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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님이 오시면 (요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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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예수님 부활하셨는데

  사형장에서 사형수를 위해 늘 자비로운 기도를 해 주던 목사님이 새파랗게 질려 형장을 뛰쳐나왔습니다.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이번 사형집행은 전기 충격에 의한 것이었는데 목사님이 사형수에게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사형수 왈, “목사님, 제가 너무 두려우니까 제가 숨을 거둘 때까지 제 손을 꼭잡고 기도해 주세요.” 하더랍니다. 아무리 자비로운 목사님이라도 사형수의 손을 잡고 함께 죽을 수는 없었던 게지요. 죽음의 자리에도 고난의 자리에도 실패의 자리에도 영원히 함께 하실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그분이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우리 교회에 믿음 좋은 박집사님은 지난 몇 주간동안 힘들고 어려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주님 고난당하신 사순절절기를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내 죄를 걸머지시고 내 온갖 죄와 아픔을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죄 용서를 의심해 본적 없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도 물론 잘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는 내용들이 자신의 삶의 현실생활과 아무런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하는 데에 이 박집사님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지난 특새를 통해서 누구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았고 기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직장을 잃었던 남편의 취직 소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속썩이던 아이들의 성적이 갑자기 올라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지요. 영광스럽게 부활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내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 계신가?

  이 갈등은 박집사만의 갈등은 아닙니다. 본문 제자들의 문제였고, 오늘 우리 모두의 신앙의 맹점이기도 합니다. 오늘 부활 주일입니다. 예수님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부활절의 주는 축복과 의미를 엉뚱한 곳에서만 찾다가 실망하고 낙심하곤 합니다.

II. 또 찾아 오신다

  여러분은 부활의 주님을 어디서 만나십니까?

  오늘 본문 요한 21장 1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셨는데 여기 우리를 주목시키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그 후에” 라는 단어와 “또” 라는 단어입니다. 그 후에는 물론 요한복음 21장의 내용을 말한다고 하면 “그 전”은 요한복음 20장을 일컫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주신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0장 “바로 그 후에”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1. 부활하신 예수님 제일 먼저 무덤가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라도 발라드려야겠다 생각해서 향을 준비하고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네요. 무덤가에서 절망가운데 울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절망의 밤, 탄식의 밤에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환희의 아침으로 바꿔지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어떤 종교도 흉내낼 수 없는 사실이 있다고 하면 바로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소식입니다.

  많은 종교들이 기독교를 흉내내 보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신도시 내에도 불교사찰들이 많이 서 있습니다. 기독교가 도시와 거리의 종교라면 불교는 산사의 종교지요. 그런데 요즘 불교가 산에서 내려와 도심에 절간을 세우고 기독교 신앙을 모방하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니까 저들은 염불대신 찬불가를 만들어서 노래합니다. 우리가 성경학교를 하니까 저들도 아이들을 모아놓고 불경학교를 합니다. 주일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합니다. 저들도 주일마다 정기 예불집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방을 한다. 셀 조직까지 갖춰 논 모양입니다.  다 흉내를 낸다고 할지라도 흉내낼 수 없는 분명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천지를 창조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피조물입니다. 그는 무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부활하지 아니했습니다.

  어느 사찰앞에 성탄절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한다고 플랭카드를 붙이고 신문기자들을 불러대더니 부활절 「예수님 부활을 축하한다」고 붙이지는 못하더군요.

  예수님만이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절이야말로 우리 기독교만이 가질 수 있는 축제요, 기독교만이 가질 수 있는 역사적 사실 입니다. 때문에 이 부활주일은 기독교 여러 축제 가운데 최고의 축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천지창조가 없는 구원은 부도수표입니다. 부활이 없는 종교가 구원을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2. 부활하신 예수님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찾아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했습니다. 다락방 깊숙한 곳에 모여 앉아 무엇을 했습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했다. 무서워하고 있었다.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왜요?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로마 정부가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잡아들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터였습니다. 문을 닫아 잠궜습니다.

  걸어 잠근 것은 다락방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마음의 쇠빗장을 걸어 잠그고 앉아 있으니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두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문을 열어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우뚝 서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 오죽이나 놀랬겠습니까?

  누가복음 24장 37절에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젊잖게 표현해서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했지,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면 “귀신 아닌가? 질겁했다” 그 얘기입니다.

  이때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못박힌 손을 내밀어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이신 것을 확인하고 한편 기쁘기도 했지만 더욱 놀라웠습니다. 체면 없지요 면목 없지요. 주님께서 체포되던 그 시간에 제자들은 겁이나 뿔뿔이 도망갔습니다.  십자가에 신음하며 돌아가시는 그 자리에서 한번 마음껏 목놓아 울지도 못했습니다.  가냘픈 여인들과 이름없는 제자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례를 치루는 그 현장에 제자들은 얼굴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배신자들을 책망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꾸중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끝없는 용서를 안고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불안에 신음하는 제자들, 공포에 시달리는 제자들, 이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그래도 저들의 번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21절 “예수님이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제 제자들의 모든 과거는 용서되어졌습니다. 공포는 사라졌습니다. 두려움은 눈 녹듯이 녹아졌습니다. 의심의 먹구름은 깨끗이 끝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믿음을 잃어버리고 환란과 시련 가운데 불안에 떨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말씀을 듣고 살아가노라 하면서도 말씀의 능력을 상실한체 무력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주님 부활하신 이 시간에도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분 계십니까?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는데 죽음 소식이나 나누며 탄식을 늘어놓는 못난 제자들의 모습을 하고 이 자리에 계신 분 계십니까? 주님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3. 장사한지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12차례나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특별히 사도바울에게는 승천하신 후에 나타나셨습니다.

