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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드리는 자와 팔아먹는 자 (마 2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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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잎 클로버는 행운을,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주변의 흔한 세 잎 클로버에는 별 관심이 없고, 드문 네 잎 클로버에만 관심을 둡니다. 내 주변의 작은 행복들에는 관심이 없고, 일생 한두 번 올까 말까한 행운에 마음을 뺏기고 있습니다.
조금만 눈을 돌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십시오.
행복은 이미 내 옆에 와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때를 기념하여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는 날이 바로 종려 주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된다고 해서 고난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때의 장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온 수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중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예수님이 성전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환호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할지어다” 저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대며 외쳐 부르는 그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장엄한 모습의 배후에는 이러한 일이 있도록 도운 말없는 손길, 이름없는 손길이 있었음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면에 이러한 환호 뒤에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슬픔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숨겨져 있는 손길들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498년 이태리 미란에서 그린 “최후의 만찬”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의 중심은 물론 예수이지만 다빈치는 예수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말하셨을 때의 그 순간 모든 제자들의 반응을 자기가 믿는 대로 묘사한 것이 이 그림의 특징이라고 할 것입니다.
모든 제자들은 다 제각기 이 감정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내니이까?” 하는 표정입니다. 이 그림이 유명한 것은 이런 다른 표정이 합하여 하나를 이루고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가롯 유다는 예수를 쳐다보면서 동시에 돈주머니를 꼭 쥐고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보다도 물질이 더욱 중요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심정은 과연 어떠합니까?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될 손길은 나귀 새끼의 주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 가까이 와서 올리브 산 근처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가서 보면,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러면 곧 내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래 제자들이 건너 편 마을로 가 보니 과연 나귀 한 마리가 새끼와 함께 매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귀를 풀어 가져오려 하니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왜 남의 나귀를 풀어 가져가려고 합니까?” 그때 제자들은 주님께 들은 그대로 “주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고 하니 그 사람은 고개를 끄떡이면서 풀어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 제자들은 나귀를 새끼와 함께 끌고 와서 그 새끼 위에 자기들의 옷을 얹고 그 위에 예수를 태웠습니다. 그리고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이를 본 무리들이 저마다 감람나무 가지를 꺾어 손에 들고 흔들며 환호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여기 호산나란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시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며 무리들이 외칩니다.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 그러자 무리들이 말하기를 “이 분은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시라”고 했습니다. 호산나 외치며 예수를 영접하는 무리들 그러나 막상 영접을 받고 환호를 받고 있는 예수는 당당하게 말을 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나귀를 탄 것도 아닌 자그마한 나귀 새끼를 타고 있습니다. 이는 곧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던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이 사건 속에는 숨겨진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나귀와 그 새끼 즉 예수님께서 타고 가신 나귀의 주인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전혀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알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가서 주께서 그것을 쓰시겠다고 하니 두말없이 내 주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나귀는 아주 중요한 재산 목록의 하나였습니다. 물건을 운반하거나 여행을 할 때 타고 보통 사람들은 나귀를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큰 재산을 주께서 그것을 쓰신다고 하니 두말없이 내어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렇다면 이 사람이 단지 예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인가 하면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주가 누구인지를 알고 믿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주께 드리는 것만큼 복된 일이 없다는 것을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저하지 않고 주를 위해 자기의 큰 재산인 나귀를 내어놓았던 것입니다. 어디에 쓰실 것인지, 어떻게 쓰실 것인지, 왜 하필이면 자기의 나귀 새끼여야 하는지 그는 전혀 묻지를 않았습니다. 오직 주께서 쓰신다는 그것만으로 그는 기뻐했습니다. 주님이 쓰실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그는 즐거웠습니다.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감사했습니다. 자기의 나귀를 주님이 쓰시고자 한다는 그 사실로 그는 감격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비록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어도 주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결코 빼어 놓을 수 없는 귀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요 하늘나라에 영원히 기억될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나의 가진 것으로 그것도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주를 위해 값지게 사용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텔레비젼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커스를 보게 되면 그 중에 한두 번쯤은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물들이 불이 붙어있는 둥근 고리 속을 뛰어넘는 모습입니다.
