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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대속과 섬김의 복음 (고전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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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간에 예수의 자손들이 프랑스 어디엔가 살고 있다는 내용의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 상영으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는 가운데
얼마 전에는 유다- 예수 지시로 배신이라는 제하에
유다 복음에 관한 기사가 일간지에 실렸습니다.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일부 공개한 유다복음의 내용 중
<죽음과 부활을 이해한 유일한 제자 유다> 라는 제하의 글을 인용합니다.
유다복음은 예수와 그를 배신한 제자 가롯 유다의 관계를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1700여 년 전 나온 유다복음은
예수님이 유다에게 자신을 배신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입니다.이에 따라 유다복음은 유다를 12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가 육신을 벗어야 부활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한
'수제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유다는 사막에서 평생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을 후회하며
그를 팔고 로마군에게 받은 은화를 돌려준 뒤
목을 매 자살했다고 쓴 마태복음과 완전 배치됩니다.성경 해석을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유다복음이 초기 기독교의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합니다.하버드대 신학 교수였던 <캐런 L 킹> 박사는
4월 6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 만일 예수의 죽음이 모두 신의 계획에 따른 것이라면
유다의 배신도 그 계획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라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 고 말하면서
예수 십자가의 사건에 흠집들을 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예수 십자가의 사건은 세계의 관심사가 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유다복음은 초대교회 이단 영지주의자들이 쓴 글로써
개혁교회는 본래 정경에서 배격했던 외경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를 쓰게된 배경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고 있던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은 영혼 불멸을 신봉하지만 육신의 부활은 부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또 철학이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따지는 것 좋아 하잖아요.
그래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도 남다른 은혜를 받았지마는 분쟁이 많았습니다.
게바 파니 아볼로 파니 바울 파니 해서 당파분쟁이 있었고 <2>
성도끼리 소송 사건도 있었고
혼인문제, 우상재물문제 그리고 성적 윤리적 문제가 있었으며
심지어 부인들 머리에 수건을 쓰느냐 마느냐 하는
의식 문제를 놓고 편이 갈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 받았다고 하는 교인들도
내가 받은 은사가 최고라며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혔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냐? 하며 진단하고 처방한 것이
바로 고전15장 즉 부활장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부활의 신앙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을 갖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게 되면
결코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고귀한 인격과 도덕적 교훈을 본받아
우리의 삶을 개선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구원사역은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영원한 승리를 보장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담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1절에 [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
즉 복음을 바로 알게 하기 위하여 너희에게 이 말을 전한다고 합니다.
그럼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1. 복음이란 무엇입니까?(1-3절)
복음이란 <유앙겔리온> 즉 기쁜 소식입니다.
옛날에는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에 나간 가족들이 승리해서 살아서 돌아오는지
패배해서 죽었는지, 종으로 붙들러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루에서 파수군이 전령의 소식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럴 때 전장에서 전령이 말을 타고 승리의 깃발을 날리며 달려오면서
< 유앙겔리온~!>이라고 소리칩니다.
그때 성안 사람들은 와~! 하고 우리가 승리했다고 만세를 부르며 환호합니다.
이 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기독교적으로 소화합니다.
복음이란? 구원의 소식 승리의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란 바로 예수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3>
오늘 바울은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너희로 알게 하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복음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2절에 [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
나의 전한 그 말은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헛되이 믿는 다는 말 <에이케>란 말은 자기 마음대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자기 마음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7:21절 말씀처럼 입술로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가 살아 계신 주, 나의 소망이 아니라
시뮬레이션 예수, 나의 삶의 옵션으로 믿는 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인의 특징은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 합니다.
복음을 다빈치 코드나 유다복음 같이 자기 마음대로 믿지 아니하고
성경대로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 말 속에는 복음은 진실이요 진리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진실이 언제 드러나는가 하면 죽을 때가 되면 진실이 드러납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텔레비젼 대담에서 이 사실을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땅을 떠난 후 예수님과 함께 거할 것을 믿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죽음을 대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자신의 확신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성경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여부에 대해 확실치 않던 방송 대담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솔직히 시인하면서
[ 목사님은 제가 모르는 다른 것을 아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으시군요 ]
라고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예나 지금이나 복음의 안티 세력들이
복음을 흔들어 놓으려고 합니까?
그것은 사단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바로 복음 안에 있습니다.
