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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믿음의 법입니다 (롬 3:19-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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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는 매우 어두운 소식들로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죄의 종노릇하는 사회의 정도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사단의 세력들이 마지막 때 더욱 기승을 부림은 이미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경고받고 있습니다만, 때때로 믿음의 사람들 조차 무기력한 삼손의 모습과 같아보여 두려움을 느기끼도 합니다. 기도해야 할 때인 줄 믿습니다. 사순절이 되어서가 아니라 진정 우리가 깨어나 성도의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회복되어야 할 때인 줄 믿습니다.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대표적인 사탄의 세력은 음주문화를 통하여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술 권하는 사회, 음주로 시작하고 끝나는 분위기가 온통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듯 여겨질 정도입니다. 흔히 음주는 술집에서 하는 행위라고 여겨지지만 현실은 더욱 대담하고 광범위한 상황입니다. 저녁에 일과를 마치고 간단히 친구들과 한잔하는 개념이라면 차라리 좋겠습니다.

낮 시간에 점심을 먹기 위해서 식당에 가보면 거기에는 으레껏 소주가 기본으로 주문되어져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부들이 식사를 하는 자리에도 별로 상황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녁 시간이 아닌 낮 시간대에도 음주의 그릇된 습관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전방위적으로 음주문화에 엄습당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때론 순결한 성도들만이 음주문화의 저변에서 외톨이처럼 소외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통계를 보면, 연간 22,008명의 한국인이 음주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이중 80.9%가 음주관련 질병으로, 16%는 음주관련 자살로, 3%는 음주운전으로 사망합니다. 또한 음주관련 사망자의 73.5%는 남자, 26.5%는 여자로서 술은 한국인의 주된 사망원인으로 나타났습니다. 가정의 파탄원인이 술로 시작됩니다. 명예스러운 공직자들이 추락하는 것도 술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처음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점차 술이 술을 먹고 나중엔 술이 사람을 먹는다는 격언처럼 결국 술은 술 마시시는 자를 완전히 정복해 버리는 힘이 있음을 이 사회적 통계는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한 국회의원의 음주후 여기자 성추행 사건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음주문화의 그릇된 부분들이 알려지게 되어 각성의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만, 정작 본인은 이 정도를 가지고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대처하고 있어 여론의 강한 질타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보통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나면 으례껏 성이 차지 않아 2차, 3차로 가면서 결국 폭탄주를 하는 것이 코스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행태는 국민의 대표로서의 국회의원이나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가장 본이 되어야할 판사나 검사등 지도층의 폭탄주를 즐기는 문화는 가장 먼저 청산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사로잡는 또 다른 사탄의 세력은 음행입니다. 최근 우리는 음행의 문제로 인하여 가장이 파탄될 뿐만 아니라 살인으로 까지 비화된 청와대 행정관의 살인사건을 접하고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회는 온통 멜로 스토리가 없으면 부끄러울 정도의 이상한 분위기가 만연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애인이 없습니까?..." 안방을 점령한 텔레비전의 황금시간대의 드라마들은 서로 경쟁하듯 불윤을 부추기고 있지 않습니까? 불륜을 너무 멋지게 엮어가니까 그런 욕구를 자연스럽게 확산해 가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한다고 하면 괜찮은 사람들이 근무하는 곳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만, 청와대 모 행정관이 같은직장에 근무하는 젊은 여성을 애인으로 두고 사귀다가 큰 일을 겪고 말았습니다. 밤12시에 애인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부인이 받은 것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그일로 다투다가 홧김에 술을 마신 부인이 밖으로 뛰쳐나갔고 그 뒤를 따라갔던 남편은 홧김에 넥타이로 목을 졸라 죽인 것입니다.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으리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변함없는 교훈인줄로 믿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모를 떠나서 한 몸을 이루라며 가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법을 지킬 때 가정은 평안과 행복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나 그 법이 깨어지면서 시기와 갈등이 들어왔고 결국 살인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아마 그 행정관은 애인을 두고 즐기면서 "21세기에 사는 사람이라면 애인 하나 정도는 두고 즐겨야지..."라며 나름대로 즐기다가 결국은 패가망신하게 된 것입니다. 끊임없이 음행의 동기들을 부추기고 있는 사회 분위기속에서 그것이 정당한 것처럼 죄의 세력들은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죄에 종노릇 하는 사회 속에 길들여져있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순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는 사회입니다.

죄의 종노릇하는 삶의 고리를 끊기 위해 사람들은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술을 끊기 위해 금연학교를 다녀보고, 음행을 예방하기 위해 고자로 만들어 보지만 내시들의 음행과 부패는 더욱 심각했었습니다. 대를 이은 도박을 끊기 위해 손가락을 끊어보지만 결국 발가락에 화투장을 끼워 노름을 계속하였다는 소식에 우리는 할말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인간의 의지와 감정과 결단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음을 우리는 겸손히 고백하길 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오직 믿음의 법입니다."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 음행과 도박, 술과 같은 사탄의 유혹을 의지만 가지고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반복되는 우리의 연약함은 식충식물의 화려한 우혹처럼 달콤함이 발라져 있기에 더욱 힘들어 보입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을 보면, 식충 식물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는데, 꽃이나 잎사귀가 얼마나 화려하고 향기가 나는지 나비와 같은 곤충들이 다가와 앉도록 만들어 놨어요. 아름다움과 향기에 반해 벌이나 나비가 앉으면 끈끈이가 있어 발이나 날개가 들러붙게 되고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쳐보지만 꽃잎이 닫히면서 곤충들은 먹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0절에 보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지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기에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율법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기에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의가 무엇입니까? 곧 복음인 줄 믿습니다.

