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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살아나셨느니라 (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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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독일신학자 파울루스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지 않고 무덤에서 혼수상태에 있다가 소생해서 무덤에서 나와 제자들 앞에 나타났다.”

역시 독일신학자 스트라우스, “제자들이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으나 마음 속에 부활한 것 같은 믿음과 환상이 보여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울 자양동에서 청년회를 담당하고 있을 때 군대 다녀온 대학 2학년 학생이 물었다.
-“전도사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정말 믿고 설교합니까?”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놀라는 표정으로 어떻게 믿어지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지냐?”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안믿어집니다.”
-“나도 자네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이 안 믿어져서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데 부활을 못 믿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말해 주었다.

사실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초자연현상을 무조건 믿으라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꿈 속에서 찬란한 십자가를 보았다든지, 아니면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다든지, 커다란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신앙을 갖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그러나 청년들이나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납득할 만한 증거를 요구한다. 내가 이해되어져야만 믿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 없다라고 책망할 것이 아니다. 그들 나름대로 믿어보려는 고민이 그 속에 있다.

우리 중에 대다수는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부활절을 맞이 해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좀 더 객관성 있게 구체적인 증거를 살펴보므로 더욱 더 확신있는 부활신앙을 갖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빈 무덤

눅24:1-3,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이 여자들은? -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함께한 여인들이었다(10절). 이 여인들이 직접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빈 무덤을 보고 근심할 때 천사 둘이 서 있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24:5-7)
눅24:5,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여인들이 사도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무덤이 텅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믿지 않았다.
눅24:11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가 달려가 무덤을 확인했으나 역시 예수님은 뵈지 않고 세마포만 보였다. 그도 역시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세계 유수한 종교 창시자의 무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잘 보관되어지고 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무덤은 인도의 능수해안에 있고, 유교의 창시인 공자의 무덤은 중국 장평량에 있으며,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멧의 무덤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있습니다.

그들의 무덤이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결코 신이 아니요, 인간이란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죽음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무덤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나셨다. 빈 무덤이 첫 번째 증거가 된다.

2.예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고전15:3-8,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게바 - 베드로, 열두 제자에게, 오백여 형제에게, 야고보, 사도 바울에게도 보이셨다. 여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먼저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다.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다. 그러면 40일 동안 무슨 일을 하셨는가?
행1:3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1)저희에게 보이시며 - 부지런히 제자들을 만나셨다. 반복해서 계속적으로 제자들에게, 성도들에게 나타나셨다. 때로는 생선을 먹어 보이시기도 하고, 도마에게는 손가락으로 넣어 보라고 하시기도 하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걷기도 하시고, 갈릴리 해변에서 생선을 구어 제자들에게 먹이기도 하시고...

2)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심 -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제자들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하였다. 그 다음엔 제자들을 통하여 이 땅에 건설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그 비전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가는 사도행전에서 증거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셨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 제자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다. 오늘날 지구상에 10억이 넘는 인구가 예수를 믿고 있다. 인종과 지역과 신분을 초월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교회가 있다. 그것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있겠는가? 이것이 부활의 열매들이요, 증거이다.

3.말씀에 대한 성취

눅24:44-4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부활의 당위성을 구약 예언의 성취라고 가르쳐 주셨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들과 시편에서 예언된 말씀들의 성취였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주님의 설명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성령께서 역사하신 증거다.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다.
고전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또 가깝게는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던 것을 상기시키셨다.
눅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예수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에 이미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잊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갑자기 즉흥적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말씀에 의존되어 있다.
마24: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부활은 말씀의 성취였다. 이것이 세 번째 증거가 된다.

