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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마의 고민 이야기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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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고민들이 있습니다. 어릴 때는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고민도 있고 어른이 되어서는 돈을 잘 벌지 못하는 고민도 있을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지 못한 고민도 있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고민도 있을 것입니다. 젊은 여자들에게는 좀 더 예쁘지 못한 고민도 있을 것이고 중년 여자들에게는 좀더 날씬하지 못한 고민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에게 “집사님의 고민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더니 자기의 고민은 남편이 신앙 생활을 잘하지 못하는 것과 부모님들이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올바르고 정당한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저는 가장 심각한 근원적인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믿어지지 않는 고민입니다. 남편이 믿어지지 않고 아내가 믿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심각한 고민일 것입니다. 부모가 믿어지지 않고 자식들이 믿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심각한 고민일 것입니다. 목회자나 교회가 믿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심각한 고민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심각한 고민은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고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 고민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는 고민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도마가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심각한 고민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도마와 같이 믿어지지 않는 고민을 지니고 불행하게 사는 신자들 특히 남 신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도마의 믿어지지 않는 고민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 도마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또한 유대인들의 박해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머무신 후 베다니로 향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류했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요11:8).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해서 베다니로 가자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를 깨우러 가노라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11:11,14,15).

  이 말씀에 대한 도마의 응답은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 이 말이 용기 있는 말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불신앙과 자포자기와 절망의 말이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자포자기하고 절망하고 맙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도마의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도마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말이다. 예수께서 방금 신앙 연단을 위하여 난관과 시련의 필요를 역설하셨는데, 그는 말하기를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였다. 그것은, 난관과 역경 가운데라도 주님과 함께 가면 통과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알지도 못했다.”

  도마는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가면 모든 환난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도마의 근원적인 고민이었습니다. 도마는 참으로 불행한 제자였습니다. 결국 도마는 ‘자포자기의’ 사람이 되었고 ‘절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믿어지지 않는 고민을 지니고 ‘자포자기’하며 불행하게 살아가는 형식적인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도마는 하늘에 아버지 집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베푸신 다음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그러나 도마는 하늘에 아버지 집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만 보이고 하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14:5). 

  도마는 박윤선 목사님이 지적하신 대로 영적으로 ‘둔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믿으려고 하는 마음도 갖지 않은 ‘완고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지만 믿으려고 하는 겸손한 마음과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지니게 되는 마음과 영혼의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에 집착하거나 자기 자신에 집착하거나 땅에 집착하는 ‘완고한’ 사람은 믿음을 가지기가 힘이 듭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항복하면서 주님 발 아래 겸손히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가지기가 힘이 듭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훌훌 다 털어버리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가지기가 힘이 듭니다.

  도마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고 ‘완고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도마는 하늘에 아버지 집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다가 죽게 되면 세상을 떠나 하늘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간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회의적으로만 보였습니다. 그것이 도마의 근원적인 고민이었습니다. 도마는 참으로 불행한 제자였습니다. 결국 ‘완고한’ 도마는 절망의 사람이 되었고 회의의 사람이 되었고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믿어지지 않는 고민을 지니고 절망적이고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삶을 살아가는 불행한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도마는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십자가도 부활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도마는 ‘반항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사건 후 도망갔던 열 한 제자들은 다시 돌아와서 한 곳에 함께 모여 앞 날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도마는 혼자서 다른 곳에 가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반항적인 방황’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유 없는 반항이었습니다. 부모가 믿어지지 않을 때 아이들이 반항하는 뜻으로 가출하는 것처럼, 도마는 예수님과 관련한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도마는 가출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도마는 가출한 후 그래도 다른 제자들의 소식이 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제자들 몇 명을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나무 밑에서 만났는지 길가에서 만났는지 주막에서 만났는지 잘 모르지만 하여튼 가출했던 도마는 몇몇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동료 제자들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서 열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요20:25). 그러나 이에 대한 도마의 반응은 여전히 부정적이었고 ‘반항적’이었습니다.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I will not believe.”  이것이 도마의 부정적이고 ‘반항적인’ 반응이었습니다. “I will not believe.”

  얼마나 서글픈 고백이었는지 모릅니다. 일 주일쯤 전에 사도 베드로가 비슷한 말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I do not know the man.”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26:72).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도마가 “나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라고 떠들면서 반항을 했습니다. 얼마나 서글픈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주님을 슬프게 만든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요 고민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 그래서 반항하기까지 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요 고민입니다. 이것은 또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근원적인 슬픔이요 아픔이요 고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셨고 예수님께서 우셨고 성령님께서 탄식하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종들인 목회자들의 근원적인 슬픔이요 아픔이요 고민이기도 합니다.

  도마는 아무 것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시려고 가시는 주님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아버지 집을 가리켜 보여주시는 주님의 모습과 말씀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동료 제자들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도마의 근원적인 문제와 고민이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이와 같은 믿어지지 않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포자기와 회의와 냉소와 반항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형식적인 신자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형식적인 신자들의 고민이고 목회자들의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이 우셨고 김치선 목사님이 우셨고 한경직 목사님이 우셨습니다. 저도 요사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울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도마의 고민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지고 마무리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도마의 고민 이야기는 두 고민자들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마무리되었습니다. 고민의 벼랑에 갔던 도마가 ‘집’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요20:26). 또 다른 고민자이신 예수님께서도 믿지 않겠다고 반항하던 도마를 찾아 ‘집’으로 오셨습니다.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저는 그 ‘집’을 만남의 집, 기도의 집, 회개의 집, 예배의 집,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제자들과 도마가 ‘집’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집’에 찾아오셔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곧 도마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 가락을 이리 내 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 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예수님께서 여드레를 지나서 만남의 집으로 찾아오신 것은 도마를 만나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도마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자포자기와 회의와 냉소와 반항 가운데 있던 자기를 찾아오셔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서 도마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결국 도마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두 손 들고 항복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떨면서 울면서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

도마는 길고 긴, 캄캄하게 어두운, 불신앙과 고민의 터널을 지나, 이제 항복과 믿음의 종착역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불신앙과 고민과 불안으로 파도 치는 험한 바다로부터 믿음과 평강의 항구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아주 간단한 신앙 고백을 했지만 그 신앙 고백은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는 위대한 신앙 고백이 되었고, 예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위대한 신앙 고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도마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도에까지 가서 전도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고 인도 교회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도마의 고민 이야기는 도마의 순교의 이야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근원적인 고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전하기 위해서 생명을 바치며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어디에서 옵니까? 믿음은 예수님을 만남에서 옵니다. 2천년 전에는 예수님을 눈으로 몸으로 만났지만 지금은 예수님을 눈으로 몸으로 보고 만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예수님을 지금은 영적으로 만납니다. 때로는 영음이 들리기도 합니다. '길선주야' 라고 부르시는 영음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을 영적으로 만나면 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바로 이 자리에도 함께 계시는 부활의 주님을 영적으로 만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오셔야 내가 주님을 만나고 내가 주님께로 돌아가야 내가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여야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것처럼 우리들도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믿는 것이 우리 인생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고민자가 되지 마시고 믿어지는 행복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탄식하신 일이 있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회개와 믿음을 지닌 자는 천국으로 가게 되고 회개와 믿음을 지니지 못한 자는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성령의 도우심으로 회개와 믿음을 지니고 살다가 모두 천국으로, 하늘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다 올라 가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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