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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신령한 몸 (고전 15:3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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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보다 중요합니다. 추수감사절은 과거에 주신 복을 감사합니다. 성탄절은 현재와 더 관련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를 도우려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절은 미래를 말해줍니다. 어떤 미래인가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영광스럽고 행복한 미래입니다.

왜 학생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하나요? 즐겁고 재미있어서요? 왜 고시원에는 청년들이 모여 있나요? 좋아서 그런가요? 학위받기까지 미국에서 6년가량 있었습니다. 공부하고 청소했습니다. 완전 밑바닥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부심이 넘쳤습니다. 미래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래를 준비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만큼 현재도 힘이 있어요.

늙어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때를 위한 준비가 되었나요? 그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곤란합니다. 미래는 아주 빨리 다가옵니다.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사람을 미련하다고 하지요. 그러나 준비가 없어도요, 세상 삶은 몇 년 고생하고 나면 끝납니다. 그 후가 더 문제입니다. 몇 년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이 옵니다. 그때를 위한 준비가 되었나요?

1. 십자가와 부활

예수는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십자가에 못이 박혔습니다. 모두가 그의 숨이 끊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병사들은 확인하려고 창으로 옆구리를 통해 심장까지 찔렀습니다. 남은 피와 물이 다 쏟아졌습니다. 그 후에 그의 시체를 무덤에 넣었습니다. 영혼은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처럼 죄가 많았나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짊어졌기 때문입니다.

엊그제도 어느 분이 안수해 달랍니다. 신장이 나쁘답니다. 온 몸이 아프답니다. 어느 분은 암입니다. 예수 믿는 게 무엇인가요? 그가 나를 위해 벌을 받고 저주를 당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가 내 죄를 가져갔습니다. 내 병을 가져가고 내 가난을 가져가고 문제를 가져갔습니다. 그렇다면 주장하기 바랍니다. “저가 가져갔다. 십자가가 그 증거이다.”

그렇게 믿어도 여전히 아픕니까? 병도 가난도 그대로 있나요? 당장 새 몸이 안 되고 증세가 그대로 있다 해도 예수가 새롭게 하셨음을 주장해야 합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광신자 아니냐고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믿음으로 병에서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절대로 양보하지 말고 해결될 때까지 외치세요. “십자가가 내 몸이 나았다는 증거이다.”

지옥에 떨어진 예수가 아직 거기 계신가요? 거기 일단 들어가면 아무도 나올 수 없습니다. 지옥이 나와 상관없다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요. 누구든지 세상에서 죄 지은 사람들은 다 갑니다. 세상에서도 지옥을 경험하지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하는 일이 있지요? 그것도 지옥에 비하면 그림자에 지나지 않아요. 그런 지옥을 예수께서 깨뜨리셨어요.

그래서 다시 살아납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는 조용히 부활해서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들 특별히 그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 지셨습니다. 따르고 섬기던 여인들이 최초로 보았고요 여러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함께 식사도 했습니다.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시에 살아난 예수를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주신 바울도 보았습니다. 그가 부활의 예수를 만나는 장면은 대단히 극적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스데반이라는 젊은이가 길에서 설교할 때에 돌로 쳐 죽이게 했습니다. 더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내려고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가던 도중에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 만남은 바울을 다른 사람이 되게 합니다.

바울의 일행은 말을 타고 가다가 엄청난 빛을 만납니다. 태양보다도 더 밝고 더 찬란합니다. 그 가운데서 바울은 예수를 봅니다. 그리고 대화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빛과 천둥치듯 큰 소리만 듣습니다. 그게 부활한 예수의 존재양식입니다. 바울은 충격을 받고 눈이 멀어버립니다. 그가 한 신자에게 안수 받아 눈을 뜨면서 삶은 완전히 바뀌어버립니다.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나요? 바울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잡혔을 때 다 도망갔습니다. 심부름하는 여자 아이 앞에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를 보면서부터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떻게 그리 용감할 수 있나요? 모두가 처참하게 형벌을 기꺼이 받을 뿐 아니라 감사하면서 죽었어요.

2. 부활, 인류최대의 목표

부활한 예수 본 사람은 특별히 복 받은 것입니다. 못 보았지만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이도 그렇습니다. 들어보시면 그래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게 부활인가요? 지난번 대통령이 탄핵 되었다가 헌법재판소가 무효화시켰지요? 그때 대통령이 부활했다고 했습니다. 원위치로 돌아가는 게 부활인가요? 그런 부활인가요? 죽었다 살아난다고 달라지나요?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나요? 아닙니다. 변화되었습니다. 전에는 약해서 잡혔고 매 맞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극심한 고통 속에 죽었습니다. 그렇게 한계를 가진 몸이 다시 되는 게 아닙니다. 다른 몸입니다. 아프지 않습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가두어둔다고 거기 있지 않습니다. 신령한 몸입니다.

사람들은 조금 젊고 아름다워 보이려고 성형수술을 합니다. 그래서 늙어가는 외모에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그 사람의 근본이 바뀌지 않습니다. 피부 밑은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수술을 많이 해도 오래 살게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여기저기 고치면서 조금 더 연장을 할 뿐이지요. 그런 몸으로 백 년을 살았다고 한다면 모두가 놀라 감탄합니다.

