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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개선의 날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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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33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의도 광장에 자그마치 100만 명이 넘는 엄청난 무리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광장에서 집회를 가졌습니다. 정말로 열심이었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없었습니다. 뜨겁게 찬양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합니다.

1972년 여의도 대 광장에서 열렸던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때의 감격을 우리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한국의 미스바 대성회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집회였습니다. 그때 모여든 무리들은 나라의 장래가 어둡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남북 간의 평화가 정착되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가 복음으로 하나되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사실 그때 나라는 너무도 어수선했습니다. 유신정권으로 불려지는 당시의 상황은 어두움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그렇습니다. 정말 이상한 광경입니다. 명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새끼 나귀에 올라탑니다. 그런데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펴고,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깝니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르는 무리가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갑작스런 함성에 놀라서 군인들이 뛰쳐나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몰려나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자세히 보았더니 한 사람이 무리들에 에워싸여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환영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어처구니없었습니다. 아니 이건 웃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환영하고 있는 사람은 작은 새끼 나귀에 올라탄 초라한 모습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초라한 모습의 사람, 새끼 나귀에 올라타고 계신 그분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새끼 나귀를 타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비록 초라해 보일지는 몰라도 그를 환영하는 무리들의 모습은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오늘 종려 주일은 이날의 감격을 다시금 되새기는 날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환영하며 감격하던 모습이 결코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 날 그렇게 뜨겁게 환영하던 소리가 며칠 후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분노의 소리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교훈은 무엇입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이유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왜 그들은 그렇게도 예수를 환영하였고 또 며칠 후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댔던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 사람들이 변해도 그렇게 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이건 우리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기대를 하고 있다가 그 기대가 무너지게 되면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실망은 분노로 변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든 아니면 오해로부터 생겨난 것이든 그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내가 실망했다는 것이 제일 큰 원인입니다. 그것은 나의 기대치가 그만큼 컸던 것도 있고 기대치에 비해서는 결과가 너무도 못 미치거나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생겨납니다. 또는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게 될 때 참으로 마음이 안타깝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기뻐하고 즐거워하던 마음이 고통 속에 분노로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나 또한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기며 따른다고 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고 작정을 하고도 다시금 주님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만든 적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오죽하면 주께서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이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에게 돌을 던지도록 하라고 했을 때 그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질 수 있었던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지 않습니까? 우리 가운데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니 나는 내가 바라고 내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그 모습대로 그 바람대로 살고 있는가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그렇게도 환호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의 왕으로 오신 분이라고 잘못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잘못된 생각이 예수님이 타고 계신 짐승이 새끼 나귀라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오직 이제 드디어 적군을 몰아내고 우리의 왕이 다스리는 때가 왔구나 하는 생각으로만 가득차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타지 않았던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물론 무리들의 환영은 뜨거웠지만 그러나 그런 무리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무거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떻게 변할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의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라의 어두운 현실을 보면서 나라가 평안하기를 무리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 예수님이 큰 역할을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기대가 너무도 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그들을 외적에게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죽음을 이미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그러니 교회에 나오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나오면 만사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아픈 사람 병 낫는다고 말합니다. 그 말들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본질을 벗어난 것입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합니다. 우리는 성적이 좋아야 한다고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공부하라, 공부하라 귀가 따갑도록 다그칩니다. 하지만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결국 공부라고 하는 것도 행복한 인생을 위한 준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참된 인생이 되도록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외적인 것만 가지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는 승리자가 되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실패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지만 마음은 지극히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몸은 건강한데 마음은 병들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큰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단지 친구가 좋아서입니까? 아니면 누구 말처럼 복 받기 위해서입니까? 병 고침 받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그저 아내를 위해서 교회에 나와주고 있습니까? 그도 아니면 어떤 마음의 위로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교회에라도 나오지 않으면 결코 살 수 없을 것 같은 허전함 때문입니까?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우리가 교회에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처럼 그저 내 기대와 바램을 가지고 예수를 만나서는 안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을 만난 그 자체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아니고서는 결코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남들처럼 가진 것이 없어도, 몸이 건강하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출발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이라면 왜 계속해서 교회에 나올 필요가 있습니까? 왜 때로는 마음이 상하면서까지 교회에 나와야 합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할 두 번째 교훈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올리브 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환영하여 맞으면서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 만났던 병자들 치고 고침 받지 못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어느 날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여자와 아이를 빼고도 오천 명이나 되는 남자들을 흡족하게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불과 며칠 전에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런 소문을 듣기도 하고 직접 지켜보기도 했었던 무리들이었습니다. 이제는 나라를 해방할 차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어지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님은 먼저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십니다. 하지만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런 때에 그런 일을 하셨을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 성전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만들어 손에 들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들을 다 내쫓아 버리셨습니다. 그만 사람들의 마음은 이런 예수님을 보면서 점차 실망으로 바뀌어갑니다.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로마 군사들과 마주쳐서 저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이려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를 않고 오히려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이신 예수님이 아닙니까? 그만 실망에 빠진 무리들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선동하는 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고 맙니다.

