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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겔 3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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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냐 사느냐는 어디 달렸는가?

부활절을 맞아 제가 솔직히 고백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동안 저희 집에 화초를 가져오신 분들, 난 화분을 정성스럽게 선물하신 분들이 많은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중 대부분이 죽었습니다. 뭐 대단한 고백일 줄 알았는데 실망이십니까? 그래도 주신 분들에게 너무 죄송해서 제 딴에는 큰 용기를 내서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니 가급적 앞으로는 화분이나 난을 선물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왜 그 생생하던 화분이나 난이 저희 집에 와서 얼마만 지나면 다 말라 죽곤 할까요? 나름대로 물도 주고 보살피는데 왜 죽는지 참 이상한 일입이다. 그런데 이번 성지순례 때 보름 동안 저희 부모님이 집에 와 계셨는데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그 보름 동안 완전히 말라죽은 줄로만 알았던 화초와 화분을 아버님이 다 살려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가시고 나서 며칠 만에 또 말랐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제 아버님은 화분에 정성을 기울이신 것입니다.

화초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죽기도 하고 다시 살기도 합니다. 정성을 쏟고 애정을 기울이면 사는 것이요, 물주고 비료 준다 해도 애정과 정성이 없으면 죽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화초가 죽고 사는 것은 순전히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물주고 비료 줘서 화초 나무가 자라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부분, 즉 사랑과 정성을 주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화초 한 그루도 그러한데 하물며 영적인 존재인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에스겔 선지자의 시대

오늘 우리는 에스겔 37장을 읽었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참담하고 힘든 시대에 선지자 사명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주전 587년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후 유다 왕 여호야긴과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데 바로 이 때 에스겔도 함께 바벨론 땅으로 끌려갔다가 에스겔 1:1~2에 나온 것처럼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이상을 보고 선지자로 소명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에스겔 자신이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의 고통과 설움을  함께 당했기에 그 누구보다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육체적으로 그렇게 큰 고생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포로생활 그 자체가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벨론은 자기네 땅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름대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도록 적지 않은 자유를 주었고, 심지어 자유롭게 종교적인 모임도 하고 이스라엘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서신 교환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들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통이 더 컸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그 나라가 섬기는 신들 사이의 전쟁으로 이해했기에, 이스라엘과 바벨론의 전쟁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과 바벨론이 섬기는 ‘마르둑’이라는 신과의 전쟁인데 도대체 어떻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마르둑 같은 이방 신에게 질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만 다스린다고 생각하고 이방 땅은 더러운 땅이며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더러운 땅, 하나님도 안 계신 땅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것은 너무도 큰 정신적 충격을 준 것입니다. 게다가 끌려간 이방 땅에는 성전도 없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도 없었으니 성전과 제사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그들이 영적으로는 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렇게 포로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육신적 절망 뿐 아니라 극심한 정신적, 영적, 신앙적 절망을 주는 시대였고 그 아픔과 절망을 선지자 에스겔도 그대로 겪었던 것입니다. 오늘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마른 뼈 환상은 바로 이러한 에스겔 선지자 시대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그러면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오늘 본문을 봅시다. 먼저 본문 1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여기서 ‘권능’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손’(hand)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 신(神)’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이 에스겔 선지자를 붙잡아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골짜기로 가게 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에스겔 선지자가 간 골짜기에는 뼈가 가득했습니다. 물론 사람의 뼈지요. 그런데 이 골짜기에 가득한 뼈는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생활로 인해 심한 절망과 좌절 속에 빠져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정말 죽어서 살은 다 썩고 뼈만 남은 시체 같은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에스겔이 그 뼈 사방으로 두루 지나가며 자세히 보니 그 골짜기에 가득한 뼈들이 아주 바짝 메말라 있었습니다. 이것은 죽은 지 아주 오래 된 사람의 뼈라는 뜻입니다. 죽은 지 오래 되었으니 당연히 생명과는 거리가 멀지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아주 말랐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즉 어떤 생명에 대한 소망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포로 된 땅에서 절망에 빠져 그 어떤 소망도 기대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히 그들은 포로가 되어 겪는 육신적인 고통보다 내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절망하고 좌절한 것이 더 큰 문제였다고 했는데 이런 총체적인 좌절과 절망적인 상황을 ‘아주 마른 뼈’라는 모습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마른 뼈’를 보여주면서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무엇이라고 물으십니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물론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있습니까? 뼈가, 그것도 죽은 지 오래 돼서 바짝 마른 뼈인데 어떻게 그 뼈가 살아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에스겔은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권능에 모든 것을 맡기는 태도입니다. 즉 주님이 원하시면 당연히 하실 수 있고 원하지 않으시면 안 될 일기기 때문에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지 살 지는 철저하게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마음먹으시면 오늘밤에라도 내 생명을 가져가시는 것이고, 또 죽은 자를 얼마든지 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라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라” 즉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기’란 히브리말로 ‘루아흐’입니다. 앞서 1절에 나온 여호와의 신(神)이라는 말에서 ‘신’도 ‘루아흐’입니다. 두 낱말은 같은 뜻이라는 말이지요. ‘루아흐’란 바람, 숨, 입김이라는 뜻과 더불어 ‘영’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루아흐’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입니다. 또한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했는데 이 ‘생기’가 바로 ‘루아흐’입니다. 이 생기는 하나님의 숨이며 생명이며 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마른 뼈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면 흙이 사람이 된 것처럼 마른 뼈도 생명을 얻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이지요.