대개의 동물은 원래 불을 싫어합니다. 털이 긴 동물일수록 거의 본능적으로 불을 두려워하고 꺼려합니다. 그렇다면 이 동물이 그 본능을 거슬러 가면서 불이 붙을 고리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그 힘은 뛰어든 후에 이루어지는 보상이나 혹은 뛰어들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내모는 가혹한 훈련이 아니라 바로 동물과 조련사 사이에 있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동물에게는 여태껏 조련사가 훈련시키는 대로 해서 목숨이 위험했거나 손해를 당한 적이 없었다는 믿음, 나에게 위험한 일은 시키지 않는다는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본능을 거슬러 가면서까지 불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두 번째 숨겨져 있는 손길은 예수를 팔아먹은 제자 가룟 유다입니다.
유월절을 예비하기 위해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음식을 잡수시면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넘겨 줄 것이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슬퍼하며 “주님, 나는 아니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라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묻기를 “내가 예수를 넘겨주면,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라고 하여 은 삼십 개를 받기로 약속한 것을 예수께서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와 함께 이 대접에 손을 담근 사람이, 나를 넘겨 줄 것이다. 인자는 자기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주는 그 사람은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며 탄식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를 배반한 유다가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나입니까?” 라고 하니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이에 앞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주께서 씻겨 주시는 대로 주 앞에 발을 내밀고 있었던 저였습니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주님이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넘겨 줄 것이다” 하셨고 “선생님 나입니까?” 할 때 그렇다고 하셨다면 유다는 그 자리에 엎어져 울며 회개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유다에게는 이미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니 이미 그 양심이 어두워져서 조금도 저는 주저하지 않고 예수를 넘겨주기 위해서 다시 대제사장에게로 떠나가는 것입니다. 왜 유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삼년 동안이나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 함께 먹고 함께 마시며 함께 지냈던 제자 중 하나였는데 그것도 예수님께서 저를 믿고 돈궤까지 맡겨 주셨는데 왜 그가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그는 이미 돈의 노예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소위 돈맛을 알았습니다. 돈에 매여 버렸습니다. 요한 복음에 그는 도적이라 돈궤에서 돈을 훔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을 하는 것으로 보아 유다는 돈에 눈이 멀어 버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혹시 유다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까? 누가 유다입니까? 바로 돈에 매여 사는 사람이 유다와 같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나 여러분이 바로 이 유다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저 “복 주시옵소서 복 주시옵소서” 하며 주께 받으려고만 했지 주 앞에 헌신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바로 유다가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경우는 좀 다르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매여 살고 있는 우리, 마땅히 주의 날을 거룩한 날이요 안식해야 할 날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국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세상 잔치에 바쁘고 세상일에 더 바쁜 우리가 바로 유다와 같은 도적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그러므로 마땅히 주 앞에 드려야 할 시간을, 주 앞에 드려 마땅한 재물을, 주 앞에 드려 마땅한 정성을, 주 앞에 드려 마땅한 마음을 다른데다 사용하고 있었던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삶을 온전히 돌이켜 회개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여인이 “레테”라는 호수를 건너려고 했습니다. 여인이 배에 오르자 뱃사공이 물었습니다.
“호수의 물을 마시고 건너지 않으시겠습니까?”
여인이 “왜 물 마시기를 권하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공이 대답하기를 “이물을 마시면 지난날의 괴로웠던 일들을 모두 잊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한 많은 여인은 반색을 하며 대답했습니다.
“그거 잘 됐군요. 물을 기꺼이 마시겠습니다.”
그때 사공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명심할 것은 과거의 기쁜 추억도 모두 잊혀진다는 사실입니다.”
여인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물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참으로 힘든 세상입니다. 고난이 많고 슬픔이 많은 세상입니다. 웃고 다닐 때도 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남이 모르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열심히 사는 이유는, 가끔 경험했던 기쁨이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다보면 기쁨을 얻을 날이 오리라는 기대감에서 오늘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그 기쁨을 만날 수 있을까요? 기쁨의 근원은 위에 있습니다. 그곳에 파이프를 연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열심히 파이프를 땅에 묻고 삽니다. 하나님의 생명 파이프에 내 생명을 연결하여 기쁨 충만한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될 손길은 만찬의 자리인 다락방의 주인입니다.