복음은 굿 뉴스입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늘 계속되던 정치분야에서의 답답함과 어지러움증을 홈런 한방에 멀리 날려버리는 통쾌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월드베이스볼클라식(WBC)에 출전한 우리나라 야구대표팀의 선전 소식이 바로 굿뉴스였습니다. 이 자그마한 야구공 하나가 4,500만을 이렇게 하나로 통합시키는 능력이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2002년에는 축구공 하나가 대~한민국을 하나로 만들었는데 말입니다. 막강한 권세를 가진 대통령이 하지 못하는 일을, 온갖 기득권을 가진 정부여당이 하지 못하는 일을 힘없는 스포츠선수들이 오히려 국민들을 어루만지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을 통합시키는데는 방송들의 역할도 컸습니다만 이번 WBC를 보도하는 경우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황금시간대라고 하는 9시 뉴스는 30초 정도만 보도해도 그 영향이 엄청나지요. 그런데 그 9시 메인 뉴스에 무려 야구소식이 37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KBS는 물론이고 MBC나 SBS도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스포츠 뉴스시간에 또 다시 야구소식을 이어간 것이지요. 세계적으로 도시 친환경사업의 모델이 되어 주목을 받았던 청계천복원사업이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아 수많은 나라에서 취재를 오는등 관심을 가진 국가적 뉴스임에도 불구하고 KBS를 비롯한 방송 3사가 하나같이 중계를 외면하고 딴짓을 하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일종이 방송미디어의 냄비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송사마저 국민의 관심사에 편승하여 정도를 벗어나면서 까지 파행방송, 편파방송으로 권력과 여론에 아부해 보지만 그러한 관심과 인기도 한 주간, 길어야 한 달도 채 못가서 무관심속에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야구소식, 축구소식이 분명 굿뉴스인것 만은 분명한데 한시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난 2,000년간 변함없이 모든 민족, 모든 사람에게 굿뉴스가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세지인줄로 믿습니다. 저는 그 변함없는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고 싶습니다.

21절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인이 차별이 없느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야만인이나 문화인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는 이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이 의가 오늘날 우리에게 영원한 복음인 줄로 믿습니다.

본래 우리는 죄 아래 있었습니다. 죄 아래 있었다고 하는 말은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곧 죄의 힘, 죄의 권세 아래 있었다는 말입니다. 죄는 추상명사가 아닙니다. 죄는 권세요 파워입니다. 그 죄의 권세가 강할 수록 우리는 억눌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시는 십자가의 능력을 헬라어로 디카이오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의롭다고 간주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신학적인 전문용어로는 칭의입니다.

우리가 결코 의롭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셔서 의로움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가 바로 "이신득의"인데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로마서의 핵심적인 사상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오늘 주님의 자녀요 천국의 시민이 된 줄로 믿습니다.

25절입니다."이 예수를 하나님의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느니라"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신줄 믿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지만 우리의 욕심과 정욕, 우리의 자랑과 교만 때문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문제였습니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의 방탕한 둘째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가 탕진한뒤 결국 할례받은 유대인으로서 살기위해 돼지 농장으로 갔으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거라사 지역에 돼지가 집단적으로 양육되는 기사가 나옵니다만, 그것은 이방인, 특히 로마의 군인들에게 보급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결국 탕자는 깨닫습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많은 품꾼들이 있지만 얼마나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풍족하게 살고 있는가...그러다가 용기가 생깁니다. 돌아가야 하겠다는 결심이 서자 이제는 자신의 위치가 문제입니다. 이제 아들로서는 돌아갈 수가 없고,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말씀 드려야지....맨발에 거지가 되어 돌아가지만 이미 아버지는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입을 맞추어주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이제는 탕자가 아니며 품군이 아니라 상속자라는 표시입니다. 탕자가 용기를 내어 회개하며 돌아왔을 때, 그가 다시금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되는데 다른 조건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인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용서함을 입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불순종과 육신의 정욕으로 인해서 원수가 되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케 하시는 제물이 되셨습니다. 화목케 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을 가지고도 불가능했지만, 오직 피로써 가능했기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신 줄로 믿습니다. 디카이오오, 이것이 칭의요 이것이 은혜인줄로 믿습니다. 이 은혜에는 예외자가 없습니다. 차별이 없이 누구에게든지 허락된 줄로 믿습니다.

하박국 2장 4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렇습니다. 믿음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리는 것 믿음인 줄 믿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를 살리는 것도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을 살리고 우리의 심령들이 회복되어 지는 것도 믿음인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의 것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죄의 권세 아래 눌려 죄에 종노릇하는 사회 속에서 마당히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권세를 바로 행하지 못하고 억눌려 있었던 우리임을 고백합니다. 때때로 유혹까지 당하는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 오직 믿음의 법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녀의 권세를 얻었습니다. 차별이 없는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 소식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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