1절에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
그 가운데 선 것이라는 말을 의역하면
[ 너희도 복음 안에 너희의 정체성을 두고 있느니라 ] 이다.&nbsp;그러니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모르고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바울이 이어 말해주는 복음은 간략하고 분명합니다. <4>
2. 예수 부활의 사건의 근거가 무엇입니까?(3-4절)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3-4절에
[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 ] 여기에 성경대로 하는 말은 복음이 누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고 어느 날 툭 튀어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구약 성경에 계속 예언되어 오던 계획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 땅에 오시기 3000년 전부터 계속 예언되어온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 예언 하셨던 사건이기 때문에
참 이구나 진리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구약 예언을 보면
창3:15에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고 말씀부터
민21:9에는 광야 이스라엘 민족이 불평하다가 불뱀에게 물려 죽게되었을 때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세워
누구든지 쳐다보는 자는 다 낫게 하셨는데
요3:14절에서 예수님이 직접 장대에 달린 놋뱀은 나를 가르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역사적으로 예수님보다 1,000년 전에 살았던 다윗은
예수님께 대하여 '주'라고 고백하면서 시16:9-10절에
[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라 ] 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역사적으로 예수님보다 770년전에 살았지마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면서 사26:9절에
[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 날것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도 깨어 노래할 것이니
땅이 죽은 자를 토해 내어놓을 것이라 ] 고 예언을 합니다.
이렇게 예수 부활의 사건은
우연한 사건도 아니요 누가 꾸며낸 픽션 드라마도 아니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기절설, 도둑설의 가정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 부활의 사건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사건입니다.여기에 사흘을 강조하는 것은 팔레스틴 지방의 기후로는
시체는 사흘만 있으면 썩기 때문에 죽은후에 살아나심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사건, <5>
이것이 왜 우리에게 복된 소식일까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3. 사도 바울이 예수 부활을 증거하면서 다른 제자들이 본 사건을 왜 언급을 합니까?(5-7절)
그래서 바울은 5-7절에서 부활의 산 증인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5-7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 부활의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게바에게 보였다는 말씀은
게바 즉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예수 부활의 가장 수장이기 때문입니다.
열 두 제자에게 보였다는 것은
살아생전 예수를 따라다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바로 산증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였다는 것은
그들 중에 지금도 태반이나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에게 보였다는 것은 야고보는 주의 형제 야고보로서
성경학자들은 야고보가 예수의 부활 후에 개종했기 때문에
지금말로 하면 가장 확실한 간증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라고 변증하며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 부활은 이렇게
역사적인 실제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의 사건은
단군이 곰에게서 나오고, 박혁거세가 박에서 나오고
김알지가 알에서 나오는 신화가 아니라
확실한 증거가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부활의 사건이 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B.C 와 A.D의 세계사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을 뿐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에 중심인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 부활의 사건은 역사적 실제 사건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토인비는
「역사적 확실한 사건 가운데 증거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이다」합니다.
즉 역사를 연구하다 보니 예수의 부활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 스토리는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 다큐멘터리입니다.
허구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기록과 오늘 본문말씀 중에 보면 <6>
한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왜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나? 는 것입니다.
그 부활하신 장엄한 모습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밖은 총독 빌라도나 대제사장들이나 로마군병 아니면
자기를 희롱하던 군중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아니하시고
비굴하게 도망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나?
그건 예수의 부활은
원수를 향해 복수하기 위함도 아니요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전시효과도 아니요
제자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가 바로 주시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며
저들의 삶에 엄청난 축복을 안겨다 부며
그리고 나의 증인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마태복음도 중요하고 마가, 누가, 요한 복음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부활의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8-9절)
그래서 바울은 8절에
[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
바울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는 말은
예수 부활을 목격할 만한 대단한 인물도 못되지만
자신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항상 나의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것도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보고 오백여 형제들이 보고 남의 간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나의 복음이 되어
내가 체험한 예수 부활의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바울은 예수님의 살아생전 모습이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행9:에 다메섹 도상에서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공문을 가지고 가다가
성령의 밝은 빛 아래 거꾸러지고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체험신앙입니다. 이론이나 논리가 아닙니다.
물론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예수 부활에 대해 변증하고 있지만
가장 힘있는 변증은 나도 보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7>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은 누구나 깊은 절망과 슬픔에서 벗어나 확고한 신념과 기쁨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안식후 첫날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던 여인들이 그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두려워서 도망하였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며 교회의 활력소가 됩니다.

세상에서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을 약속하셨고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의 약속의 신실하심에 대한 보증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우리를 가장 무기력하게 하는 것이 죽음의 권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예수님 한 분만의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 됩니다.
고전15:20절에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담대하게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저는 예수 부활이 잠자는 자의 첫열매라는 말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서울 동대문구장에서 청룡기 고교야구가 열렸습니다.
