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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골고다에 오른 사람들 (막 15: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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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고난주간입니다. 고난 주간의 예수님의 행적을 살려보면
예수님이 오늘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고, 내일 월요일에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화요일은 유대인 교권자들과 문답하시면서 변론하시고, 수요일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고요히 쉬시면서 마리아에게 기름 부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목요일은 저녁에 유월절을 잡수시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하시다가 잡히셨고 그날 밤을 새우시면서 유대인 공회의 재판을 받으시고 금요일 아침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으신 후 골고다 위에서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에 요셉의 무덤에 장례되셨다가 돌아오는 주일 새벽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골고다에 오른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골고다는 예루살렘 교외 부근에 있었던 형장인데 이 골고다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아마 이 골고다에 오르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누가 죽음의 형장에 오르고 싶겠습니까? 누가 해골의 골짜기를 오르고 싶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싶으셨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전날 예수님께서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옮겨 달라”고 정말 간절히 기도를 하셨습니다. 분명 예수님도 인간적인 면에서는 골고다에 오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가 지어야 할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골고다에 십자가를 지시고 올라가셨습니다.
왜 회피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습니까?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까?

나이가 많이 드신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전도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따라서 6개월 동안 열심히 출석해서 학습을 받게 되었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학습, 세례 책으로 열심히 가르쳐 드렸습니다. 그런데 연세가 있으시다보니 시어머니는 배우면 까먹고, 또 배우면 까먹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학습 문답을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며느리는 학습 문답을 위해서 들어가시는 시어머니에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분명히 목사님이 어머니에게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냐고 물으시면 내 죄 때문에 죽었다고 대답하시면 되요. 알았죠? 내 죄입니다. 알았죠?”

시어머니가 드디어 문답을 하기위해서 목사님과 장로님들 앞에 앉게 되었습니다. 문답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십계명을 외워보라고 시키기도 하고, 성경의 몇 권이냐? 묻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목사님이 시어머니에게 묻습니다. “할머니!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 그랬더니 이 시어머니 왈 “예! 예수님은 우리 며느리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십자가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1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6)

그렇습니다. 멸망할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십자가를 보아도 아무 감격이 없습니다. 아무런 감사도 없습니다. 아무런 느낌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십자가는 우리의 삶의 중심이며 전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찬송하는 찬송 가운데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대에 나의 맘의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여러분 다른 것은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모르고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녀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모르고 은사를 받으면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버림받는 일꾼이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를 깨달으면 모든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감격을 맛본 사람은 구원의 감격을 맛본 사람입니다.

저는 중3때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수련회 때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그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죄송했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왜 예수님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내 죄 때문에, 내 죄 때문에” 컥컥거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십자가의 감격이 많이 무디어졌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도 감격이 없습니다.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묵상해도 눈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왜요? 심령이 무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대교회에 전도사로 있었을 때 유초등부 캠프를 갔었습니다. 얼마전에도 말씀을 드렸는데 정말 억수로 비가 오는 날에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둔내라는 곳에 갔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도한대로 하나님께서 날씨를 주관해 주셔서 마지막 캠프파이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캠프파이어를 하기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로마병정들이 뒤에서 채찍을 내리치면서 정말 리얼하게 연극하면서 운동장을 돌아 캠프파이어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로마병정들이 채찍으로 예수님의 몸을 내리치는 연극을 하고 예수님은 그때마다 십자가를 지시고 쓰러지곤 했습니다. 그때 용준이라는 꼬마가 울면서 “예수님을 왜 때리냐고 하면서” “예수님 미안해요. 예수님 미안해요.”하면서 십자가에 엉겨 붙어서 성극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말 십자가 크고 무거운 것으로 만들어서 십자가를 지시고 연극하는 집사님은 힘드셨는데 이 용준이라는 친구가 엉켜 붙어서 등이 다 까지는 사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모든 친구들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쫓으면서 선생님도 학생들도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함께 운동장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십자가를 바라보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정말 연극이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를 위해서 지신 십자가로 믿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번 주간 우리는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죄송하고, 또 감사한 마음으로 한 주간을 지내야 될 줄 믿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 태어나기 700년 전에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입니다. 예수님이 상하심은 나의 죄악 때문이고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셨기 때문에 내가 오늘 평화를 누릴 수 있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에 내가 오늘 모든 죄와 사망과 질병 가운데 나음을 입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원초적 신앙이 회복되지 못하면 우리는 생명력을 잃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원초적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그 십자가를 자랑하면 이것이 곧 능력이고, 구원이 되는 믿습니다.

골고다에 오른 사람 가운데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오른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구레네 시몬입니다. 여러분 아마 그날 아침까지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북방 현재 트리폴리라 불리우는 구레네에 거주한 유대인으로서 유월절을 지키려고 올라온 수많은 순례자의 틈에 끼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그는 예수님의 처형되는 광경을 구경하러 나온 수많은 구경꾼들 사이에서 그도 역시 구경꾼의 한 사람으로 골고다에 오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구경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참 안됐다. 왜 저렇게 살지! 이제 저 사람은 끝장이구나!” 그런데 이 구경하던 시몬에게 갑자기 로마 병사가 다가와 강제로 예수님이 지고 가시던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억울하게, 재수 없이 잡혀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의 저자는 “억지로”라는 말을 썼을 것입니다. 누가 대신 져주고 싶었겠습니까? 누가 그 죽음의 골고다를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시몬은 우연히 아니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힘겹게 올라갔습니다. 할 수 없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오른 구레네 시몬은 나중에 그도 신자가 되었고 그의 아들들도 저명한 성도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교회사에 정말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 구레네 시몬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성경 속에서 알레산더 이름은 사도행전 19장 33절에도 나오고, 디모데전서 1:20절에도 나타납니다.
또 루포는 로마서 16장 13절에서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라고 바울사도가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몬은 이미 죽었던 것 같고 그 아내는 바울이 “내 어머니”라 불렀다는 것은 시몬의 부인으로부터 바울은 모성적이며 신앙적인 사랑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고 또 루포에게 바울사도가 문안한다는 것은 벌써 로마의 저명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짐으로 인하여 그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고 또한 그의 아내는 바울의 신앙적 어머니가 되었고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와 루포는 교회에 중심적인 인물이 되는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가면 그것 또한 복이 될 줄 믿습니다.

어떤 분들은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말을 합니다. 마음이 없이 봉사하고, 마음이 없는데 억지로 하는 것이 은혜가 되겠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랐기에 그도 변화되고 그의 아내도 신앙의 어머니가 되었고 또한 그의 아들도 교회의 중심적인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마음이 안되면 억지로라도 하십시오. 여러분 기분 좋아하는 순종은 하고 싶은 순종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순종은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순종하는 것은 내가 더 많이 훈련받을 수 있고, 끝까지 잘 감당하면 내가 더 성숙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나외 내 집이 복을 받는 결과까지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여러분 이 말씀이 자원하는 마음 됩니까?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잘 안됩니까?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자녀에게 복이 됩니다.

제가 제일 고난 주간만 되면 사용하는 영어 단어가 No Cross! No Crown!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지면 또한 면류관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주 한 주간 고난 주간 특별기도회가 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참석하십시오. 그렇지 못하다면 억지로라도 참석하십시오.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셨던 것처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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