부활한 몸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어떤 성형외과 의사도 그렇게 아름답게 할 수 없습니다. 별과 태양보다 찬란합니다. 3차원을 넘어서는 신비한 몸입니다. 피곤하지 않아요. 마음먹으면 즉시 미국에도 달에도 천국에도 갈 수 있어요. 들어도 실감이 안 나지요? 부활한 예수를 본 사람들은 알았어요. 그래서 무슨 수를 내서라도 그렇게 되려했어요.

바울은 당시 사회에서 떠오르는 별이었어요. 젊어서 이미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어요. 가말리엘에게 배웠어요.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었어요. 원한다면 가장 높은 사람도 될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 모든 특권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배설물에 지나지 않다고 했어요.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 고난을 자처합니다.

그는 그 이유를 고백합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부활이 무엇인가요? 씨는 작은 것입니다. 볼품이 없어요. 그러나 그 안에 나무도 있고 풀도 있습니다. 미국에 가면 키 백 미터가 넘는 나무들이 있어요. 얼마나 큰지 나무 밑 둥에 굴을 파서 차가 지나가게 합니다. 그런 큰 나무도 작은 씨 하나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현재의 몸을 씨로 삼아서 전혀 다른 몸을 만듭니다. 여기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하고 행복했다면 그것을 씨앗으로 삼아서 천 배 만 배를 곱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부활보다 못합니다. 지금 세상의 원소기호로 된 몸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상태입니다. 신처럼 됩니다. 모든 인류가 바라고 바라는 상태입니다.

그를 본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안다는 말은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처녀가 남자를 알았다고 할 때 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사람은 부활을 안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증언과 그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도 부활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복된 사람이 되는 겁니다.

3. 현재 몸은 부활을 위한 씨앗

미래가 어떻게 올까요? 현재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술 마시고 담배피고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건강할까요?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지요. 야곱의 열두 아들이 각각 족장이 됩니다. 야곱이 죽기 얼마 전에 열 두 지파의 미래를 예언합니다. 그중에 두 지파만 특별히 축복하고 다른 지파는 대충 넘어갑니다. 그때의 예언대로 지파들의 미래가 전개 됩니다.

그 예언을 잘 살펴보면 그들의 현재를 그대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장자는 자기 서모와 간통합니다. 그 다음 아들들은 이웃을 속여 잔인하게 죽입니다. 그 다음 4번째 아들 유다도 처음에는 악했으나 회개하고 사람이 바뀝니다. 그 바뀐 사람에 맞추어서 미래가 열려집니다. 그래서 그 지파가 사자처럼 강하게 일어나고 거기서 다윗이 나옵니다.

부활은 그대로 현재의 연장입니다. 현재 구원의 확신이 있나요? 그리고 그 힘으로 능력 있게 사나요? 그러면 당신은 부활할 뿐 아니라 최상의 상태로 그렇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어도 삶이 별 재미가 없나요? 구원을 받았는지 성령을 받았는지도 모릅니까? 그래도 부활은 확실하게 합니다. 그러나 좀 더 나은 부활을 얻을 기회는 잃어버립니다.

바울은 부활의 예수를 만난 뒤 말합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부활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다 영광스럽지만 모두 똑같지 않아요. 더 크고 더 아름다운 영광이 바울이 추구하는 부활입니다. 그래서 헌신을 쉬지 않았고 순교의 제물을 드립니다.

어느 사람이 부동산의 천재로 부자가 되었다면 그 사람이 하는 대로만 따라 하겠지요? 누가 증권의 천재로 수천억을 벌었다면 그 사람이 살 때 사고 팔 때 팔겠지요? 더 나은 부활을 위해서 그리고 현재 이 땅에서도 멋지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까요? 예수의 제자들을 따라 하면 됩니다. 특히 바울을 따라 흉내만 내어도 눈빛부터 달라집니다.

죽도록 사업해서 돈 많이 벌고 부하 많고 좋은 차타며 좋은 집에 산다고 더 나은 부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웃을 돕고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더 나은 부활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부활의 힘 곧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할 때 부활의 권능은 일어납니다. 그 권능은 현 세상 삶도 잘 되게 만듭니다.

부활의 씨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입니다. 부활 목표를 분명히 보는 사람은 현재를 멋지게 살 힘을 얻습니다. 최상의 부활을 목표로 일어나세요. 그러면 세상일, 잘 먹고 잘 사는 일도 멋지게 해냅니다. 더 나은 부활을 위해 현재를 최상으로 보냅시다. 감사하고 기뻐하며 최고의 헌신을 드려봅시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QT를 위한 질문

1. 감사절, 성탄절, 부활절의 의의를 과거, 현재, 미래와 연관시켜 말해봅시다.(서/1,2)
2. 십자가는 무엇을 증명하고 있나요?(1/2,3)
3. 부활의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변하나요?(1/7,8)
4. 부활한 몸은 어떤 상태일까요?(2/2,4,7)
5. 사람의 장래는 어떻게 예언이 되나요?(3/1,2)
6. 더 나은 신령한 몸 부활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3/5,6)
(김기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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