9회말 폐색이 짙어가던 부산팀 마지막 선수가 역전 2루타 홈런을 날렸습니다.
그때 관중석에 앉아있던 부산서 올라온 학부형 엄마 한 분이 까무러쳐 버렸습니다.
옆에 구경하던 관중이 [ 아줌마 ! 왜 이러십니까? ] 하고 흔드니
[ 우리 아들 대학가게 되었다 ] 하고 환호를 하더랍니다.
주위 사람들은 홈런 친 선수가 아들이라서 좋아서 그러는 구나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다른 선수가 홈런을 쳤지만
그러니 당시 전국대회에서 3위권 안에 들면 선수들이 대학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편이 이겨 우리 아들 대학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 - 바로 예수 홈런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 편에 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 부활의 사건은 생애의 홈런 사건으로
천국 갈문이 열려졌고, 죽음에서 살아날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W이론의 저자 이 면우 교수의 <신사고 이론>이란 책에서 <8> 어느 사회나 단체에서 제일 문제인 사람은 <관속에 누어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관 속에 누어 있는 사람이란
똑 같은 일만 반복하고 도무지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덧붙여서 아무도 관 속에 누워 있는 사람 곁에는 가기를 꺼려한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도무지 변화가 없는 교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 잠자고 있는 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는 예수 부활 하셨네 하면서
그 삶에 부활의 신앙을 갖지 못한 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지금 변화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아무일 없는데 관 속에 누워있기를 바랍니까?
예수의 부활은 사망 권세를 깨뜨린 사건입니다.
나아가 관 속에 누워 있는 나를 벌떡 일어킨 사건입니다.
내 생애에 역전드라마의 홈런이 터진 사건입니다.
바울은 이 부활의 사건은 누가 꾸며낸 이야기, 즉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요 다큐멘터리요 뿐만이 아니라
신앙의 체험적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예수 부활을 믿고 부활의 생명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부활이 없다면, 이 부활의 생명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헛것이고,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가장 불쌍한 자이며 그리고 우리는 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요 다큐멘터리요 신앙적 체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수고도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 부활의 사건이 나의 현재의 삶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5. 예수 부활의 사건이 나의 현재의 삶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10-11절)
바울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고,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요
교회를 핍박하여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이지만
10절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 나로 나 되게 만들었고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 라고 합니다.
예수 부활의 현실적 의미는
바로 남들보다 더 수고로운 삶, 주님께 더 충성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대속과 섬김의 복음이라고 정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 십자가의 사건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대속의 사건이면서도 타인을 위한 섬김의 사건입니다.
막10:45절에 <9>
[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예수님이 언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내다보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누가 크냐?고 다툼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경책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생명, 부활의 생명, 역동적인 생명
그래서 나의 삶에도 부활의 생명을 힘입어
펑 하고 역동적인 삶이 전개될 줄 믿습니다.
물론 틀린 기도는 아닙니다만
그러나 예수 부활의 사건 즉 복음은
우리에게 역동적인 생명을 안겨다 주되
그 역동적인 생명이 바로 다이내믹하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이 섬김, 사랑의 손길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받았다면
구원의 복음뿐 만이 아니라
섬김과 희생의 복음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 한국선교는 부활절과 무관하지 않지요.
1885년 부활절 아침에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 두 분이 제물포에 첫 발을 딛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뿐만이 아니라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가보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선교사님들의 묘가 많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약 450명의 유해가 있는데
대부분 이 땅에 복음을 전하다 죽은 선교사님들의 묘지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아니했지만
저는 이 중에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한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과
그의 부인 셔우드 로제타 (1865-1951) 선교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오늘 설교에서 이 분들의 삶을 소개하는 것은
이들이 미국이나 카나다에서 부유하고 여유있는 삶을 마다하고
당시 미개하고 풍토병이 심하였으며 기독교의 박해가 심하였던 조선,
당시 미국에서 조선으로 오려면 한 달 이상 배를 타고 와야 했고
생명을 잃을는지도 모르는 당시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헌신했던
그들의 삶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당시 미개했고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10>
복음을 전하였을까요?
셔우드 로제타 (Sherwood Rosetta)은
뉴욕의 리버티에서 태어나 이곳에 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의 교사로 일하다가
교회에서 <케네스 챈들스>란 부인이 인도를 여행하고 난 뒤에
인도여성에게 복음전도자와 의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가슴이 불타올라 의사가 되어 의료선교사가 되리라 결심합니다.