이와 같은 증거들 - 빈 무덤과 제자들의 증언과 말씀의 성취가 부활의 객관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1.산 소망의 기쁨을 준다.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면서 막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그리고 강한 어조로 이렇게 써서 보냈다.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5: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5: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에 매여 살지 않는다. 죽음 너머의 영원한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직업이 의사인 어느 집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 “모태(母胎)는 세태(世胎)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정상적인 사람이 되려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야 하고 탯줄을 끊어야 한다. 탯줄이 끊어지므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도 세상이라는 태속에서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탯줄을 끊음으로 또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 현실주의자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관직이 박탈당하게 되고 정치적 생명이 끝나게 되는데도 부정과 불륜에 연류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천비리에 얽혀서 정치권이 소란하다. 기업인들은 비자금, 부정대출등등에 연루되서 시끄럽다. 나는 정치나 경제의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참~ 어리석다는 말만 나온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에 충실해야 하지만 욕심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삶을 무너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썩어질 육신의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영원한 삶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2.확신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들로 하여금 담대하고 확신있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유익이 있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옛날 초대교회 성도들은 “안녕하십니까?”(샬롬)이라고 인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라고 인사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 박해 시기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이 밝혀지면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들의 신앙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사적인 신앙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을 호령하는 담대함, 어디로부터 왔는가? 부활 신앙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실히 믿는 성도는 삼거리에 서서 이리갈까? 저리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우와좌왕 흔들리지 않는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확신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

우리 교회 안에도 신앙의 뿌리 확고하게 박힌 분들이 많이 있다. 그 분들은 결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자신의 삶 속에서 항상 자신감 있게 확신을 가지고 사는 모습을 보게 된다. 부활 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흔들림 없이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3.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눅24:45-48,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종종, 거리에 “목격자를 찾습니다. 연락주시면 후사하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보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의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증언주지 않는다면 사고를 당한 사람은 억울하게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교통사고의 목격자는 자기가 하기 싫거나 귀찮으면 증인으로 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제자들 속에 내주하신 성령께서 그들을 담대케 하셨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충만해서 성전에서 설교하다가 공회원들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공회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증거했다. 공회원들이 입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행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만약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다시 사신 예수를 증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사망의 그늘 가운데 놓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증거를 통해 우리가 부활의 소식을 들었고 구원받아 하늘의 소망을 갖게 되었다. 부활의 주님을 정말 만난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오늘 받을 계란 까잡숫지 말고 꼭 전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전해 주길 바란다.
영국 에딘버리의 골동품 거리의 어느 상점에서 한 노신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구두닦이 소년이 들어왔다.
-할아버지 구두 닦으세요. 노인은 아무 말도 없이 계속 그림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소년이
-저기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노신사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구..? 노인은 자신의 지나온 삶을 회고하는듯 깊은 시름에 잠겼다. 그리고 그 가게를 나와서 뚜벅뚜벅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때 그 소년이 달려왔다.
-그런데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어요!

노인은 정신이 버쩍들었다.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구...?”
이 노인은 오랜 세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오고 있었지만 기쁨도 소망도 없었다. 삶의 무거운 짐에 눌려 피곤한 하루 하루를 살아왔던 것이다. 그의 평생에 예수님은 그의 마음 속에서 죽어 계셨던 것이다. 그의 삶은 무기력했고, 피곤했고, 상처 투성이었다.

그러나 구두닦이 소년의 외침을 들을 때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오랜 잠에서 깨어난듯 외쳤다. “오 주님, 당신은 살아나셨군요!” 그 노인의 얼굴이 밝아지고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한 구두닦이 소년의 한 마디로 그는 오랜 영적인 잠에서 깨어 났고 다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주일날이면 어김없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한다. “전능하사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 마음 속에 그리스도는 살아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심령 속에 생명력도, 소망도, 기쁨도, 감사도 잘 보이지 않는다. 고백은 입술의 고백일 뿐 감격 없는 삶의 반복일 뿐이다. 그것은 부활을 믿는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가?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렇다면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청산해야 한다. 냉소적이고 방관자적인 태도도 버려야 한다. 이제는 이 험악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사명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달라 붙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권면했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그 분은 바로 우리의 구원자시오 우리의 주가 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심령 속에 충만하여서 주에 일에 힘쓰며 헌신하는 복된 삶이 되기를 축원한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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