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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신비, 성장의 신비 (고전 15: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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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산이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 보이다가, 봄이 되면 싱싱한 푸른 잎을 피워내는 것을 보면서,“산이 다시 부활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부활’이라는 말을 세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첫째는 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바로 이 몸의 부활로서 믿고 있습니다. 둘째는 정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이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죽었지만, 그분의 뜻이 다시 살아난 것을 예수님의 부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활동을 일시 중지했다가, 다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죽은 듯 활동을 중지하고 있다가, 다시금 활동을 하는 것인데 그것이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모양을 지니는 것입니다. 봄이 되어 “산이 다시 부활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경우입니다. 나무의 몸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고 기온이 차가와지면서 그 활동을 중지한 것인데 기온이 따듯해져서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무도 완전히 죽은 나무는 봄이 된다 하더라도 다시 피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지만, 겨울에 활동을 중지한 나무가, 봄이 되어 다시금 푸른 잎사귀를 피워내는 모습을 가리켜서도 부활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의식 상태를 세 종류로 나눠서 이해합니다. 첫째는 얼음 상태이고, 둘째는 물 상태이고, 셋째는 수증기 상태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의 의식 상태는 액체 상태라 할 수 있는데 몹시 나쁜 경험을 하게 되면, 그것이 고체 상태로 얼어버립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입니다. 예컨대 부모로부터 학대받을 때, 엄청난 상처와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때, 몹시 두려운 일을 겪을 때 등과 같은 경우입니다. 우리들 주변에서 의식이 얼어붙은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식이 얼어버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기운을 받는 일입니다. 따뜻한 기운이란 바로 사랑입니다. 얼어붙은 상태는 따스한 사랑의 힘으로 녹아져서 액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액체 상태의 의식을 가진 사람은 부드럽고 수용적입니다.

이제 액체 상태에서 기체 상태로까지 발전하여야 합니다. 기체 상태는 더 이상 중력 법칙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곧 세상의 환난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자유한 존재이며 바람 같은 존재여서 그물에 걸리지 않고, 또한 어디나 자유로이 흘러갈 수 있습니다. 그는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어린아이 같은 환한 미소가 있으며 생명이 약동합니다. 기체 상태의 의식,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존재로 성장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겨울이 되면 나무가 죽는 것은 아니지만, 의식이 얼어버린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겨울나무에도 생명이 있지만, 그러나 생명의 감응이 거의 없습니다. 생명 활동이 중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봄이 오면, 다시금 생명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곧 얼음상태인 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액체나 더 나아가 기체 상태로 바뀌는 것이 바로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 앞에서도 생명의 부활을 보여주신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남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남겼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 영생을 남기셨습니다.

톨스토이는 부활이라는 그의 책에서“땅속에서 연한 새싹이 나오지 못하도록 돌을 깔고, 나오는 풀을 뽑아내도 그 풀의 생명은 다시 사나니, 생명의 힘을 막을 자 누구인가?”하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자연계와 생태계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부활을 계시하십니다. 굼벵이가 땅속에서 7년을 지내다가 어느 날 매미가 되어 푸른 하늘을 날며 사는 것을 볼 때 부활의 신비를 느낍니다.

생명의 신비, 성장의 신비

생명의 신비는 우리가 영원히 신비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나 자신이 생명인데, 내가 나를 모릅니다. 출생부터 신비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이 생명의 출생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또한 성장의 신비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저 젖을 먹이는 것뿐인데도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고 아버지 어머니를 고루 닮아서 자라납니다. 뼈는 뼈대로, 몸은 몸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날로 자라납니다. 성장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엄연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는 성장의 신비 역시 생명의 신비입니다. 자라나는 싹을 통해서 다 죽은 것 같은 동토(凍土)에서 움이 돋아나는 작은 생명체를 볼 수 있고 애벌레가 나비로 자라서 날개를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벌레였다가 잠자리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생명은 여전히 신비롭고 그 변화는 너무나도 놀라울 따름입니다. 생명이 사실이고 죽음이 사실인 것처럼 부활도 역시 사실입니다. 부활생명도 다음 단계로 향하는 사건이며 우리 앞에 놓여있는 엄연한 변화의 한 단계일 뿐입니다.