  고전 15:8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행9:15에서 주님께서 다메섹 지방에 있는 제자 아나니아에게 “아나니아야 사울이라는 청년에게 가라 가서 이 사람을 도우라 이 사람은내 이름으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사도 바울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비전의 사람들을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꼭 필요한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주님께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다. 교회와 천국에 유용한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III. 본문: 갈릴리 바다를 찾아 오시다.

  찾아오시는 예수님!

  그중 오늘 본문은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질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니 일곱명의 제자들이 한꺼번에 따라 나섭니다. 베드로 일행이 고기 잡으러 간 사실에 대하여 베드로가 타락했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갔을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깊이 묵상해 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가 함께 있을 때는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예수님이 친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나 지금 제자공동체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하는 이 상황속에서 저들에게 닥친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마 먹고 사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맏형되는 베드로에게 가장 큰 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영광스럽게 승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 제자들 곁에서 그들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부활이 제자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까? 세금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앞장서서 내가 한 번 해결해 보겠다고 나선 것이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고기가 전혀 잡혀 주지 않았습니다. 

  3절 마지막에 보면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여기 밤은 단순히 시간적인 밤만은 아니였습니다. 베드로 일행의 영적 상태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을 의심하는 것 아닙니다. 그것을 믿는다고 취직이 되던가요? 빛더미가 해결되던가요?  도산 만난 사업문제가 해결되던가요? 특새때 분명히 은혜를 받았지요. 그런데 그것이 내 삶의 현실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고 하는 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제자로서도 실패하고 고기잡는 어부로서도 실패한 밤이었습니다. 절망과 좌절이 엄습해 왔을 것이고 피곤에 피곤이 찾아왔습니다. 물고기조차 제자들을 비웃고 있는 듯 했습니다. 오늘 따라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그 시간들이 그리워집니다.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예수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의 슬픈 고백이지요. 예수 없는 인생의 허무를 얼마나 적절히 표현한 말입니까?

IV. 얘들아!

  이 본문은 5절 말씀으로 이어져 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얘들 같은 제자들, 예수님이 눈에 안보이면 안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눈에 안보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 나타나셔서 제자를 부르시는데 “얘들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친근한 호칭이지요. 그러나 이 말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하는 행동과 생각이 얘들 생각이고 얘들 신앙수준이라는 겁니다.  제자들, 부활하신 주님 믿었습니다. 그러나 내 곁에 아니계시고 안보입니다. 그러므로 내 직장문제, 가정문제, 먹고 사는 문제, 사회생활, 학교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겁니다.

  보십시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심판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며 부딪힐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가장 근본적인 문제, 가장 엄청난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하면 내 삶의 부활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예수꾼이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드릴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가 될 뿐입니다. 어떻게 부활의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적어도 제자들의 고민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고기 잡으러 간 것 잘못 아니지요. 이 세상에서 노력하며 땀흘리며 일하고 공부하는 것 잘못 아니지요. 그런데 문제는 예수없이 하겠다는 생각이 문제였습니다. 불신이지요. 조급함으로 달려갔습니다. 믿음으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하지 못했습니다.  실패자로 갔지 승리자로 달려가지 못했습니다.

  애들 생각을 버리십시오.

  실패의 밤을 지내고 계신 분 계십니까? 사업의 빈 배를 안고 목놓아 울어야 하는 분이 계십니까? 영적으로 비틀거리는 못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못마땅해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얼키고 설킨 문제 때문에 울부짖으며 나오신 분 계십니까? 지친 몸과 마음으로 나오신 분 계십니까? 실망과 좌절의 밤을 보내는 빈 그물을 들고 인생을 살아가시는 분 계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버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는 믿어도 소용이 없다고 깨끗이 포기하고 이제는 내 살 길이나 찾자고 생각하고 계신 분 계십니까? 바로 그 생각이 얘들 생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당신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보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좋은 것 주시고 싶어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더욱 더 사랑하신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무덤 속에서 예수를 찾지 말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제 얘들 생각 버리고 영적인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V. 예수님 찾아 오시면

  예수님 왜 찾아 오셨을까요? 아직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빈 그물을 들고 새벽바다 저어오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18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이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파도소리만 출렁 출렁 들려오는 갈릴리 바다에 고아들처럼 버려둘 수가 없어서 찾아 오신 것입니다. 외로운 제자들, 절망으로 예수를 떠난 제자들을 그냥 버려 두실 수가 없어서 찾아 오셨습니다.