그래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의과대학에 입학하며 공부하였고
공부하는 동안 뉴욕에 있는 중국 여성들의 무지를 배웠고,
당시 세계에서 훨씬 더 무지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민족, 조선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1889년 3월에 그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 선교의 꿈을 갖고
뉴욕의 한 병원에서 소아과 인턴으로서 임상실습을 하던 중에
그의 남편이 될 윌리엄 제임스 홀 박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 홀 역시 교사로 제직 중
그는 [ 다시 주어진 인생을 값지게 살겠다 ] 고 결심을 하고
2년 후에 온타리오주 킹스턴에 있는 퀸즈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가
국제의료선교회 조지 도우넛 박사를 만나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1889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메디슨 가의 선교진료소에서 진료를 하다가
이곳에서 소아과 인턴과정을 하던 로제타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처녀 총각으로 한국에 들어와
한국에서 1892년 6월 27일에 한국에서 최초의 서양식 결혼을 하였습니다.
윌리엄 홀은 평양에서 치료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1894년 8월1일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청일 양군의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이때에 신변을 걱정하여 감리교 선교부 서울본부에서 귀환하라고 하였지만 닥터 홀은 의사로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다며
평양에 계속 머물며 혼신의 힘을 다하던 중에
결국 과로와 발진티푸스 감염으로 1894년 11월 24일
로제타와 결혼 2년 5개월 만에 34세로 순직하여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당시의 일을 로제타 홀이 이렇게 회상합니다.
[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말하려 한 것은
그가 평양으로 간 것을 후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일을 하였고
하나님이 나에게 갚으실 것 ] 이라는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때에 로제타 홀에게는 셔우드 홀이라는 두 살 된 아들과
그의 뱃속에는 7개월 된 아이가 또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복음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습니다.
로제타는 어린 아들 셔우드를 대리고 임신 말기에 있었기 때문에 <11>
아이를 낳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귀여운 딸 에디스가 태어난 후
자기의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 자라고 섬겼던
카나다의 글렌 뷰엘의 작은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셔우드 홀과 딸 에디스를 본
모든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습니다.
그 교회에서 당시에 미개하여 복음을 듣지 못했던 한 작은 나라 조선에
윌리엄 제임스 홀이라는 선교사님을 보내고 기도하며 헌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큰 감동을 받은 로제타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조선에 돌아오자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딸 에디스가
또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양화진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로제타는 그 딸을 남편 옆에 묻으면서 다시 한번 결심을 합니다.
[ 하나님!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 홀과
한국에서 평생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

닥터 로제타는 홀로 평양의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여자환자를 위한 광혜여원을 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개원하여 맹인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면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점동(또는 박에스더)이라는 한국 여자분을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로 교육을 시켰습니다.
지금 서울 동대문 옆 이화여대부속병원이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며
서울에 조선여자 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 학교가 지금의 고려 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 되었습니다.
또한 인천에 간호대학과 인천의 기독병원이 모두 로제타가 세운 병원입니다.
43년간의 한국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큰일을 이루었습니다.
미국은 그의 사역을 인정하였고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이 뽑은 여인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양화진 땅에
남편과 딸이 묻혀있는 곳에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녀와 그녀의 남편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셔우드 홀도 이 땅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가 16세가 되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사인 부인 마리안과 결혼하여 다시 한국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셔우드 홀은 한국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하였고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판매하며 결핵환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이 셔우드 홀이 선교지에서 은퇴하여
캐나다에서 쉬고 있던 어느 날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결핵협회와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에서 보내 온 초청장이었습니다.
9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한국 땅을 밟은 셔우드 홀 부부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입니다.
그 때가 1984년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는데,
그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묘를 방문하고
광성고등학교 예배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나를 절대로 미국이나 캐나다 땅에 묻지 마시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 땅에 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
그는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부인 마리안과 함께 아버지인 윌리암 제임스 홀과 어머니인 로제타,
동생 에디스와 함께 양화진 땅에 묻혔습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왜 윌리엄 제임스 홀과 그의 부인 로제타 홀,
그의 아들 셔우드 홀, 그의 부인 마리안 홀,
그의 딸 에디스의 이야기를 소개하였을까요?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당시에 미개하고 풍토병이 많고
청일전쟁을 위시하여 갖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던 한국을 찾아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육신의 안락과 편안함을 포기하고 조선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한 것은
바로 복음은 나를 구원한 대속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타인을 위함 섬김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문>

부활 주일 아침을 맞아 주님의 축복, 감격, 기쁨, 희망, 부활의 빛이 임하게 하옵소서.모든 슬픔, 좌절, 고통, 절망이 떠나고 부활의 환희를 노래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 은혜를 우리에게만 가두어 두게 하지 마시고
소외된 이웃과 나누는 선나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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