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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배나 존경하라 (딤전 5: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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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시는 모든 선생님들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각 팀을 맡아서 수고하시는 팀장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 여러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능력을 주시고 지혜와 사랑을 주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과연 그럴까 싶기도 하고 스스로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처럼 그렇게 깊은 수렁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왜 이런 일을 맡아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능하게 하시고 나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다고 했으니 우리는 오직 아멘하고 따를 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멘하고 따른다고 하지만 내가 정말 자격이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다 내려놓고 도망치고 싶은 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은 선생님 주일입니다. 선생님 주일을 맞아서 앞서서 다스리며 가르치는 모든 분들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회의 어른들은 잘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장로라는 말은 말 그대로 나이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다 장로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장로라고 할 때는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지도자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하면 잘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곧 리더십이 좋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지도자라면 마땅히 리더십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리더십이 좋은 것일까요?
무엇보다 먼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라면 마땅히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럴 때 억지로가 아닌 마음으로부터 따라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따르는 사람들의 형편과 사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지금 어떤 형편에 있는지 그 사정은 어떤지를 바로 알 때 그 마음 마음들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대방의 형편과 사정을 아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형편과 사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마다 나타나는 반응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 똑같은 입장에서도 때에 따라서 반응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사람들을 이끌어 간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은혜와 진리로 함께 하여 주셔야 하고 성령께서 그 길을 잘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따라서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고 사랑으로 차고 넘쳐야 합니다. 아울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이요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섬기는 자세로 살아갈 때 따르는 사람들을 잘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생이 되어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처럼 너희도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마땅히 앞서서 이끄는 사람들이 이렇게 섬김의 자세를 갖추게 될 때 따르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따를 수 있지를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과 선생님들은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내게 부족함은 없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요 따르는 사람들과 밑에서 배우는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 된 저와 교회의 지도자가 되시는 모든 분들과 선생님들이 항상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따르는 이들을 또 잘 살펴서 서로가 서로를 섬기며 붙들어주고 세워주는 귀한 역사가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여야 합니다.
마땅히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먼저 잘 다스리도록 하여야 하고 더 나가서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여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생명줄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없이는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알고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될 때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못하면서 따르며 배우는 이들에게는 하라고 한다면 이는 모순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도록 항상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여야 하고 그래서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될 때 내가 깨달은 바를 전할 수도 있고 가르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디모데 후서 2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대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나에게서 들은 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먼저 앞에서 전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듣고 깨달은 바를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 혼자서 말씀을 알고 깨닫고 은혜 받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내가 듣고 깨달은 바를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어야 하는 것이요 그래서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들이 단지 말씀을 듣고 배운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어 보니까 아주 맛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음식 정말 맛있더라.” 하고 전해 주어 그 사람도 가서 먹어보니 정말 맛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야 누가 그 음식 맛있다고 해서 가서 먹어 보았더니 정말 맛있더라. 너도 가서 먹어 봐”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받은바 은혜를 간증도 하고 묵상하고 깨달은 바를 서로 나누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나는 이렇게 은혜를 받았고 나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깨달았고 이렇게 해 보니까 되더라.” 하고 전해 주게 될 때 그 말을 전해들은 사람이 또한 그 전해 준 말씀을 따라서 자기도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고 또한 그 말씀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도자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이렇게 말씀 안의 경험이 있어야 하고 내가 경험하고 내가 깨닫고 내가 은혜 받은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전해주고 가르쳐 준다고 해서 상대방이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정말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고 어떤 경우에도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처음 한글을 배울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나다라를 계속해서 쓰고 또 쓰게 하지를 않습니까? 그러면서 한 글자 한 글자를 배워나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글자들을 연결해서 단어가 되게 하고 그 단어가 무엇을 말하는 가를 끊임없이 가르치지를 않습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합니까? 배우는 사람이 그것을 바로 깨닫고 써먹게 될 때까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까?

