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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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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우리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이 있다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사람마다 그 행복의 기준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일 때 힘들어 합니다. 조금만 더 배웠더라면,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가진 것이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재주가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건강했더라면……. 아쉽기로 말하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반면에 남들이 볼 때는 전혀 행복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도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심지어는 저렇게 하고 어떻게 살까 하는데도 그 사람은 그렇게 편안하게 살아갑니다. 얼굴에는 언제든지 행복한 모습이 가득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고개를 흔듭니다. “아니 어떻게 저런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가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어느 날 거짓말처럼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걷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걷고 싶은 마음이야 왜 없었겠습니다마는 태어날 때부터 이 사람에게는 몸에 이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걷고는 싶지만 걸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걸을 수가 없다보니 사람답게 살 길이 없습니다. 당시로는 걸을 수 없는 몸을 가지고는 할 만한 일이 거의 없습니다. 아니 당시 사회에서는 날 때부터 장애자로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 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조차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에게 배움의 기회가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나씩 익힌다는 기술조차도 익힐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살아갈 길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결국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동정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걸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냥 한 목숨 끊어버리면 쉽겠지만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죽을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보려니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는 걸인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래 이렇게 살아왔는지는 모릅니다. 이 사람의 나이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에게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그가 사람들의 도움을 청하고 있는 곳이 바로 성전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리는 성전 문 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그를 이 자리까지 떠메다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문 곁에 앉아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구걸을 하다가 마침 기도하러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은 보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귀한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입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이 사람이 이날 드디어 걷고 뛸 수 있게 되었으며 그렇게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장애자이기에 들어갈 수 없었던 성전 안으로 들어가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버려진 사람이라고 해도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날마다 떠메고 오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성전 문 곁에 앉아서 구걸을 할 수 있었겠고 그가 성전 문 곁에 앉아서 구걸하지 않았더라면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의 인생의 놀라운 변화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날마다 성전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날마다 성전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비록 성전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날마다 성전 문 곁을 지켰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 날마다 발걸음을 해야 합니까? 그럴 때 이렇게 우리는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놀랍도록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이 사람에게서 보아야 하는 것은 무언가 얻기를 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한 번도 삶을 포기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아 그는 구걸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성전 문 곁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구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우리들의 삶을 맡기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무리 피곤하고 지쳐도 우리들의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떤 점에서는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악이 바로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포기하는 또 하나의 모습이 바로 게으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앞으로 인생이 땀을 흘리지 않고는 거둘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힘들다고만 하지 말고 오히려 주어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해 보십시오.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그것도 아주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하게 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며 사랑하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듯 우리를 또한 지명하여 불러 주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복 주고 복주며 복의 근원되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조금도 의심치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에 목숨 걸고 충성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것과 더불어 복의 근원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 놀라운 삶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 앞에 펼쳐지도록 날마다 서로에게 도움의 손길을 아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성전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으로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하심으로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사람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들에게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앞서서 믿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손을 잡아 일으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들어가다가 자기들을 붙잡는 한 사람을 눈여겨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사람의 입장에서 바랄 수 있는 것은 오직 먹고 살기에 필요한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돈이 아닌 근본적으로 그가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그가 더 이상 구걸하며 사는 자가 아닌 자기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면서 살아갑니까?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을 그저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면서 살아갑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심을 먼저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눈길을 사방으로 돌리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들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렇고 저렇게 해서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 같아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를 않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주위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정이 그리운 사람에게는 정을 주어야 합니다. 나약한 사람은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에게는 위로함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자신감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죄 가운데 헤매는 사람에게는 용서와 사랑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자립할 수 있도록 물질로 도우며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나 혼자서 그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더불어 그를 눈여겨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함께 주위를 살피고 함께 돕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함께 돕되 보다 근본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내게 있지도 않은 것을 가져다 도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도와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했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그리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에게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야 합니다. 내게는 있으나 상대방에게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아닙니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도록 하여야 합니까? 그것이 그 사람이 진정으로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말하고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켰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전해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그 손을 잡아 일으켜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도록 말할 수 있는 믿음과 더불어서 잡아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물론 말하고 손을 내미는 것은 나지만 근본적으로 그 사람이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지금 태신자 전도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품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번도 믿음 안에서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우리가 눈여겨보고 지금 믿음으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품었습니다. 이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들의 손을 예수의 이름으로 잡아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다른 것은 없을지라도 생명을 건져 구원하기를 그렇게도 원하시는 주님이 함께 계시지를 않습니까? 그 예수의 이름으로 생명들이 태어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주고 그들을 잡아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돌보아 주어야 하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나와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그들을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그들을 찾아 만나야 하고 그들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이고 그 관심을 사랑으로 나타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뱃속에 든 아이를 위해서 태교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우리들의 모임에 초청을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구역 팀 모임에 그들을 초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식사 자리에 그들을 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함께 하도록 도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작은 선물을 준비하여 전해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손을 잡아 일으켜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힘을 얻어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마음에 품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함께 성전에 나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날이 속히 이르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새롭게 살게 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걷고 뛰고 찬양하며 성전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처럼 앞에서 이끌어줄 때 연약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벌떡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 일어서는 것 뿐 아니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나는 안 돼 나는 못해 하고 그냥 주저앉아 있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함께 손을 잡고 일어서게 되면 그 순간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힘차게 살아가게 되더란 말입니다. 조금 나아가다가 힘이 든다고 도로 돌아가 주저앉지 마십시오. 힘이 들기에 더 뛰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붙잡아주는 믿음과 더불어 함께 일어서는 믿음이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의 역사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고 즐겨 성도들과 함께 주의 전을 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들 가운데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 안에서 나도 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들이 우리들 가운데 넘쳐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세 시의 기도 시간이 되어서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는 귀한 역사를 나타내게 됩니다. 여기 이 사람이 어찌 예수님을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예수님이 여러 번 성전에 올라가셨는데 이 사람은 아름다운 문 곁에 항상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예수님을 향해 손을 내밀지 못했을까요? 하지만 지금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다시 승천하시고 난 다음이었지만 뒤늦게나마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말입니다.

오늘까지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 예수님을 알기는 했으나 믿을 수 없었던 사람들을 지금 우리들이 믿음으로 마음에 품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해 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들을 품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였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이제 새 생명으로 출산하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주의 전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역사의 주인공이 됩니까? 누가 생명을 건져 구원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날마다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사람이 새 생명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기도하는 나를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쉬지 마십시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예수님을 전하십시오. 그래서 생명 구원의 역사가 속히 여러분들 앞에 펼쳐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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