오늘 우리의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는 죽은 존재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죽었어도 하나님이 생기,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으시면 다시 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좌우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이 말씀 그대로 뼈들에게 대언하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정말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납니다. 제일 먼저 이 뼈 저 뼈가 소리를 내며 스스로 움직여 서로 들어맞습니다. 그 다음 단계로 뼈 위에 힘줄(근육)이 생깁니다. 다음 단계로 살이 오릅니다. 그 다음엔 살가죽(피부)가 생깁니다. 그토록 마른 뼈가 하나님이 명령에 따라 근육이 생기고 살이 나고 피부가 덮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육신의 몸뚱이는 있되 아직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있되 생명은 없는 상태, 바로 시체 아닙니까? 그래서 8절에 “그 속에 생기는 없었다.”고 한 것인데 여기서 ‘생기’도 루아흐입니다. 하나님의 루아흐, 하나님의 생기가 아직 없으니 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또 다시 대언하자 하나님의 생기가 그 위에 불어넣어져 진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육신도 생기고 생명까지 얻어 다시 살아나고 보니 그 마른 뼈는 매우 큰 군대였습니다(10절). 하나님은 11절에 그 마른 뼈가 본디 누구인지, 다시 살아난 큰 군대가 누구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입니다. 처음 말씀 드린 것처럼 포로로 끌려가 모든 소망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신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죽어 마른 뼈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에스겔을 통해 두 가지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하나는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13절)이고, 또 하나는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라"(14절)로서 약속은 두 개지만 실은 한 가지 내용입니다. 여기서 무덤은 죽음과 절망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 성령이 임하시면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을 이기고 절망을 극복하고 고향으로 귀환할 것이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이 겪는 가장 큰 슬픔이요 절망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오신 것은 인간이 가진 모든 절망을 극복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예수님을 살리시고 무덤에서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약속 뒤에 똑같이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죽이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살리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내 생명도 내 것이 아니요 오직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활사건을 통해 내 생명이 누구 것인지, 가정도 누구 것인지, 나아가 교회와 이 나라 이 민족의 모든 운명과 생명이 다 누구에게 전적으로 달린 것인지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른 뼈도 살아나리라

오늘 에스겔은 마른 뼈가 생명을 얻고 다시 부활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 마른 뼈의 부활은 포로로 끌려가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부활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며 더 나아가 우리들 자신의 부활입니다.

오늘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려면, 부활하려면 무엇이 필요했습니까? 뼈가 들어맞고 힘줄과 살이 붙고 피부가 덮인다고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영이 필요합니다. 생명의 영인 성령이 있어야만 진정 살게 됩니다. 제가 처음에 화분 이야기를 한 것 기억나십니까? 화초도 생명이기에 물만 주고 비료만 줘서 몸뚱이만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정신적인 부분, 즉 정성과 사랑이 있어야만 사는데, 우리 인간은 철저하게 영적인 존재이기에 몸뚱이만 있다고 산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있으되 내 안에 생명의 영인 성령이 계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시체와 같습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지배해야 산 것입니다. 내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죽음 같은 절망과 모든 문제를 깨끗이 몰아내 주실 것입니다.

오늘까지 1주일간 계속된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 우리는 나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은 홍해바다 같은 문제들, 우리 뒤를 쫓아오며 몰아붙이는 애굽 군대 같은 고통들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이런 고통이 닥쳐올 때마다 우리는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죽음 같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힙니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런 고통에 사로잡히고 짓눌려 내 육신이 병들고 정신이 메마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마른 뼈처럼 메마른 인생이 되어 절망의 골짜기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게 됩니다. 세상에 이런 해골같은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이런 문제와 고통들이 비록 내 육신을 힘들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내 안에 계신 생명의 영, 성령님을 흔들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 한 우리는 이 모든 고통과 문제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권능의 손으로 붙드시고 성령님이 인도하시면 내 앞의 홍해바다는 단숨에 갈라지고, 내 뒤를 치던 원수마귀는 하나도 남김없이 멸망당할 줄로 믿습니다. 바로 이 승리를 이루기 위해 우리 예수님이 사망권세 이기고 무덤에서 나와 부활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으로 이 모든 문제를 이겨내고 찬란한 부활의 새아침을 맞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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