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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행 -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 (창 5:21∼24, 히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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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자연인이다. 그 자연인은 자기를 기쁘게 한다. 그리고 세상을 기쁘게 한다. 사단을 기쁘게 하고 허망한 것을 가지고 기뻐한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영의 사람이다. 그는 세상을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산다.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믿음의 본을 보인 사도 바울은 고후5:9에서 "오직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쓴다"고 하였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신앙의 성숙된 모습이며 신앙의 절정이다. 사람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내가 너로 인해 기뻐하는 것보다 네가 나로 인해 기뻐하게 되는 것 아닌가? 마찬가지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귀결이다.

구약으로 돌아가 에녹이란 사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 창5:22을 보면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고 하였는데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히브리서11:5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에녹을 보면서 더욱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결심하게 된다.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란 다른 말로 동행하기이다. 동행이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을 먼저 믿는 일이다.
히11:6을 보면 하나님을 믿음 없이 기쁘시게 못하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에겐 상 주시는 자임을 믿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그러나 교제를 나누시고 대화를 하시고 응답하시고 돌아보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동행하는 것이 아니다. 육의 인간이 거룩한 영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열쇠는 하나님을 믿는 데 있다. 믿음이 있지 않으면 어떤 동행도 일어나지 않는다. 믿음의 사람이 됨으로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찾는 것이다.

둘째, 주의 원하는대로 움직이며 사는 것이다.
동행, 즉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내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주님의 뜻이 무엇이며 주님의 소원이 무엇이며 주님이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따라서 움직이고 행하는 것이다. 즉 내 중심이 아니다. 하나님 중심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려면 육의 사람으로서는 동행하기가 어렵다.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하였다.
주님과 멀어지는데 어떻게 동행이 되는가? 주님과 동행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영의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은 영을 쫓아야 한다. 영을 쫓는 자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뒤집어 말하면 영으로 사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목표를 정했는가? 하나님 중심이 되자. 주의 원하는대로 움직이며 따르는 믿음의 사람, 영의 사람이 되자. 사도행전에서 빌립은 가사로 가라고 하였다. 그때 빌립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가사로 간다. 주의 사자와 동행하는 것이 주의 기쁨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을 구원해 내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는 삶의 모습이다.

그럼, 언제부터 동행해야 하는가? 가능한 일찍 변하여 새 사람이 되자. 에녹은 365년을 이 세상에서 살았다. 그러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동행의 삶은 300년이었다. 그러면 65년은 어떤 세월이었나? 므두셀라는 첫 번째 아기를 낳을 때까지 65년을 영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단 말이다. 결국 에녹은 365년 중에 65을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육신의 사람이나 육의 사람이었단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수명을 산다. 그때 사람은 어릴적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가 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사는 자도 있다. 그러므로 더 일찍, 어릴적부터 주님을 기쁘게 하는 동행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봄철 부흥성회에 강사로 오신 이선희 교수의 간증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육의 생각을 쫓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다. 결국 42세에 중생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지만 그의 동행하는 삶은 겨우 10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간증자는 될 수 있고 부흥사는 될 수 있어도 목회자는 되지 못했다. 목회자는 학생 시절부터 교회를 나가서 은혜를 체험할 때에 좋은 목회자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일찍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학교 시절의 신앙 교육이 중요하다. 중,고등부 시절에 변화되어 영의 사람이 되면 그의 삶은 일찍 주님과 동행한 것만큼 거룩한 생애가 되고 주님에게 더 많은 기쁨을 드리는 자가 되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살도록 부모가 자녀를 교육하고 교회학교 신앙 교육에 관심을 쏟고 투자하는 일이 중요하다. 육으로 태어난 인간을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일찍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느냐가 교사들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에녹의 말씀을 읽을 때 가능한 한 일찍, 가능한 한 빨리 변화되어 영의 사람, 새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주님에게 내어 맡겨야 한다. 그것이 동행의 가치다. 거룩한 삶을 걷게 하는 방법이다.

