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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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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우리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참 힘겹게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스쳐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동시에 같은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들은 거의 개의치 않고 혼자 부지런히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매우 고독해 하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고독하니까 그 고독을 잊어버리려고 가끔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서입니다. 가끔 다른 사람에게 매우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사람들을 봅니다. 아마 자기주장을 지나치게 하는 분들을 보면 사는 게 매우 어려운가보다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는 게 너무 어렵다 보면 다른 사람을 배려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에 쫓기다보면 우리는 남을 돌아 볼 수도 없고 또는 나 자신이 한 행동을 다시 한 번 살펴볼 기회도 없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 어떤 제한된 사람들의 모습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고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면 씩씩하게 잘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왠지 모르게 그 씩씩한 뒷면에 스치는 씁쓸한 미소를 보면서 참 안쓰럽게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역시 느끼게 됩니다. 안타깝고 애처로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참 이상합니다. 모든 사랑과 정은 아파하는 사람, 안타깝고 애처로운 사람을 볼수록 더 마음이 가는 법이고 참 안됐다 싸매어 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봅니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면서 우리 성도들의 삶의 들여다보면 사는 것이 정말 힘들기는 힘든가 보다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이 다 되면 우리 삶이 왜 힘들겠습니까? 누구든지 다 후덕해지고 관용할 수 있고 누구든지 다 관대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이 자꾸 날이 서고 뾰족해지고 우리의 삶 속에 여러 가지 극복 못하는 아픔 때문에 마음속에 눌림이 있어 더욱더 초조하고 고통스러워 지는 것을 봅니다.

오늘도 이 자리에 앉아계신 성도님들 중에 이와 같은 심정을 가진 분들이 충분히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사는 게 힘겹고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아마 이 자리에 앉아 계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그런 생각이 드신다면 오늘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가 쉼을 얻으리라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주님께 오라고 하셨으니 바로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 와서 우리의 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돈을 벌어야하기 때문에 혹은 자녀들을 키워야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도 관계를 가지며 인간관계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또 혹은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듣기 싫은 말을 하고 하기 싫은 소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마음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삶의 일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일도 쉽지 않고 관계도 쉽지 않고 여러 가지 일들의 결실을 맺는 것이 쉽지 않다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하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 그것이 바로 나에게 하는 말씀이구나라는 생각을 누구든지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는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잠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삶이 힘들고 외롭고 고적해질 때 나를 위로해 줄 이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때 광야에 홀로 서있다고 생각할 때 주님이 나를 오라고 부르시는 말씀이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짓눌려 있음으로 말미암아 버틸 힘이 없다고 생각될 때 주님께서 나를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누군가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애쓴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수고해서 무겁고 지친 짐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초췌한 모습을 가지고 가도 우리는 괜찮습니다. 짐에 눌려 애처로운 모습이라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살아가는 원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의 심정을 가져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주변 사람들을 보면 왜 그렇게 가엾은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다 허덕거리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 같아도 그 또 다른 면에 지치는 고독의 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허덕거리고 일찍 아침에 나가서 종일 수고했지만 저녁에 두 손에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때 그 마음에 가지고 있는 이런 아픔과 고통과 괴로움을 능히 이해할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축 처진 어깨가지고 손으로 벨을 누를 때 그 손에 아무것도 쥐어지는 것이 없을 때 허탈함 그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누구나 그렇지 않으려고 애를 써보지만 결국 애처로운 삶속에 허덕거리고 있는 우리의 삶을 봅니다.
