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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십자가의 능력 (고전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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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군중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열광적으로 환호했던 종려주일이다. 예수님의 생애가 전부 고난의 삶이었지만, 특히 이번 한 주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주간이었기에, 고난주간이라고 한다.

  예수님과 3년 간 같이 지냈던 제자 가룟유다는, 은30에 예수님을 팔아버렸고, 주와 함께 죽는데도 같이 가겠다고 큰소리 치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하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던 군중들은, 며칠 후에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는, 배신의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께서도 외면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며칠 동안 겪은, 고난에 대하여 성경은 집중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 십자가는, 평범한 사람이 지고 간 십자가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죽음이다.

  십자가를 바로 알면, 기독교의 핵심을 알고, 그리스도의 속죄를 깨닫게 된다. 따라서 고난 주간을 맞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깨닫고,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1.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일생은,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천국의 소망을 심어 주는 삶이었다. 또 많은 표적과 놀라운 말씀의 권세로써,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해 주셨다.

  그러나 악한 제사장들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그리스도라 한다면서, 죽일 자라고 정죄하고, 그 당시 유대 지방을 다스리던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예수님을 처형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께 아무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흥분한 유대인의 반란을 두려워함으로, 십자가의 처형에 내어 주고 말았다. 무고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예수님께서는, 로마 군병들에게 뺨을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는 등, 온갖 멸시 천대를 받으셨다.

  머리에는 길고 단단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끝에 뾰족한 납덩이가 매달린 잔인한 채찍으로 맞아 온몸이 찢겨지며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는 육중한 나무 십자가를 지고, 또다시 채찍질을 당하시며 처형 장소인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어가셨다.

  그리고 마침내 급소를 피한 손과 발에, 못 박힌 채로 나무십자가에 달리셔서, 한낮 사막의 강렬한 햇볕 아래 매달리셨다. 죽기까지 계속 피를 쏟으시니, 타는 목마름은 말로 할 수 없고, 사막지대의 독한 벌레들이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들어도, 못 박힌 몸으로는 저항조차 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옷은 군병들이 나누어 가졌고,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향해 군중들은 저주하며, 희롱하고 손가락질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사하여 줄 것을 간구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신데, 잔인한 군병들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자,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게 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도 괴로워하시니까, 군인들이 고통을 감하게 하려고, 쓸개 탄 포도주를 마취제로 마시게 했으나, 그것까지 거절하고 고통을 감내하셨다. 

  그 이유를 (사53:4-6) 말씀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바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하신 사랑의 증거다.

  십자가의 죽음은 로마인이나 유대인에게 있어서, 제일 수치스러운 죽음이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이 처형법을, 비로마인들 특별히 노예, 강도, 암살자에게만 시행하였다. 십자가는 결코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자랑할 것도 아니었다. 치욕적인 형벌과 죽음의 표징이었다.

  이 참혹한 십자가를,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지셨다. 아무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셨다.

  그래서 마귀는 십자가를 가장 싫어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드라큐라는, 어느 누구도, 어느 것도 무서워하지 않지만, 십자가만 보이면, 무서워 벌벌 떨며 도망친다. 십자가만 보면 갑자기 파김치가 된다.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나는 십자가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전2:2)하고 말하며,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하지 않겠다(갈6:1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하면서, 십자가 중심교리를 전파했다.

2.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알게 하는 능력이 있다.

십자가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말해준다. 죄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라지게 한다. 사람들이 망하는 이유는, 죄 때문에 그렇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죽으셨다. (사6장)에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스랍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다. 그때 그는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사6:5)에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하였다. 죄를 알게 하는 능력은, 하나님을 만날 때 나타난다. 자신의 문제를 알아야 해결할 수 있다.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무슨 병인지 모르면, 그냥 앉아서 아픔을 다 당해야 한다. 심각한 병인데, 그 병을 찾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안다면 살 수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어 있으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사6:9)

  영적인 감각이 사라졌기 때문에 회복되지 못한다. 과거에도 교회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영적 감각이 살아 있었기에, 회개와 기도를 통해 다시 회복되었다. 말씀이 선포되면 식어진 가슴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어둠에 빠진 영혼에게, 아무리 부르짖어도 듣지 못한다.

  아무리 외쳐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감각을 잃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신다. 고난은 성도의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린다. 고난은 죄를 깨닫게 되는 능력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고난 당하셨음을 볼 때, 죄를 이길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아무나 죄를 깨닫지 못한다. 화인 맞은 양심은, 조금도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죄를 볼 줄 알게 하는 능력이다. 바울은 자기가 제일 잘난 사람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 이름을 사울이라고 했다. 가장 큰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아죽이러 가다가, 핍박당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때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는지,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했다.

  이처럼 십자가 아래 나아오면, 자신의 죄를 보게 된다. 죄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힘과 능력이다. 그래서 (롬7:23) “죄 아래로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 도다”라고 했는데, 죄는 힘이 있어서, 우리를 막 끌고 간다. 죄의 사슬에 매여, 끌려가는 노예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죄는 결코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 뜻대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 뜻대로 살지 못하고, 죄의 뜻대로 죄의 권세에 이끌려 살아간다. 죄가 우리를 주관하여 불의의 병기, 즉 사탄의 도구가 되게 만든다.

  술 마시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한다. “처음에는 내가 술을 마시고, 그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그 다음에는 술이 나를 마신다” 즉, 술 마시는 일이, 내 뜻이 아니라, 악한 영의 힘이 끌고 간다는 말이다. 살인한 사람에게, 왜 사람을 죽였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모르겠다고 말한다.