셋째, 신앙인의 복이 대를 이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저주의 통로가 될 리 없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주와 동행하는 자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에녹을 보라. 아담의 후손이 가인의 후손으로, 셋의 후손으로 나뉘어 대를 이어 가는데 창세기 5장을 보니까 에녹은 셋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계보이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라멕은 아담으로부터 7대손이다. 그러나 살인자 가인의 계보로 이어지는 라멕은 죄인 중의 죄인이 되어 자기의 상함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르고 자기의 죄에 대한 벌이 77배라고 떠뜰며 죄악을 자랑한다. 그러나 똑같이 아담의 7대손이지만 셋의 후손으로 이어진 에녹은 그의 생애를 통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기에 인류 역사의 최장수 기록을 세운 므두셀라를 낳았고 본인 자신도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움을 받아 무덤이 없는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노아는 바로 당대에 의인으로 알려졌는데 에녹의 대를 이어받은 후손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삶의 결과는 분명하다. 가인처럼 그 자손 라멕처럼 동행을 거부하고 자기 멋대로 사는 자는 더 큰 죄악으로 떨어지지만 에녹처럼 동행을 좋아하고 주님 기뻐하는 삶을 따라가는 인생은 본인의 삶이 복되고 대를 이어 가면서 가정의 복, 가문의 복을 받고 더 나은 의인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서는 이 두 가지 줄기를 분명하게 비교하여 보여준다. 죄악을 가지고 그대로 살면 죄의 열매를 거두고 하나님과 동행하여 살면 의의 열매를 거두는 원리를 보여준다.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면 그대로 기쁨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갈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니라" 에녹은 동행을 심었기에 기쁨을 심었기에 썩어진 것이 아닌 의인의 자손을 거두었다. 축복의 통로가 되는 값진 삶을 거두었다.

우리는 다짐을 하자. 나 개인의 삶과 내 가정의 삶, 내 교회 안의 삶이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동행의 삶에 초점을 맞출 것을 다짐하자. 조나단 에드워드 그리고 그의 친구 맥스쥬크는 모두 신앙의 사람이었다. 결혼을 하는데 에드워드는 신앙의 여인과 결혼을 했고 신앙으로 살았다. 그러나 맥스쥬크는 방탕하게 사는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죄의 사람이 되고 혼합된 신앙으로 일관되었다. 이 두 사람이 세상을 살고 죽은 후 두 사람의 5대까지 후손을 추적해 보았다.

신앙의 가정을 이룬 에드워드는 873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그 자손들은 모두 사회와 교회와 하나님 앞에 자랑스런 자들이 되었다. 총장 12명, 교수 65명, 의사 60명, 성직자 100명, 군인장교 75명, 저술가 80명, 변호사 10명, 판사 30명, 공무원 80명, 하원 의원 3명, 상원 의원 1명, 미국의 부통령 1명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죄에 떨어진 맥스쥬크의 후손은 모두 1,292명이었으나 유아 사명 309명, 거지 310명, 불구자 440명, 매춘부 50명, 도둑 60명, 살인자 70명,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 53명이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하나님과의 동행을 거부한 삶의 결과 치고는 너무나도 비참하게 되었다. 이 쥬크의 가정은 계속해서 미국 연방의 예산을 소모하게 만드는 그리고 사람들에게 골칫거리가 되는 불쌍한 후손들이 되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 얼마나 우리들이 걸어가야 할 길인가? 우리는 주님 기뻐하는 삶이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의복을 벗어 던지고 직장을 벗어 던지고 멈추어서야 한다. 새 사람이 되어 주님 기뻐하는 삶이 되려고 애써야 한다. 주님이 기뻐하는 삶, 그것이 목표가 되고 발자취, 흔적이 되고 소원과 꿈이 되고 기도가 되고 간증이 되고 미래가 되고 노래가 되어야 한다. 이런 노래가 있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케 씻어 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 그것이 노래가 되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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