그래도 좀 사정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형편이 좋다거나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것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늘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대부분 소수이고 많은 사람들은 삶 가운데 무거운 짐을 지고 지척거리고 살아감을 봅니다. 좀 더 나은 사람도 좀 더 어려운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늘을 향해 허공을 한번 손이라도 그냥 내질러 보고 싶고 발에 뭔가 걸리면 냅다 내질러 버리고 싶은 마음속에 갑갑함을 느끼고 사는 것이 우리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괜찮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이해하고 있으니 그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을 가지고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무거운 짐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들에게 부과된 의식적이고 무거운 율법적 유전과 멍에였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 바리세인, 율법학자, 서기관 이런 사람들은 자기도 지키지 못했던 이와 같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양심의 가책에 눌려 구원을 받지 못하고 구원을 찾아 방황합니다. 죄책감을 느껴 날마다 고통을 누리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죄책감으로 인하여 양심의 눌림으로 인하여 고통으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는 이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굴레 가운데 눌려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멍에는 매우 쉽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 양심의 가책 율법으로부터의 공포 평안과 안심이 없는 마음의 갈등상태로부터 자유의 세계로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의 공포의 세계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것은 당시에는 구체적으로 지지 않아도 될 율법의 그릇된 굴레와 공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의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주님 앞에 오라고 했는데 우리에게 무거운 짐과 수고함은 무엇입니까? 자유를 상실하게 하고 고통을 느끼고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슴 아파 눈물 흘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돈을 벌어야하기 때문에 마음에 자유가 없습니까? 빼어나지 못해서 비교 속에서 열등감 속에 자유하지 못하십니까? 자랑하고 싶은 성취감 때문에 자유롭지 못해 허덕이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위에 서고 싶은 욕망 때문에 자유롭지 못합니까? 인기 때문에, 자녀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지위 때문에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앞으로의 보장을 이루지 못해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까?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짐이 되어 우리의 자유를 상실하고 있을 때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지금 나에게 있어서 가장 무거운 짐은 무엇일까를 생각할 때 이렇게 생각하면 쉬울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모든 것을 다 훌훌 털어버리고 갈 수 있으면 그것은 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나는 이건 안 돼 이건 꼭 있어야 돼.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어야 돼.’ 이게 결국 우리들에게 무거운 짐입니다. ‘주님 저는 돈이 없어도 되요. 있으면 감사하고요. 없으면 없는 대로 또 제가 거기 맞추어 살겠습니다.’ 돈은 우리에게 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사람에게 박수 받지 않고 인기 없어도 됩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삶의 여건 속에서 저는 그저 마음 편하게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인기나 박수도 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 이건 꼭 있어야 되요. 이것 없으면 나는 못삽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짐이 되고 우리의 삶을 얽어매고 발목을 잡는 무거운 짐입니다.
사람에게서 가장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집착하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순간 우리들에게 평안이 깨집니다. 평안이 깨지는 순간 자유를 잃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노예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릇된 집착이 있어서 우리의 평안을 깨뜨리고 자유를 잃어버리고 노예의 상태 같은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집착, 마침내 우리로 하여금 평안, 자유 모든 것을 깨뜨리고 노예의 상태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집착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삶에 자유를 잃고 고통 속에 무거운 짐에 이리저리 매달려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와 같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선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주님께 오면 다 받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태가 문제가 아닙니다. 구비할 여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 오면 다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누구든지 와서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 그것이 쉽고 가볍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도 내 마음에 들 때까지가 아닙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 말도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을 때까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을 때까지만 이라는 전제조건이 붙지 않습니까?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과 원수같이 헤어지는 것도 봅니다.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이 서로 비난하는 마음도 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조건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조건이 있다고 우리 인간은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조건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오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단서조항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도 있고 주님 앞에 나아갈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이룰 때 오늘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은 누구도 구별하여 ‘너는 안돼, 너는 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저는 병원심방을 다녀 올 때마다 마음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정말 아픈 성도, 어려운 성도를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정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렇게 기도할 때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다라는 애타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마음에 애타는 심정이 있는 것은 누구나 당연한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애타는 어려운 문제를 외면할 리 없다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나올 때는 늘 말씀드리죠. 