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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과 본능욕 (눅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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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과 본능욕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40일동안 성령에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4:1-4)

창세기 1:27-28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아직도 신학자들의 논란의 과제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인간에게만 갖고 있는 그 무엇, 그 무엇이란 동물에게는 없는 양심, 종교심, 즉 영적 존재란 말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구조는 물질적인 것(육체=쌀크스)과 비 물질적인 것(영혼=푸뉴마)으로 지음받은 특유한 존재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육체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그렇다고 육체를 부인하고 영적인 것 만으로 사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희브리 사상으로 보면 사람은 영육을 합한 전인적 존재(Total-Being)으로 이해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면서 특히 복을 주시면서 한 말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1) 역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 땅을 정복하라.
3)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 말들은 모두 명령형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에게 본래적인 능력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능(本能)이라고 합니다.

본능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 본능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주관하고, 다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능 자체가 악(惡)한 것은 아닙니다.
또 본능욕이 죄(罪)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본능욕이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간 후부터, 본능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지 못하게 되면서 죄가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여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이 말들은 모두 본능욕을 나타내는 말들입니다. 특히 여기 먹음직도 하고...는 바로 <식욕>을 의미합니다.
보암직도 하고...는 소유욕입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고...는 명예욕입니다.
시조 아담과 이브는 바로 이 유혹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 후부터 인간의 본능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 죄와 연계되게 되었고, 죄의 값이 사망으로 끝나버리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1. 인간의 본능욕 중에 제일 강한 욕망은 식욕(食慾) 입니다.

굶주림의 비극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고(人間苦)를 ‘춥고 배고픔’이란 말로 사용합니다.
배고플 때 가장 강력한 유혹은 식욕의 유혹입니다. ‘3일 굶으면 도적질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만큼 식욕의 강렬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여기 70세 이상 된 분들은 6.25 세대들입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시대에 굶주림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를 다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다 경험한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7,8월 긴긴 날에 점심을 먹지 못하고 지낸다는 것, 한번쯤 상상해 보십시오. 20대 초반에 한창 먹을 나이에 하루에 보리밥 한 그릇 먹고 저녁까지 지내려면 참으로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쩌다 건빵 한 봉지를 얻은 적이 있어, 그것을 한번에 다 먹을 수도 있었지만, 내일을 바라보면서 한번에 다섯 개씩 마치 한약방에 약봉지처럼 그렇게 갈라 놓고, 그것을 먹고 물 한 그릇 들이키면서 배 고픔을 이겨보았던 경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문호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참 뜻을 모른다’고 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본능욕 가운데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 식욕이라면, 우리 주님도 바로 이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과 굶주림의 관계에서 주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인의 생활에서도 경제적 문제는 항상 따라 다닙니다.
흔히 세상에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이 죄>란 말이 있습니다.
굶주림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위적 해석들을 합니다.
죽지 못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식들을 키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렇게 살 바에는 죽어버리는 것이 나으리라고 동반 자살을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난의 문제, 신앙과 경제적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겠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을 극복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40일간 스스로 먹기를 포기했었습니다.
자신의 메시아직 사명 완수를 위하여 스스로 금식을 했습니다.
그것이 끝난 후 찾아온 것이 사탄의 유혹이었습니다.
참으로 사탄의 유혹은 집요했습니다.
한창 시장기를 느꼈을 때,
이제 기도가 끝났을 때,
먹어야할 때가 되었을 때,
그 때, 바로 식욕의 유혹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큰 교훈을 찾게 됩니다.

2. 사탄의 유혹은 바로 이렇게 굶주렸을 때 찾아옵니다.

‘돌로 떡이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얼른 보면 정당한 말인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
이제 기도도 끝났으니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이든지 못할 것이 없으니 돌로 떡이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방법’을 택하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주어진 능력을 메시아적 사명완수에 사용하기 보다, 먼저 굶주림의 해결책으로 사용하라고 유혹하였습니다.
그것을 우리 주님은 극복 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이 범하기 쉬운 유혹이 바로 이 경제적 유혹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신앙보다 현실적 문제 해결이 앞서기 쉽습니다.
우선에 먹는 문제부터 해결해 놓고 다음에 신앙생활을 하라는 유혹입니다.
주일도 그렇게 지키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신앙 보다 내 현실 생활을 더 긴요하게 여깁니다.
교회의 직분보다 내 먹고사는 현실 문제가 더욱더 급합니다.

어떤 분은 경제력이 없어지니 신앙도 사라지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먹은 후에 하나님도, 천국도 있지, 배 고프면 그런 것들이 다 눈에 보이질 않는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된다면 떡이 하나님 보다 앞서게 됩니다.
즉 <돈>이 하나님 위에 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요즘 이 유혹에 넘어간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인이라고 다 신앙의 사람들이 아닌 경우들이 많습니다.

3. 사람에게 떡이 있어야 하지만 신앙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떡 자체에 삶의 목적을 둡니다.
‘모두 먹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말을 합니다. 떡이 육체의 건강유지가 되지만, 목적없는 건강은 본능욕을 채울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주님도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떡(돈)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육체의 건강 유지를 위해서는 <떡>(돈)이 있어야 하지만, 영혼을 위해서는 <말씀>이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구성 요소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었기에 그렇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영혼을 부인하지만 부인한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영혼이란 말 대신 이성(理性)이란 말을 사용하지만,
<이성>이란 결코 물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로 온 것입니다.
인간에게만 합리적(合理的)사고(思考)의 능력(能力)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동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본능대로 행할 것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동물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또 달라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능을 참고 이길 수 있는 길은 <말씀>의 힘으로 가능합니다.
잘못된 사상으로도 단식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영원을 사모하는 영혼의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가 삶의 목적을 바로 가질 때,
영원을 사모하게 되고 본능욕을 제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힘으로 초대교회 신자들은 토굴 속에서도, 땅굴 속에서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12:15-16)

지금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지내는 사순절입니다.
행여 우리도 에서처럼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기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도록 끝까지 신앙을 지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김이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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