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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께서 당하신 3대 고난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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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은 불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수많은 고난이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절대다수의 고난은 인간의 범죄와 잘못으로 인하여 다가온 고난입니다. 그것은 자업 자득적 고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결코 자업자득적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당하실 어떤 범죄와 잘못을 저지른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극에 달하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당하신 고난은 타락한 인류를 그 죄악과 저주와 사망에서 건지시려고 자원하셔서 당하신 대속적 고난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인간이 마땅히 당해야만 할 고난을 대신하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은 용서와 구원과 치료와 축복의 샘을 터뜨린 견줄바 없이 고귀한 고난입니다.
  즉 나와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나와 여러분을 위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3가지 면의 고난을 깊이 생각해 보며 경건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경배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당하신 영적의 고난입니다.

  성경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함으로 지은 인류의 원죄와  죄중에 태어난 인간 스스로가 지은 자범죄의 형벌을 주님께서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원죄와 자범죄로 가득찬 추악한 죄의 잔을 마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고, 죄를 지은 적도 없으신 예수께서는 이 죄의 잔을  바라보시고 처절한 영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께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하고 기도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의 잔을 마시지 않아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제 뜻은 개의치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을 거부하셨다면 온인류는 영원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의 잔을 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죄악의 쓴잔을 마신 후 체포당하신 때 부터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까지 하나님께 버림당한 처절한 영적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죄악의 담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이를 분리시킨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극한 영적 고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창세 이후로 갈라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잔을 마시고 난후 예수님이 당해야할 영적인 절망과 고독이란 말로 다 할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음부를 체험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당하신 영적인 깊은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당시의 처절한 상황을 시편 22편1.2절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예수님의 처절한 부르짖음에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영적인 포로로 잡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악령들은 그를 향하여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그를 짓밟고 승리의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극한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당하신 심적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심적으로도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신임하고 사랑했던 제자에게 당하신 배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원수에게 배신당하는 일이야 흔히 있을 수 있다지만 자신이 사랑하고 신임하던 제자에게 당하신 배신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총명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유다를 신뢰하고 사랑하여 돈궤를 맡기셨을 정도였습니다. 이 유다가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팔아넘긴 것입니다.
  이 배신으로 인해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당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극심한 고통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제자들은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감옥이나 죽는 곳까지라도 가겠다고 말하며 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의 뜰로 끌려가셔서 밤새도록 모진 고통을 당했습니다.

  예수께서 이같은 고통을 당하실 때 예수님을 따라와 있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보시는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저주하고 맹세까지하며 저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의 심적 고통이 어떠하셨겠습니까?

  거기에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의 언덕으로 걸어가실 때 평소에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병고침을 받고, 은혜를 받은 군종들이 그 받은 사랑과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 이것보다 처참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날도 사람들은 아무 은혜도 베풀지 않으면 원수로 갚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대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그 마음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은혜받은 것을 원수로 갚습니다.
  주님께서 사랑을 베푸신 군중들이 돌이켜 그 사랑을 원수로 갚으려 하니 주님은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크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높이 달리심으로써 위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으로 버림받고, 아래로는 모든 제자들과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았습니다.
  사람이 버림받아 고독해지는 것, 그것 보다 더 무서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외롭고, 고독하고, 버림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요즘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철저히 버림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 한없는 고통과 고독을 체험하셨습니다. 심각한 심적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당하신 육체적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 심적 고난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극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목요일 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혀 가야바의 뜰에 끌려 오셔서 밤새도록 심문을 받으시고 매를 맞으며 모진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집 가속들이 예수님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수염을 뜯었습니다. 
  주먹으로 맞아서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수염이 뽑히어 생살이 묻어나왔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아서 얼굴과 몸이 침투성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께서 당하신 모욕과 고통은 말로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성경에 이르신 그 창조주, 만왕의 왕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러한 처참한 취급을 받으신 것입니다.

  목요일, 밤이 새도록 심문과 고문을 당하신 예수님은 금요일 새벽에 또다시 빌라도에게 끌려가셔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문을 당하신 후 사형언도를 받으셨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예수께 홍포를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우고, 손에 갈대를 쥐어주고, 십자가에 죄패를 붙이고, 절하며 희롱을 다 합니다.
  밤새도록 한숨도 못주무시고 아무것도 잡숫지 못하신 예수님을 또 나무에 묶고 40에 감한 강한 매를 때립니다.

  그 당시 로마 군인이 사용한 채찍은 다섯 개의 가죽 줄에 쇳조각과 동물의 뼈조각을 함께 엮어 만든 채찍에 맞으면 가죽줄의 쇳조각이 몸에 파고 들어가고 채찍을 당기면 살갗이 그대로 파헤쳐집니다.
  이것을 39차례나 때렸습니다. 예수님의 찢겨진 옥체에서는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성경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질병을 치료해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난후 주님께서는 그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갈보리 산을 향해서 올라 가시는데 수도 없이 넘어졌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갈보리 언덕에서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양손과 발을 대못으로 박히신 후 하늘과 땅 사이에 높이 매달렸습니다.
  이 얼마나 처참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괴로우셔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외치신 것입니다.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6시간만인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 좌우에 못박힌 강도는 아직 죽지 않아서 해지기 전 그들을 십자가에서 내려놓기 위해 로마 군인들이 그들의 무릎을 꺾어서 피를 흘리게 해서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운명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창이
심장을 꿰뚫자 물과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보통 인간적인 죽음과는 달랐습니다.
  주님은 무릎을 꺾지 않았지만 주님이 죽으신 이유는 심장이 안에서 터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버림받은 극한 고통과 정신적으로  배신당한 괴로움, 고독 그리고 육체의 고통이 예수님을 짓눌러 더 이상 감당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영혼을 부탁하나이다'고 할 때 그의 심장이 터져버린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은 심장이 터질 듯한, 아니 터져버린 고통이었습니다. 주님이 당한 이 고통을 우리는 이  고난주간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위대한 힘에 잡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억지로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원수들은 그를 향하여 네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고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고 조롱했습니다.
  그 말은 참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구원하였으되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우리가 모두 죽어야함으로 주님 혼자서 그 모진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깊이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을 이해하지 않고는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고난을 참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는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죄값인 사망의 댓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우리들을 사랑할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6백여년전에 성령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고난인 것을 명백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4.5)  할렐루야!

  그리스도의 고난은 전적으로 나와 여러분 때문에 당한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영원한 의로움을 선물로 주시고 끝없는 구원을 주시고 하늘의 영광을 값없이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고난당하신 그 결과로 못박힌 손을 활짝 내미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 앞에 우리는 믿음으로 나가고, 감사함으로 나가고, 사랑으로 나가고, 흠모하면서 나가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광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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