엘리베이터타고 내려올 때, 계단 걸어 내려올 때 정말 내가 이렇게 걷고 있는 것이 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삶에 사명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렇게 중환자실에 누워서 정말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나는 내 다리를 가지고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늘 수없이 말씀드리지만 내 손가지고 내 숟가락 가지고 밥을 떠서 입에 넣고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도 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체가 건강하고, 또 뿐만 아니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축복의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욕심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곤고한 짐을 우리들에게 부여함으로 짓누르고 있지만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서 늘 촛불로부터 자유라고 설명 드렸습니다. 여러분 여기 전등이 다 나갔습니다. 그래서 촛불을 하나 켰습니다. 환해졌습니다. 그 주변이 조금 환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책을 읽으려고, 뭔가 구별을 하려고 촛불로 모여듭니다. 그런데 촛불로 모여드는데 전등이 탁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촛불은 필요 없게 되어 ‘후’ 불어서 촛불을 끌 것입니다. 촛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촛불 밑에 모이지 않아도 됩니다. 촛불이 없어도 됩니다. 그 가운데 희미하게 보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는 환한 전등불 안에서 모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나 이것 없으면 안돼.’ 나는 그 촛불 밑에 모이는 것처럼 애절하게 우리는 소원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의 빛이 우리들에게 비취게 될 때 그 촛불은 우리들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촛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애달파하고 내가 그렇게 목을 매고 이와 같은 모든 집착으로부터 내가 그렇게 이것 없으면 안돼라고 생각했던 이와 같은 것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촛불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내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욕심 내 마음에 그렇게 집착했던 삶의 안타까운 집착들, 그리고 내 마음에 왜곡된 심정들 내 마음속에 욕심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자유와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죄 짐을 벗어버리고 욕심을 벗어버리고 내 마음에 있는 모든 그릇되고 왜곡된 심정을 벗어버리고 주님 앞에 평안을 누릴 수 있어야 됩니다. 오늘 주님 앞에 오시면 주님의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다 벗어버리게 하고 율법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의 가벼운 멍에를 우리들에게 메어 은혜를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선생은 율법이 인간이 감당해야 될 하나님의 멍에라고 가르쳤습니다. 멍에를 지는 수고를 해야 천국에서 안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율법의 멍에가 아니라 주님의 멍에를 메고 즐겁게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의 농경문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미 소가 쟁기를 매고 밭을 갑니다. 그런데 새끼소도 그 위치에서 쟁기를 메고 열심히 따라가는데 어미 소의 큰 힘으로 맡을 가니 새끼소는 따라만 가면 됩니다. 그런데 어미 소를 따라가다 보면 새끼소도 저절로 힘이 붙고 방법을 터득해서 이제는 나중에는 그 일을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저절로 그 일을 하게 됩니다. 언제 내가 힘이 붙었는지 언제 내가 그런 능력이 생겼는지 모르게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그 멍에는 가볍고 쉽습니다. 그런데 그 멍에를 메고 가다보면 우리는 기쁨과 은혜 가운데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증세가 아닙니다. 너 믿음이 있어야 돼. 너 왜 믿음도 없어? 이렇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믿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믿음의 힘도 생기고 능력도 생기는 것입니다. 갈등의 과정은 있으나 마지막 순간에는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여 기쁨으로 꽃 피울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믿음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제로 우리들에게 구원받아야 돼 이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기쁨으로 주님을 따라다니다 보면 내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집니다. 감격스럽게 그리스도의 감격이 내 가슴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내 마음속에 구원의 확신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 괴로운 것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 고통스러운 것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 너무 좋아서 이 세상에 이전에 누리던 것이 별로 마음속에 차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동차 새로 샀다고 합시다. 이전 보다 좋은 차입니다. 그래도 아무래도 이전에 운전하던 자동차에 정이 들었겠죠? 매년 운전하다 보니까. 그럼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새 자동차 타고 보면 그래도 옛날 자동차가 좋은데 하는 마음도 있을 법 하겠죠. 그런데 그러면 여러분 새 자동차 버리고 옛날 자동차 타나요? 아니에요. 새 자동차 타면 새것이고 좋은 차이고, 느낌도 새롭고 그 자동차 타다 보면 옛날 자동차는 잊어버리게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너무 좋아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기뻐서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것을 누리다 보면 이전 것은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위가치를 발견했을 때 전에 있던 하위가치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전혀 생각이 안 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생활을 하면서 참 마음에 기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예수 믿어 구원받고 은혜생활을 할 때입니다. 특별히 남자 성도님들이 이럴 때 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예배드리면서 저에게 의사표현을 분명히 하는 것을 제가 느끼고 있습니다. ‘나 이 시간 예배드리러 온 거 아니야, 알겠지?’ 거의 이런 것 같습니다. 팔짱끼고 눈 딱 감고 절대로 쳐다보지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습니다. 너무 강하게 표현 안하셔도 됩니다. ‘내가 가정의 평안을 위해서 내가 이곳이 온 것뿐이지.’ 이런 분들의 특징을 보면 주보는 참 재미있어 합니다. 이것을 한 시간 동안 봅니다. 