오늘 우리들을 낙심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고 슬퍼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환경이, 우리들의 주위 여건이 우리를 슬프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여건이 나를 힘들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도 교회에 나오면 좀 위로도 되고 문제도 해결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더 깊은 구덩이로 빠져들고만 있는 것 같아서 그만 낙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역시 왜 예수님께서 하필이면 새끼 나귀를 타고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초라하게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까? 죽기까지 낮아지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겸손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한 세상의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온 세계의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왕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양간에서 태어나셨고 갈릴리 나사렛 산골짜기에서 30년 간 지내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처음부터 낮은 자리로 오셨던 주님입니다. 주님은 이제 마지막 낮은 자리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최후의 승리를 위한 길이요 참된 구원의 길이요 영광의 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을 때 드디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졌던 것이요 그로 인해 부활의 승리의 찬가가 높이 울려 퍼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끼 나귀를 타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함께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낮아져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낮아짐이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가서 보면,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있을 것이다. 풀어서,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거든 ‘주님께서 쓰려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리하면 곧 내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그렇기에 낮아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겸손은 그러므로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의 종을 통해서 전해질 때마다 ‘예’ 하고 ‘아멘’하며 그대로 받아들여 순종하는 것이 참된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내 생각이 들어서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이는 나귀의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가서 새끼 나귀를 푸는데 그 주인들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그 새끼 나귀는 왜 푸는 거요?”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때 나귀의 주인은 두말없이 나귀와 그 새끼를 내어줍니다. 그 당시 나귀는 재산목록 1호입니다. 더군다나 베다니나 벳바게 마을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습니다. 그 맞은 편 마을 역시 똑같습니다. 그런데 자기 집의 가장 소중한 재산인 나귀와 그 새끼를 아무런 조건 없이 단지 주님께서 그것을 쓰시겠다고 하니,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신다고 하니 두말없이 내어주었습니다. 이 나귀 주인의 순종하는 믿음이 바로 주님의 낮아지심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이 낮아지심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비록 초라해 보일지라도 진정한 승리자의 당당한 걸음이었던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으면서 구하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는다면 더 이상 우리가 실망할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염려할 것이 무엇이 있겠고 분노할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기대에 미치게 될 줄로 믿고 구하면 되는 것이요, 누가 누구에게 실망했다면, 그 실망된 모습이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바뀌어지도록, 축복하며 중보하며 기도하면 될 것이요, 무엇인가 모자란다면, 채워주실 줄로 믿고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순종할 때 그것이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낮아짐의 모습인 것이요 바로 거기서부터 참된 승리의 걸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은혜로 오늘을 지내며 모든 일에 먼저 감사하십시오. 누구에게든지 축복하고 용서하며 사랑의 손길을 펼치십시오. 조금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조금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직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철저히 자신을 낮추심으로 말미암아 겉으로 보여지는 것만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위기는 기회요 반면에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교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아들이면서 이제야말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예수님을 보면서 결국 그들은 실망하게 되었고 그 실망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것으로 나타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대에 어긋나서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는 바로 그때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나아갈 수 있는 때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승리자가 될 수 있고 또 승리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승리가 실패 속에 있는 승리임을 아는 것이 우리를 힘있게, 바로 서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까 좌절 속에 있는 승리이지, 모든 것을 쉽게 극복하고 실패가 무엇인지 모른 채로 앞으로 앞으로만 가는 승리라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승리는 성도에게 없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환상일 뿐입니다. 성도의 현실은 훨씬 많은 실패와 좌절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거기에서 승리를 배웁니다. 그것이 바로 낮아짐을 통한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통이 곧 저주는 아닙니다.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탄식하고만 있지 마십시오. 어떤 열등감이라든가 불행한 조건, 또는 자기 자신에게나 남으로 인해서 실망하거나 그 모든 것으로 인해서 얽매여 사는 패배자의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넉넉한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우리가 믿고 있기 때문이요 지금 영원한 생명과 모든 복과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으로 환호하고 내가 이룬 것으로 기뻐하기에 앞서서, 그리고 내게 부족한 것으로 인해 탄식하고 상처 때문에 아파하기에 앞서서, 나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걸으신 주님을 기억하며 새끼 나귀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낮아짐을 통한 주님의 승리, 십자가의 승리의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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