  어떤 집안이 도박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도박을 해서 문전옥답, 집을 모조리 날렸다. 보통 도박은 유전된다. 그래서 이 집안이 3대째 도박을 하는데, 할아버지가 도박으로 망하고, 아버지가 도박으로 망했다. 아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도박으로 망했음을 알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원망도 했다.

  그런데 아들 자신도 도박에 손댄 다음, 도박을 끊지 못했다. 그래서 비장한 각오로, 도끼로 자기 손가락을 모두 찍어버렸다. 하지만 손가락을 찍어버리는 결심도 잠깐뿐, 이 사람은 발가락 사이에 화투를 끼고 도박을 했다. 이것이 죄의 힘이다. 이런 죄의 힘을 십자가로 끊을 수 있다.

3. 십자가는 죄를 사하여 주는 능력이 있다.

십자가는 죄를 알게 할 뿐 아니라, 죄를 사하여 주는 능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주셨다. 이 보혈의 능력이 아니고는, 죄를 끊을 수도, 용서받을 수도 없다.

  아무리 강한 의지, 고상한 도덕, 강철같은 율법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죄악의 세력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의 권세가 깨졌다. 세상 방법으로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십자가라는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셨다. 이제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의뢰하며 충성스럽게 살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 주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사도들은 가는 곳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고 했다. 예수님 외에는 길이 없다.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고는,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자신을 성도라고 말하면서, 아직도 죄악의 종인 사람이 있다면,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 제 힘으로는 안돼요,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 죄악에서 끊어주시고, 악한 마귀의 권세를 깨뜨려 주세요’라고 간구 하시기 바란다.

  십자가의 길로 나와야 하는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헛된 해결책을 찾는다. 그 헛된 방법은,

(1)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방법이다.

죄를 절대적으로 보지 않고, 상대적으로 본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래도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이 전부 다 범죄 하였는데, 나는 저보다 죄는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작은 죄를 지었으니, 천국 가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천국은 상대평가로 갈 수 없다. 100명 가운데 10명만 천국 가고, 나머지 90명은 지옥 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믿고 순종하면, 모두 다 천국 갈 수 있고, 모두가 다 범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면, 다 지옥 갈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타이타닉 호가 침몰했다. 그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다. 공부 잘하는 사람도 죽고, 돈만은 사람도 죽었다. 살 수 있는 방법은, 그 배에서 나와서, 다른 배를 타야 구원받을 수 있다. 남들도 다 죽는데, 나도 여기서 같이 죽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2) 헛된 고행과 공로사상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이런 공로 사상이 본능적으로 남아 있다. 내가 죄를 50정도 지었는데, 공로를 60정도 쌓으면, 서로 상쇄해서 10정도 남게 되니, 그 남은 10으로 천국 간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공로를 쌓아도, 우리의 죄 값을, 치를 수가 없다. 작은 죄악조차도, 우리의 공로 가지고는 절대 우리 죄를 씻을 수 없다. 죄의 값을 사망이다. 죽어야 한다. 내가 죽어야 한다. 그런데 내 대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가 씻어졌다.

  인간의 공로 사상 중에, 가장 잘 정립된 사상이 불교다. 일전에 온 매스컴이 떠들썩하게 보도한 성철스님이 있다. 그는 결혼직후,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나서, 그 이후로 부모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된다고 만나지 않았다.

  기거하는 곳에 철조망을 쳐놓고, 10년 동안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16년 간 솔잎가루와 쌀가루만 먹고살았다. 8년 눕지 않고, 앉아서 잤다고 한다. 이런 식의 수양을 쌓았다. 하지만 심령과 양심에는 평안이 없었다. 이상한 말을 많이 했다. 1986년 음력 4월 8일 법어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들, 오늘은 당신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을 파는 엄숙한 부처님 오늘은 당신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천지도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이라. 일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일체시니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합니다.”

  여기서 성철은 재소자들과, 호스티스들이 부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1987년 음력 4월 8일 법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보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은,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인 줄 알 때에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마음, 고운 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 같이, 부처와 스승으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

  1989년 음력 4월 8일 법어에서는, “천상천하에 독존 무비한 부처님의 처소는 험악하고도 무서운 저 지옥,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모든 중생들의 그 고통을 대신 받고, 그들을 안락한 곳으로 모시며, 그들을 돕기 위하여 부처님은 항상 지옥에 계십니다…. 중생계가 한이 없으니, 부처님의 지옥생활도 끝이 없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중생계가 다 할 때까지…” 이와 같이 그는 부처가 지옥에 있으며, 부처의 지옥생활은 끝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결국 1993년 11월 4일, 그는 다음과 같은 열반 송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한 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니,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니, 한 덩이 불덩이 푸른 산에 걸려있다.󰡓

  불교 신자 중에 성철보다 불심이 강하다고 자부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왜 지옥가나?

불교에는 죄 사함의 교리가 없기 때문이다. 피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면서, 우리 죄를 씻어주셨기에, 죄사함의 교리는 기독교에만 있다.

불교는 피가 없기에 용서가 없고, 인과응보의 교리만 있다. 어느 불교학교에서, 학생이 공부하다가 선생님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선생님! 개를 죽이면 개로 태어나고, 토끼를 죽이면 토끼로 태어나는 것이 인과응보인가요?” 선생님께서 대답하였다. “그렇지”

  학생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사람을 죽이면, 사람으로 태어나나요?” 선생님께서는 말문이 막혔다.

불교는 피가 없기에 죄사함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의 피로 인해 죄사함이 있다. 십자가는 죄사함의 능력이다. 죄사함은 십자가밖에 없다. 십자가만이 죄사함을 줄 수 있는 능력이다.

  십자가는 다시 살리는 능력이다. 사람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길은, 이 십자가를 붙들 때 나타난다. 이런 능력으로 충만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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