제가 봐도 4페이지짜리 주보 한 시간동안 읽을 것 없는데 한 시간 동안 주보 봅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인사할 때 절대 목사와 악수 안하고 저 쪽으로 비껴서 갑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참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팔도 내려오고 눈도 떠지고 고개도 들어지고 점점 더 그 표정이 바뀌어집니다. 저도 15년 동안 똑같은 상태에서 내려다보니 이제 표정 하나하나 다 살펴볼 수 있습니다. 15년 동안 보니 표정 하나하나가 다 보입니다. 그리고 그 표정 뒤에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생각들도 읽혀집니다. 우리 목사님이 마음을 다 읽나? 아니요, 잘 몰라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런데 언젠가 어떤 성도님들이 나가시다가 제게 악수를 청하시면서 ‘목사님, 제가 예배드릴 때마다 인내하면서 살아왔는데 그런데 오늘은 제가 인내하지 않고 참 은혜롭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한 시간 동안 인내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시간만 가라. 내가 한 시간도 못 참나.’ 그래서 인내했는데 이제는 인내하지 않고 마음에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참 너무나 기뻤습니다. 여러분 인내하십니까? 감사하십니까? 여러분 우리 예배드리는 한 시간이 인내의 시간이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인내하던 사람이 주님의 멍에를 지고 바라보면 인내가 아니라 감사와 감격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참 감사해요.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 보면 주님의 멍에를 지고가다 보면 어느새 믿음의 힘이 생깁니다. 전에는 감당하지 못했어요. 슬픔이 있으면 견딜 수 없어요.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요. 정말 내가 용서 못해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거 원수를 갚아야지. 나는 절대 용서 못해. 나는 내 마음 풀어지지 못해.’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그 마음이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라” 우리 마음에 죄의 짐이 풀어지고 사랑의 마음이 담겨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생각이 들어지는 순간 우리 마음이 달라집니다. 그러니 힘이 생깁니다. 믿음의 힘, 사랑의 힘, 능력의 권세 우리 마음속에 용기와 소망이 생깁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점점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렇게 인사하면 큰일 납니다. 10년 동안 한결같으세요. 이렇게 인사하는 것은 큰 욕입니다. 하나도 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1년마다 바뀌고 매달 바뀌어야 합니다. 옆에 사람에게 인사합시다. ‘매 달 바뀌네요.’ 그 말은 전에는 당신이 형편없었는데 이렇게 바뀌었다는 말이 아니라 전에도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더 이렇게 좋은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보고 정말 변함없네 하는 것은 큰 욕입니다. 그런 얘기는 하지 마세요. 정말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매일 매일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매번, 매일 말씀 한마디를 들어도 바뀌고 기도 한번 해도 바뀌고 내 마음 속에 은혜 한번 받으면 바뀌고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는 것, 얼마나 우리 삶 속에 기쁨입니까?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도 비 오고 눈 오고 바람맞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라는 것은 그와 같은 모든 상태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악하고 삶이 악해서 거짓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말하고 양심에 가책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하고 회개하고 다음에는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애쓰고 그러다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완성된 사람은 아닙니다. 완성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허물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하고 애쓰려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주님의 멍에를 지고 배우니 점점 주님의 은혜가운데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마음에 힘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힘이 중요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니 내 멍에를 배우라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육체적인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해결입니다.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심령의 해결이 더욱더 중요합니다. 주님이 병을 고칠 때마다 어떻게 말씀하셨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네가 너의 병에서 건강 할지어다” 우리 마음이 이렇게 되면 우리 육신도 더욱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주님 앞에 마음의 쉼을 얻고 신뢰를 가지고 평안함을 누리시면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안함과 신뢰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뢰함을 가지면 우리는 마음이 평안해 질 수 있습니다.
운전을 배울 때 초보운전자들, 처음 운전을 배우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어떻게 해서든지 태워주려고 합니다. 자기 집과 반대방향의 사람들에게도 태워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저는 괜찮아요. 안 바쁘니까 괜찮아요.’ 이렇게 거절하는데도 태워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초보운전이 언제 끝났는지 알 수 있는가 하면 남을 태워준다는 말을 잘 안할 때 초보운전이 끝나는 것입니다. 처음 운전을 배우면 그렇게 남을 태워주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 차에 옆에 타면 불안합니다. 꽉 붙잡아서 어깨도 아픕니다. 그런데 우리가 옆에 운전 오래한 사람 차에 타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깨도 안 아프고 평안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 평안히 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내 마음도 아시고 내 생활도 아시고 내 삶의 기쁨도 베풀어주실 주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우리 주님께 대한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신뢰를 하면 우리는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합니다. 가볍고 쉽다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지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주님 따라 가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가고 순종하고 하나님이 역사를 이루시면 우리 삶에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 날 좀 하루 쉬고 평안히 지내십시오. 