그러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때 나타나는 반응을 보십시오. 어떤 때는 신이 나서 잘 배우고 따르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에 보면 전혀 아닌 것 같은 모습을 보일 때 얼마나 낙심이 됩니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해 버립니까? 어린아이가 처음 대소변을 가리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대소변이 마려우면 말하라고 해도 그것이 그렇게 쉽게 됩디까? 그러나 끊임없이 아이를 가르치고 가르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점점 실수가 줄어들기를 시작하다가 이윽고는 완벽하게 대소변을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요구르트를 빨대를 가지고 빨아먹을 수 있게 되기까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봐 하고 어머니가 빨대를 가지고 요구르트를 빨아먹는 모습을 보여주어도 아이는 그것을 제대로 따라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또 하고 또 가르치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가 빨대를 통해 요구르트를 빨아댈 수 있게 되고 한 번 두 번 빨다보면 이윽고는 아주 익숙하게 빨대를 사용하게 되는 것처럼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이 또한 그러합니다. 나는 알고 나는 깨닫고 있지만 상대방은 아직 어려서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려고 해도 자꾸만 딴청을 하고 자꾸만 그 자리를 피해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럴 때 정말 속이 터지지를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말씀을 전해주고 말씀을 가르쳐야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드디어 말씀의 은혜를 깨닫고 아하 이런 거였구나 하고 깨닫게 될 때 그래서 말씀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될 때의 기쁨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삼년 반 동안이나 함께 생활하면서 계속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지만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이들이 제대로 배운 사람일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될 때 그 동안 주님께서 가르치셨던 모든 말씀들이 살아서 움직이게 되지를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단순히 말씀만 전하고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말씀의 사람이 되도록 위해서 그들 안에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위해 또한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지식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성령 안에서만 깨달을 수가 있고 성령 안에서만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지도자들과 선생님들은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이요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서 살아가며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들이 다 되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또한 많은 말씀의 사람들이 세워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잘 다스리고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존경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수고를 인정하고 또한 그들의 이끄심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앞에서 이끌어 가는 방식이라든가 이끄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또한 반발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하고 원망하게 되면 이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겨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서 이끄는 사람뿐 아니라 따르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서서 이끄는 분들뿐 아니라 따르는 사람들 모두가 무엇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를 먼저 살펴야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이끌고 따르게 될 때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지게 되고 화평한 천국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게 될 때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고 믿는 무리가 날마다 더하여졌던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특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이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했으니 전하는 말씀과 가르치는 말씀을 따라 순종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백성들이 그대로 순종하게 될 때 그 명하신 대로 다 이루어진 것을 보고 보세가 백성들을 축복하였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놀라운 은혜와 복을 더하여 주셨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앞서서 이끌며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분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 하면 먼저 그 인도하며 전하고 가르치는 말씀을 잘 받아 들여야 하고 기쁨으로 배우도록 하여야 하며 항상 아멘으로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요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니 마땅히 수고하는 이들에게 순종하며 존경하기를 먼저 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따르고 또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공급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중보기도하고 옆에서 붙들어주는 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가르치고 이끌며 수고하는 이들은 따르며 배우는 이들을 잘 다독거릴 수 있어야 하고 배우며 따르는 분들은 앞서서 이끌며 가르치는 분들이 마음 상하지 않도록 항상 순종함으로 격려하고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그 가르침을 받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가르치는 이들의 입장에서 가르침을 받는 이들의 형편과 사정을 알 때 그 마음이 약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권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도자인 것이요 선생님들입니다. 그런데 남의 사정은 생각하지도 않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할 때 앞서서 이끄는 분들은 그 마음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또 나름대로는 열심을 내어 수고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일이라고 하느냐고 한다면 정말 견딜 수 없는 아픔입니다. 기억할 것은 따르는 이들보다 앞서서 이끌어가는 것이 배나 더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뒤에서 따르는 이들과 가르침을 받는 입장에서는 그냥 모른 척 주저앉아버릴 수도 있지만 앞에서 이끌어가며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결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섭섭한 마음을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 정말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어디 한 두 번이겠습니까? 그래서 옆에서 중보기도하고 옆에서 붙들어주는 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서서 수고하는 이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고 특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이들을 더욱 그리하라고 했으니 이끄는 대로 따르고 가르치는 대로 아멘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 모습이 가장 큰 격려요 힘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물론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건 아닌데 싶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시고 그건 틀렸다고 하기 보다는 내 생각에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어떻겠는가 의견을 전해주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다 좋은 길로 우리 모두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특히 세상일과 달리 교회 안에서 다스리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에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과 모든 좋은 것으로 함께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말로 앞에서 이끄는 분들과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분들을 격려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섬기고 대접하도록 하십시오. 그럴 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게 되고 교회는 날마다 믿는 이들이 더하여 넘치게 되는 귀한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섬기며 대접하며 순종함으로 따르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타작마당에서 낟알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앞서서 다스리며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분들의 모든 수고가 더 힘 있게 이어질 수 있도록 어떤 경우에도 불평하지 마십시오. 원망하거나 시비하지 마십시오. 오직 기쁨으로 섬기시며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격려하고 칭찬하여 주십시오. 그럴 때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복이 되고 우리 가정의 복이 되고 우리 자녀들의 복이 됩니다.
아울러 앞서서 이끌어 자시는 분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아니면 어떤 형편에 처하든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낙심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선생님 주일을 맞아서 수고하시는 선생님들 각 팀장님들께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감사의 말씀들을 전하시고 좋은 것으로 그들 모두를 섬겨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 불평과 귀에 거슬린 말들이 들려질 지라도 앞서서 수고하시는 분들 가르치기 위해서 수고하시는 분들 결코 낙심치 마십시오. 다 때가 이르매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향남교회가 앞서서 수고하며 가르치는 분들뿐 아니라 뒤따르며 배우는 모든 분들이 다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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