인류의 가장 큰 패배는 죽음

성경이 말씀하는 총 주제는 예수 부활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를 부활신앙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 제자들은 이제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고 다 잃어버렸다고 실망했습니다. 꿈도 야망도 다 무너지고 자기들도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골방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대로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자 저들은 비로소 용기를 얻었으며 확신의 사람들, 환희의 사람들이 되었고 특별히 죽음이나 불의나 악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부활신앙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은 것은 부활의 아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업이 의사인 어느 분이 부활신앙과 관련된 재미있는 비사(比辭)를 말해주었습니다. 모태에 있는 생명은 그야말로 근심걱정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없이 평안하고 좋기만 한 그 속에서 잘 자라납니다. 모태를 벗어나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출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출생이 모태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죽음인 것입니다. 그 좋은 곳에서 춥고 더운 곳으로 나오게되고 탯줄을 끊어버립니다. 죽음입니다. 출생했다고 기뻐해 주지만 실은 거친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태(胎) 속에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 탯줄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출발하게 될 때, 세상에서는 이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가장 위대한 승리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살리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절). 첫 열매가 있으면 계속해서 열매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장차 예수님 재림하실 때 다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았고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살립니다.

모든 노래 중에 가장 기쁜 노래, 가장 위대한 노래는 사망을 이긴 노래입니다.“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사망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 독침을 쏘고 독침은 십자가에 그대로 꽂혔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되어서 이김이 사망을 삼켰습니다.“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 사망은 지금까지 무엇이든지 삼켰습니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는데 이제는 오히려 사망이 삼킨바 될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사망을 삼킵니다. 놀라운 역전입니다. 그런 일이 예수님으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얼마나 가슴 벅찬 노래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육체가 죽어야 하는 오늘과 다시 사는 내일은 분명히 시간적으로 간격이 있지만 믿음으로 보면 오늘이 내일이고 내일이 오늘입니다. 간격이 없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그 날은 오늘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사는 자와 같이 살아야 합니다. 아니 이미 영생하고 있는 자 같이 살아야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이 오늘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을 것을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혹은 죽었다가 이미 다시 산 사람처럼 삽니다. 오늘을 보고 내일을 판단하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일을 알고 오늘을 사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밤 죽을 것을 모르고 창고를 지은 어리석은 부자는 불쌍합니다. 아무리 많이 쌓아두면 뭐합니까? 오늘 죽으면 헛일입니다.

먼저는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가 죽음을 이긴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믿은 것뿐이고 한 것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부활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며칠을 더 살기 위해 우리의 남은 재산이라도 다 내어놓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시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보다 더 귀한 선물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자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신앙을 도적질하는 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믿음이 없으면 믿음을 부인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고, 굳건한 믿음의 반석에 서도록 말씀을 묵상하고 배워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이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자

구원받기 위해 힘쓰는 것은 안타깝고 불쌍하기도 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구원받기 위해 금욕하며, 구원받기 위해 전도하고 구원받기 위해 선행을 한다면 불쌍한 것입니다. 그러나 값없이 구원받고 부활에 참여한 것 때문에 힘쓴다면 아름다운 일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힘을 써서 일한다면 참으로 장하고 잘하는 일입니다.

