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그가 살아나셨다 (눅 24:13~23)

  • 잡초 잡초
  • 174
  • 0

첨부 1


⊙본문말씀⊙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설교본문⊙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이 시간 서로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예수 부활하셨습니다”,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총출석주일입니다. 오랜만에 함께 예배드리는 고척가족들을 환영합니다.

시간의 소중함을 이렇게 표현한 글이 있습니다. ‘1년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대입을 다시 준비하는 재수생에게 물어 보십시오. 한 달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한 달 일찍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는 아기를 가진 엄마에게, 한 주간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주간 신문 기자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한 시간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이에게 물어 보십시오. 1분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간발의 차이로 기차를 놓쳐 버린 사람에게 물어 보십시오. 1초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아차하는 순간에 목숨을 잃을 뻔한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1/100초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은메달에 그친 숏트랙 선수에게 물어 보십시오.’그러나 이런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물어 보십시오.’ 부활의 영광이 교회 안에 가득하고 부활의 생명과 축복이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에 일어난 일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잘 따르던 두 사람이 고향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고향 떠나 성공하고 의기양양해서 금의환향하는 것이 아니라, 침울한 가운데 낙향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17절 말씀은 그들의 얼굴은 슬픈 빛을 디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마음 역시 먹구름 상태였을 겁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그들이 따르던 나사렛 예수, 그분이 며칠 전 아무 반항도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믿고 따랐기에 너무나 허무한 일이었습니다. 세상적인 희망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여러분도 믿었던 사람으로 인해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기대가 산산 조각나는 것이고 만사가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구멍 뚫린 심정입니다.[이동국 선수, 그라운드에서 혼자 넘어져 인대 파열하여 꿈에도 그리던 독일월드컵 눈앞에서 포기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안됐습니다. 이 선수는‘나 대신 울어준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허무한 것이 아니라 허무맹랑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두 눈으로 십자가에서 고통하며 돌아가신 것을 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몇몇 여인들이 무덤에 갔다가 빈 무덤을 보았다고 하고, 천사를 보았다고 하고, 누구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마음이 복잡하고 무거운데, 죽은 사람 살아났다는 흉흉한 말이 들리니 정신이 혼미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낙향하고 있는 그들에게 어느 덧 다른 한 사람이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점잖은 그분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풀어서 차근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눈이 가려져 보지 못했으나 점잖은 그분이 바로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두 사람의 마음속에 드리워져 있던 낙심과 실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황사 걷히듯이 걷혔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어떤 기운이 들어 온 것입니다. 어떤 말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던 것입니다. 의심이 확신으로, 불안이 평안으로, 낙심이 희망으로 변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가던 길을 돌이켜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이 결과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도망치고 피하고 싶은 죽음의 도시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부활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무자비한 로마군대가 지배하고 교만하고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득실거리는 그런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의 주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헸던 구원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차가운 상태로 내려갔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뜨거운 상태가 되어서 다시 올라갔습니다.

본질적으로 사랑은 차가운 것이 아니라 뜨거운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하게 되면 차거워지지 않고 뜨거워집니다. 성경은 분명히‘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의 체험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성령이 임하시면, 은혜가 다가오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런 놀라운 체험이 새롭게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유리 가가린이라는 소련의 전설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1961년 4월, 27살에 우주선을 타고 인간 최초로 1시간48분 동안 지구를 돌았습니다. 평범한 시골 목수 아들로 태어남. 제철공이 되려다 비행학교에 입교, 전투기 조종사가 된 후 3,000대1의 경쟁 끝에 우주비행사가 되었습니다. 우주비행하고 인터뷰에서 “내가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에서 우주를 보았는데 하나님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였고 무시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꾸 올라가다가 젊은 나이에 전투기 추락사고로 나이 34세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우주비해사 중에 글렘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아주 믿음 좋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내가 우주에 나가 봤더니 하나님의 숨결이 우주에 가득하더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였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우주 비행하고 싶다”고 고백하였고, 그의 나이 77세 늘그막에 다시 최고령우주비행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구 한구석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부정한다고 안 계시는 분도 아니고, 무시한다고 작아지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생명의 근원되시고 구원의 아버지 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의 아버지입니다. 그분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시어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동굴에 지금도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거기 작은 문 앞에 팻말에 “그는 여기 계시지 않는다” (He is not here)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둔 무덤 속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 아래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살아 나셨습니다. 무덤에 계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부활의 영으로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집에 가셔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주여 그러하외다...내가 믿나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믿느냐?’ 하지 않고, ‘이것을 네가 믿는냐?’고 아주 명쾌하게 물으셨습니다. “예 제가 믿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믿어야 하는 사건이다. 주님의 부활은 과시용이나 전시용이 아니라 믿음용입니다. 내가 믿을 때 내게 부활의 능력과 축복과 정신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흔들림 없이 살아가도록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정신을 우리 가운데 넣어주십니다.

세상에는 무서운 사람들이 3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죽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의 고백을 한 에스더와 같은 사람입니다. 셋째는 죽음 너머에 영생이 있음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 바로 부활의 정신, 부활의 능력을 소유한 바로 우리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전서 15장 22절 말씀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부활에는 실망과 절망을 넘어 희망과 소망으로 나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부활에는 의심과 회의를 넘어 확신과 열정으로 나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부활에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넘어 영생으로 나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부활에는 갈등과 분열을 넘어 용납과 화해로 나가게 하는 능력이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