돈도 벌지 말고 세상 일 하지 말라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더 큰 평안과 힘을 얻어 더 열심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 주일 날 꼭 교회에 보내세요 하는 말은 공부도 시키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와 지혜를 마음껏 누리도록 하나님 앞에 주의 뜻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헌신하십시오, 그것은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바치고 여러분 거지 되십시오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헌신하고 더 큰 축복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누리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들에게 큰 무거운 짐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짐이 아니라 힘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의 영광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쉬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일이지만 주님이 그 일을 대신 감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모든 문제에는 출구가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도 다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꼭 해결 할 곳에 가야 합니다. 우리의 무거운 문제를 해결하는 출구는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들이 죄를 지어서 영원한 죽음의 세계에 빠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것을 믿으면 우리들에게 죄를 씻어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믿으면 우리들에 죄를 씻어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의 능력을 주십니다. 세상에 우리인간들의 죄의 짐을 떨쳐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너희는 내 멍에를 지고 배우라 그것은 쉽고 가벼움이라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거운 짐을 가졌어도 바로 찾아가야 합니다. 바로 찾아가야 됩니다. 엉뚱한데 찾아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전에 교회에서 저희 집을 걸어갔습니다. 한 5분이면 갈 수 있는 길이라서 걸어갔습니다. 차 타고 가는 것보다 걸어가는 게 더 좋잖아요. 그런데 자동차 타면서 그런 실수는 없었는데, 걸어가다 보니까 제가 깜박 실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201동에 사는데 202동에 들어간 것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층수에 가서 벨을 눌렀는데 안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나오는데 다른 집인 것입니다. 큰일났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 동네 분들 대부분 저를 다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산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전에 세탁소에 세탁물 맡기러 갔다가 저를 모르시는 줄 알고 가만히 나왔습니다. 그런데 세탁소 하시는 분이 “안녕히가세요. 목사님” 하시는 것입니다.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동네 슈퍼를 가더라도, 저는 모르는 줄 알고 물건하나 사가지고 나왔는데 “목사님 안녕히 가세요.” 이렇게 얘기하는데 정말 굉장히 당황스럽지요. 이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기로 했습니다. 교회 안다니는 분들도 다 아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 알고 생각하고 사는 게 편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벨을 눌렀는데, 집주인이 나와서 저를 보면 어떻게 하겠어요. 제가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그래서 아래층으로 막 도망 내려왔습니다. 두세층을 내려와서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그 집 문이 열리더니 아이 하나가 나오더니 “엄마 목사님 심방 왔어”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이에요. 목사는 혼자 심방가지 않습니다. 절대로. 꼭 대동자를 함께 심방을 가는데, 나는 혼자 집에 가려고 하는데 심방 왔다고 아이가 나오더니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어떻게 했겠어요? 또 아래층으로 도망 내려 왔습니다. 그래서 난감무지 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바로 찾아가야 합니다. 엉뚱한데 찾아가면 난감한 일 많이 겪습니다.

여러분 내가 무거운 짐 어디에 맡기겠습니까? 우리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 삶의 곤고한 짐을 어디에다 맡길까 우리 주님 아니면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만 가야 합니다. 모든 것은 바른 출구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출구는 무엇인가? 우리는 주님 앞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참 감사하게도 이 시간도 본당, 소예배실, 드림2실, 3실, 4실 각 교실에서 이렇게 여러 성도님들이 각 교실에서 여러 성도님들이 같이 마음을 합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볼 때 참 마음에 감사함과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성도님들 오늘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내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우리 주님 앞에 다 내려놓고 오늘 편안한 마음으로 가십시다. 걱정과 염려 근심 다 내려놓고 우리 모든 죄의 근심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갑시다. 내가 세상에서 그렇게 집착하던 것 이것 없으면 안 돼 하던 것 오늘 다 내려놓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멍에를 매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멍에, 평안의 멍에, 안식의 멍에, 주님의 기쁨의 멍에 이 멍에를 메고 주님의 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 마음에 쉼을 얻게 됩니다. 정말 쉴 수 없는 세상이지요. 너무나 고통스러운 세상이잖아요. 우리는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아침을 먹고 나서 한참 있다가 배고프면 ‘아, 점심때 되었구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침 먹고 한참 있다가 배가 고프면 12시나 1시쯤 되었구나라고 느끼지요? 우리 삶에 고독할 때 외롭고 쓸쓸할 때 고적하다고 느낄 때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때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주님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때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셨지요? 주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옆집 아저씨가 불렀는데요. 옆집의 자매님이 부르셨는데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을 통해서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부르셨다고요? 때가 되어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어 마음의 평안, 기쁨, 마음의 즐거움을 주시기 위해서 따라서 우리의 생활의 즐거움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리저리 삶이 흘러갑니다. 내가 원치 않는 곳으로 흘러가요. 내가 원하는 곳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바람에 낙엽이 흘러 다니듯 그저 이리저리 바람에 쓸려 흘러가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 흘러갈 때가 있습니다. 낙엽은 자기가 원치 않는데 그냥 내려져요. 그리고 흘러가요. 그리고선 그 위에 비가 내리고 썩어지면 새로운 생명이 움돋는데 양분이 되어 또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순간 그 순간에 우리의 삶은 새롭게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가 그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생명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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