웃의 이익도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은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교회였습니다.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고 모든 물건을 함께 나누고 함께 통용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구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지요.
오늘 우리 교회도 내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과 선을 먼저 구하면
초대 교회와 같이 구원받는 숫자가 날마다 더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한문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아실 것입니다.
옛날 중국 제(齊) 나라의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아름다운 우정에서 나온 이야기이지요.
젊었을 때 관중은 포숙과 함께 생선장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익금을 나눌 때마다 언제나 관중이 더 많이 집어 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관중을 비난할 때마다 포숙은 관중을 두둔하고 변호했습니다.
"관중은 욕심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가난하고 집에 딸린 식구들이 많기 때문이다."
함께 전쟁터에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관중은 언제나 뒷전에서 어물거리다가 전쟁이 끝나면 맨 앞에서 걸어나오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관중을 욕할 때마다 관중을 비호하는 사람은 포숙 한 사람이었습니다.
"관중이 비겁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몸을 아끼는 것뿐이다."

이와 같이 포숙은 관중에게 잡음이 생길 때마다 관중을 적극 두둔하고 보호해주었습니다.
포숙의 우정과 의리 덕분에 관중은 제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관중도 자신이 이렇게 출세에 출세를 거듭할 수 있었던
비결이 좋은 친구 포숙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것은 포숙이었다."(生我者, 父母. 知我者, 鮑叔.)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 사람들도 관중의 뛰어난 재능과 경륜보다
포숙의 사람 알아보는 혜안을 더 높이 쳤다는 말씀입니다. 

제나라의 명신 관중의 배후에는 관중을 알아주고 감싸주었던 친구 포숙이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알아보고 자기보다 더 나은 자리에 천거해주고
밀어준 포숙이야말로 이타적인 교제가 무엇인지 보여준 사람이지요.

성경에 보면 바나바가 꼭 포숙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바울보다 더 선배요 더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초신자 바울을 적극 밀어주고 자기는 뒤로 물러난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 배후에는 이타적인 친구 바나바가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 우리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웃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양보와 겸양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는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하나되는 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교제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이웃의 유익도 함께 구하는 이타적인 자세로 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을 것을 역설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눌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우리 다함께 본문 6-8절의 말씀을 봉독함으로써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멘.
(김흥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