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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전하는 공동체 (창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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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지난 한 주동안 참으로 수고가 많았다. 150여명의 목회자들을 잘 섬겨 주었다. 우리는 많은 목회자들에게 제자훈련의 spirit을 심고저 하였고 함께 충성을 다하였다. 다락방과 제자반을 열어 주어서 참석한 목회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음식과 사랑으로 섬겨준 많은 봉사의 손길들에게도 큰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5월1일에 개최될 단기선교학교에도 많이 참석해주기 바란다.

오늘부터 창세기 강해설교를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보여주고 있다. 시작의 역사중 하나님의 창조계획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꿈과 가슴을 사람들에게 주고 또한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일을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고 싶어 하신다. 창세기 설교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바란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꿈을 이루지 못했고, 가인은 아벨을 죽임으로 하나님 앞에서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고, 노아시대는 온갖 죄악이 관영했고 어두움이 가득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이런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이 항상 있어왔다. 아벨과 에녹과 노아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홍수 이후에 다시 하나님께 반항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나온다. 곧 바벨탑의 사건이다. 11장의 전반(1-9절)에서는 바벨탑 사건이 나오고 있지만, 후반(10절이후)에는 아브라함의 등장이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께 도전하는 어리석음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상충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이같이 한 가문과 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의 흐름을 역전시키시는 분이다.

바벨탑 사건 당시에는 모든 언어가 하나였다. 4절을 보면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였다. 하늘의 하나님을 도전하는 자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자신들도 신처럼 높아질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을 드러내려는 자들의 모습이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보시려고 강림하시는 아이러니가 있다. 인간들이 만든 반항의 project 를 보시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하나님은 이들의 모습을 비웃고 계셨을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보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비행기를 타고 조금만 높이 올라가면 인간들의 모습에서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혜로운 자들이 자신들의 지혜로움을 자랑하지 말고 부유한 자가 그 부유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우리는 자신의 것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고 그 분을 찬양해야 한다. 바벨탑을 쌓던 인간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흩어지고야 만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들을 구속하신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귀한 것은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에 대적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허용된 범위를 넘어서면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시는데 이것을 무시하니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가인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인간을 죽이고, (노아시대에는)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마음대로 취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셨다. 에이즈 질병으로 죽어가는 그룹의 대부분은 동성연애자들이다. 물론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성연애자들도 사랑하신다. 하지만 그들이 저지르는 ‘동성연애’라는 죄악을 미워하신다. 동성연애는 처음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반항의 죄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경계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했던 역사상 모든 제국들이 예외없이 멸망했다. 소련만해도 당시의 Superpowered Nation이었지만 그들의 정권과 정치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았더니 그냥 무너져 버린 것이다. 독재자 느부갓네살은 그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으려하니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후에 때가 차고 회개하니 다시 회복되고 오히려 더욱 차고 넘치게 되었다. (다니엘4장28-37절) 하나님은 이같이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바벨탑 사건은 죄악의 가장 근본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바벨탑 사건이 아브라함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라. 하나님은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사용하셔서 이 상황을 역전시키신다. 인간의 타락한 모습이 적나라할 때에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신다. 10절 이후로 등장하는 노아 후손들의 족보 속에 이제 아브라함이 보이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꿈과 Kingdom을 결코 접으시는 법이 없다.

(1)우리는 역전의 공동체(Christian Count Culture)가 되어야 한다. 복음의 언어를 갖추고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직접 찾아 오셨다.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하는 것이 죄악의 시작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자리에 찾아오는 것이 은혜와 회복의 시작이다. 바벨탑 사건 이후에 저주와 심판의 언어가 지구상에 흩어졌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베푸셨고, 결국 죄악과 저주로 어두워진 세상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회복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언어를 주신 것이고 언약의 언어를 주신 것이다. 스가랴 선지는 바벨탑 사건 이후에 열방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며 일심으로 섬기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입술이 깨끗하게 된 후에 사용할 새로운 언어는 복음이다. 오순절 때에 마가 다락방에 불같이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 그들의 입술에 새로운 복음의 언어를 주시고 그들이 방언으로 말할 때에 비로소 모든 상황이 역전되었던 것이다. 복음의 언어, 그리스도의 피묻은 언어, 십자가로 내 심령을 깨끗하게 하신 언어, 나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언어, 이 언어로 우리를 새롭게 하셨고 회복하셨다.

(2)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왜 인간은 바벨탑을 지어서 하늘에 이르고 싶어했나? 예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들을 높여서 스스로 예배의 대상이 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모르는데서 비롯되는 부작용이다. 고기가 물 속에서 살지 않고 땅에서 살고 싶어하는 순간 그의 생명은 끊어지게 된다. 우리가 살아야 할 공간은 예배이다. 그 안에는 삶의 스릴이 있고, 능력과 이적과 치유가 있고, 기쁨과 찬양이 있는 것이다. 모든 인류는 예배를 위해서 지음 받았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역동적인 예배를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의 목숨과 인생을 다 드려서 예배할 대상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한다. 전도를 잘 하기 위해서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예배의 영광이다. 형식적인 예배, 지루한 예배는 전도의 장애가 된다. 대부분의 초신자들은 예배의 영광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섬기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자녀들이 일주일동안 세상 속에서 살다가 단 한번의 예배에 all-in할 수 있다면 그들은 변화될 수 있다. 자녀들이 예배에 all-in할 수 없다면 그들은 분명히 다른 곳에 all-in하게 될 것이다. 예배에 그들의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으면 다른 곳에서 죄를 지을 힘이 없어질 것이다. ‘병아리’라는 시에 이런 말이 있다. ‘물 한 모금 머금고 구름 한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 머금고 하늘 한번 쳐다본다.’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늘 예배해야 한다.

(3)사람을 세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바벨탑 사건 이후에 전개되는 족보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세워지고 그 이후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보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워질 때에는 세상의 어두움이 사라진다. 성경을 읽을 때에 특별히 감동이 되는 단어가 하나 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말씀은 ‘너만 제대로 세워지면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이 너로 말미암아 새롭게 펼쳐질 수 있다’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흑암 속의 세상이 ‘너 하나님의 사람’때문에 회복되고 새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오순절 다락방의 사건까지 어떻게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었나?
그들은 먼저 기도하였고, 말씀을 상고하였고, 하나님의 사람을 세웠다. 특별히 그들은 맛디아와 같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다. 때가 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공동체로 세워졌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 되었다. 훈련은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일이다. 복음을 알고 예배가 회복되며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세워지면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 분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대지’라는 소설을 기초로 만든 영화를 본 적이 있다. 30년전에 본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메뚜기 떼의 습격을 받아 모든 곳이 황폐해 가는 가운데, 주인공(왕농)의 농장에도 메뚜기 떼가 근접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담하여 주저 앉아 있을 때에 왕농은 곡물을 모우는 등 대책을 세우려 애쓰지만 곧 메뚜기 떼의 습격을 받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메뚜기 떼를 대항하여 싸우다가 한명 한명 쓰러지는데 이 때에 기적적으로 거대한 태풍이 몰려온다. 태풍을 맞은 메뚜기 떼는 모두 흩어지고 무력화 되었다. 왕농은 하늘을 향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거대한 태풍에 감사하는 왕농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100년전에 Azusa와 평양에 허락하신 성령의 태풍을 기억한다. 이제 다시한번 성령의 역사가 임하셔서 이 땅을 회복하실 그 날을 기다린다. 우리 모두가 이 시대에 거룩한 역전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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