마태복음 26장 17절 이하에 보면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말씀드리기를 “우리가,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려고 하는데, 어디에다 하기를 바라십니까?”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성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때가 가까워 졌으니, 내가 그대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겠다 하십니다’ 하고 그에게 말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제자들이 유월절을 준비하였습니다. 여기 아무개로 표현된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단지 뒤에 드러나는 사실로 보아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뒤에 제자들과 120여 성도가 함께 모여 기도하던 중 성령의 충만을 경험했던 다락방의 주인이 아니겠는가 추측할 따름입니다. 어쨌든 이 다락방의 주인은 제사장들과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잡아죽이고자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를 위하여 저녁 식사 자리를 내드렸던 것입니다. 자칫하면 자기도 함께 역적으로 몰려 죽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주님께 기쁨으로 자기의 집을 유월절을 지키도록 마련하여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방금 보았던 가룟 유다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나병으로 고생하던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예수께 다가와서는, 예수께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는데, 그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분개하여 말하기를 “왜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고 하니 이를 아시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이 향유는 자그마치 이 백 데나리온의 값에 해당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네 돈으로 1000만 원에 달하는 아주 값진 것을, 그것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서 준비하였던 것을 이 여인 막달라 마리아는 서슴지 않고 주께 부어 드렸던 것입니다. 왜 그녀가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그것은 그 어떤 값진 것보다도 귀한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던 것이요 그 주님을 위해 가장 값진 것을 드려 아름답게 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 여인은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주의 발을 닦아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듯 자기의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주께 드렸던 이 여인, 그 사실을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나가서 대제사장들을 만나서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먹고 있는 유다의 모습이 마태복음 26장에는 잘 대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이 다락방의 주인은 자기의 목숨을 걸고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을 내 주어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네 생명 다하여 주를 섬기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거니와 정말로 이 다락방의 주인이야말로 자기의 생명을 다 바쳐 주를 섬길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 집에서 성령이 임하여 초대 교회가 탄생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의 산 증인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윌리엄 생스터가 어느 날 병원에 입원한 소녀를 심방하였습니다. 의사들이 그 소녀의 시력을 회복시키려고 수술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소녀는 생스터에게 “하나님께서 내 시력을 빼앗아 가시려고 해요”라고 괴로운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그는 “하나님이 빼앗아 가시게 하지 말고 그분께 드려라”고 사랑이 담긴 마음으로 권면하였습니다.

우리의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면 훌륭한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아무리 크고 위대한 것이라도 드리지 않으면 빼앗기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드리는 사람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드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빼앗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았던 사람들에서 우리는 어떤 공통 교훈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주를 위해 나의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귀의 주인이 어쩌면 집 이상으로 귀한 재산이었던 나귀를 주를 위해 선뜻 내어놓을 수 있었던 그 마음을 우리는 본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한 평생 모았던 향유를 조금도 아낌없이 주를 위해 다 쏟아 부었던 막달라 마리아의 아름다운 섬김을 우리는 또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더럽고 추한 여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나 뵐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듯 주를 섬기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또는 시간 시간 주님 앞에 나와서 주를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면서 주의 허락하시는 은혜와 복을 간구합니다. 하지만 주님께 자신의 가장 귀한 것으로 먼저 드릴 줄 아는 분들에게 이런 은혜와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나귀의 주인처럼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리고 다락방의 주인처럼 나의 가장 귀한 것으로 주님을 섬겨 보십시다. 정말 목숨을 걸고 주님을 섬기십시다. 그 뒤 다락방의 주인은 아예 자기의 다락방을 교회로 사용하도록 내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락방이 최초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역시 거기서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장사된 주께 부어 드리기 위하여 막달라 마리아는 좋은 향유를 준비합니다. 그리고는 예수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렇듯 부활의 주님을 위하여 향유를 예비하십시다. 정성껏 값진 것을 준비하여 우리 부활의 아침에 주님 앞에 드리십시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성도요 또한 주님 앞에 설 때에 큰 상급과 면류관을 받아 누릴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주님께로부터 가장 값지고 좋은 것으로 100배 60배 30배로 넘치도록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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