얼어붙었던 대지에 봄이 되면 싹이 나는 것도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새순이 나는 것도 모두 생명의 힘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이기고 반드시 승리합니다. 죽음을 이깁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어떤 죽음도 패배가 아닙니다.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하늘나라에 가는 관문일 뿐이며 주님 오시는 날에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는 준비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쁨이자 새로운 미래를 여는 소망

마틴 루터는 우리 주님은 부활의 약속을 책에만 기록한 것이 아니고 봄에 자라는 나무 잎마다 쓰셨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는 부활의 승리가 내 개인과, 우리 교회, 우리 사회 안에서 성취될 때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있고, 부활의 주님과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생활에서 진리가 뿌리내리고,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고, 생명의 존엄을 들어내고 살 수 있을 때 부활이 안겨주는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현실을 영원으로, 고통을 평안으로, 육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그리고 순간의 삶을 영생으로 이르게 한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나의 것으로 연결되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영광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철저히 낮아지시면서 값없이 인류를 향해 쏟아 부은 예수님의 고통 어린 사랑이었기에 해를 거듭할수록 강력한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기쁨이자 새로운 미래를 여는 소망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요동치고 있는 이 땅의 현실 속에서 부활절에 거는 우리의 소망은 더욱 절실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온 인류의 죄를 위한 것이었듯 부활의 소망 역시 모두에게 고루 제공되는 하나님의 은혜인데 누가 누구를 배제하며,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이에 만연된 대립과 갈등은 죽음을 뚫고 다시 사신 부활의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거되어야 할 낡은 옷에 불과합니다. 부활이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조금 넓게 생각하면, 지쳐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온통 부정적 기운에 휩싸여 있다가 긍정적 기운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부활은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부활의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열심히, 뜨겁게 기도하면서 경건의 삶을 사셨던 영암의 성도 여러분, 이제 부활의 영광도 함께 누립시다. 이 부활로 연합된 기쁨이 생명의 신비 속에 담긴 성장의 신비를 만끽하면서 여러분의 생명과 성장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절 기도(최효섭 목사)

그리스도여 당신은 오늘 나의 마음속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당신은 오늘 나의 관을 깨뜨리고 나에게 다시 생명을 주셨습니다. 무덤 속에 가득 찬 광명과 향기, 그것은 오늘 나의 영혼에 차는 소망의 기쁨입니다.

주여, 이 새봄에 나의 마음 밭에 오소서.
당신이 오시면 사람이 살고 당신이 오시면 어제의 슬픔이 가고
당신이 오시면 저 밝은 하늘 열리고
당신이 오시면 미움도 사라지고
당신이 오시면 마음과 마음 다시 만나고
당신이 오셔야 사람다운 사람, 남편다운 남편,
아내다운 아내, 자식다운 자식이 되겠습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여! 넘어져도 얼른 일어나게 하시고
먼지가 묻어도 빨리 털어 내게 하시고
미움을 품고 잠자리에 들지 않게 하소서.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굼벵이가 매미가 되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말랐던 뿌리에서 백합의 미소가 피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어두운 태에서 생명의 울음이 터지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사나운 소리가 들려도 너무 겁내지 말게 하시며,
꾸지람을 들어도 너무 낙심하지 않게 하시며
바람이 분다고 아무데로나 끌려 다니지 않게 하시며,
햇볕이 뜨겁다고 그늘만 찾지 않게 하소서.
갈 길이 멀다고 걱정만 하지 말게 하시며
지나온 길 되돌아보지 않게 하시고
어둠이 와도 외로워하지 않게 하소서.

몽치가 다가올 때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주님,
배반하는 제자에게도 위로의 시선을 던지시던 주님,
침 뱉는 자들도 용서하시던 주님,
십자가위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시던 주님,

오 주님!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내 가슴이 푸른 하늘이 되게 하시고
내 생각이 넓은 하늘 되게 하시며
내 영혼을 봄 동산으로 만들어 주소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시여,
나의 무덤을 헤치고 새롭게 태어날 힘을 주소서.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시고
미래를 설레는 흥분으로 기다리게 하시며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꿈꾸게 하시며
알지 못해도 소망으로 전진하게 하소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시여, 이 봄, 이 부활절에
나도 새 출발하게 하소서.

'두려워 말라’(마태복음 14:27) ‘
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 6:34)하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오늘 새 출발하게 하소서.

주님은 나의 선장이시오 진정한 후원자,
주님은 나의 모든 문제의 해답자 시오니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품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최후까지 나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
나도 오늘 부활하게 하소서 아멘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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