  고독한 분이 있습니까? 망망한 바다에서 흔들리는 배 한 척처럼 아슬아슬한 삶을 사는 분이 있습니까? 아무도 나를 도와 줄이 없어 외로워 하시는 분들! 안심하십시오.  주께서 찾아오십니다.

  왜 찾아 오셨을까요? 우리에게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내려야 할 곳은 갈릴리 바다가 아니라 죄악의 파도가 넘실대는 예루살렘 거리였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도하고 성령 받아 거기서부터 복음운동 즉 사람 낚는 일을 시작해야 됩니다. 주님은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서 방황하고 있을 때 찾아오십니다. 내가 마땅히 할 일을 안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찾아 오십니다. 자기 사명을 회피하고 떠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오늘도 찾아 오십니다.

  왜 찾아 오셨을까요?  축복 주시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실패한 채로 버려져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찾아 오신 것입니다. 빈 그물 들고 살아가는 모습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 빈 그물 채워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직도 당신의 그물이 비어 있습니까? 주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찾아오신 예수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 이름은 구원의 이름입니다. 회복의 이름입니다. 축복의 이름입니다. 권능의 이름입니다.

VI. 오른편에 던지라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서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이어지는 6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오른편이 무엇입니까? 우선 시간적으로 다시 한번 그물을 던지라는 뜻이고 공간적으로 고기가 있는 곳을 찾아 그물을 던지라는 뜻이며, 정신적으로 보면 말씀에 순종하여 던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오른편은 대단히 상징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주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양과 염소를 갈라 세우시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양은 오른편으로 염소는 왼편으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여기서 오른편은 구원의 편이요, 왼편은 멸망의 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좌우편에 강도가 있었습니다. 왼편 강도는 멸망을 받았고 오른편 강도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발견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전도서 10:2에 보면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다”고 했습니다. 지혜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믿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기가 우편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자가 좌편이요 좌익입니다.

  시편 16:11에 보면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여기 영원한 즐거움은 천국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세상은 좌편이요 천국은 우편입니다.

  이와같이 성경은 언제나 오른편을 예수님편 구원의 자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갈릴리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주님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른편에 던지라는 말은 네 생의 방향을 전환하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사명도 버리고 천국도 버리고 예수님도 버리고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른편에 던지라? 이 말씀은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주님께 돌아오라. 너의 사명을 새롭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인생의 주사위를 예수님편에 던지라!? 말씀중심, 신앙중심, 순종중심으로 살아가라, 생의 방향을 전환하라는 것입니다.

  이 갈릴리 바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3년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여기서 베드로는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어부 가운데는 꽤 베테랑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물을 던지고 또 던졌지만 멸치 한 마리 피라미 한 마리 안 잡히네요. 어떤 분이 나타나셔서 깊은 물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에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습니다. 아하! 이 분은 구세주이시구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이로소이다. 고백하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때 베드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놀라운 한 구절을 성경기자는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으니라” 잡았던 고기도 버려두었고 그물도 버려두었고 배도 버려두었고 친구도 가족도 이웃도 다 버려두고 예수를 쫓으니라. 그리고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생계문제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옛날에 버려 두었던 것을 배설물 같은 것을 다시 붙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그 삶이 왼편의 삶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기를 만났기 때문에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자녀들 때문에 울어야 하다보니까 건강을 잃어버려서 이제는 신앙 그만두고 기도도 그만두고 말씀을 의지하는 것 깨끗이 포기하고 내 재주대로 세상 방법대로 한 번 살아보자고 작정하신 분 계십니까? 그게 얘들 생각이고 바로 거기가 왼편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만나고 있는 고난의 자리를 오른편의 삶으로 전환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이야말로 인생의 오른편을 선택하라는 하나님의 커다란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지금 내가 주어진 이 상황을 오른편으로 돌릴 절호의 찬스, 기회가 된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때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할렐루야!

VII. 인생 신기록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이요 은혜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고기를 잡았는고 하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153마리라. 153마리! 여기에 신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 신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지요. 153마리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숫자였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여러분의 인생의 신기록이 수립되기를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오늘 이후 여러분 인생에 대기록이 세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오른편으로 돌아온 사람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본문 11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다.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는 축복입니다. 고기가 153마리가 아니라 1,530마리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물이 찢어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복은 그물이 찢어지지 않습니다. 세상 그물은 고기가 잘 잡히지도 않거니와 걸핏하면 잘 찢어집니다.  그물이 찢어져 불행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업에 큰 축복을 받고 건강의 그물이 찢겨진 사람, 행복한 결혼을 하는 듯 하였으나 사랑과 가정의 그물이 찢어져 슬피우는 사람. 세상적으로 성공하는가 싶더니 인격과 행복의 그물이 찢어지고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출세했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신앙이 찢겨진 어리석은 인생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오른편에 던진그물, 주님께 순종한 그물, 예수님의 명령대로 산 그물, 신앙대로 말씀대로 산 그물, 그 그물은 찢어지지 아니합니다. 오른편으로 돌아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그 복으로 순종함으로 얻은 복은 그물이 찢겨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의 소식, 부활의 복음은 바로 당신의 것입니다.
  예수님 오십니다.
  예수님 오시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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