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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본에 충실합시다 ③ 영혼의 노래 (행 16: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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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에 충실합시다 ③ 영혼의 노래  행16:19-32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가끔씩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됩니다. 혹은 육신의 질병으로, 혹은 물질적인 어려움으로 혹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아픔으로 더 이상 어찌 해 볼 수 없는 그런 막다른 골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병원에서 건강진단을 받았는데, 말기 암이라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업을 하다가 벽에 부딪혔습니다. 빚 갚을 능력도 없고, 더 이상 돈을 빌릴 곳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일들을 당하게 되면 어떤 이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아예 다 외면하고 산으로 들어가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생 자체를 포기하고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일 이런 일들이 여러분에게 일어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000년 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한 귀신들린 여종을 만났습니다. 그 불쌍한 모습을 보다 못한 바울이 귀신을 쫓아내고 그 여종을 자유케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못된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발해서 빌립보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본문 22-24절 말씀입니다.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생각해 보십시오. 낯선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다 죄인이라고 뒤집어씌우고 또 그 이야기를 듣던 관리들은 물어보지도 않고 옷을 찢으며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때리고 게다가 초죽음이 된 사람을 그리고도 부족해서 그 발에 착고까지  채워놓았습니다. 고문 전문가들은 사람을 고문할 때 먼저 인격에 심한 모멸감을 주면서 스스로 자기를 지키는 것을 포기시키는 심리적인 방법을 먼저 사용한다고 합니다. 더구나 이 뜻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주어진 고통과 아픔보다도 바울 일행은 모멸감과 억울함 그리고 분함이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진행 중인 길에서 복음전파의 길은 여기에서 끝이 나는가 하는 두려움이 그들 속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런 억울한 옥살이, 언제 나가게 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를 막막한 순간에, 바울과 실라는 무엇을 했습니까? 억울하다고 소리쳤습니까? 그 불쌍한 여인을 공연히 도와주었다고 후회했습니까? 자기를 감옥에 가둔 저 못된 사람들을 원망했습니까? 주님 위해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은 왜 이리 어려움을 주시는가 하고 불평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고난의 밤에 그들은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런데 그 절망의 환경 가운데, 어떻게 보면 절망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그 자리에서 그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어떻게 이일이 가능 할 수 있었겠습니까?

첫째, 저들은 고난가운데서도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 그리고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잘 아는 바와 같이 세상 사람들이 흔히 기뻐하는 것을 가지고 기뻐할 정도의 수준이라면 더 이상 신자가 아닐 것입니다. 자녀가 좋은 학교 들어간 것 때문에 좋아하고 감사하 기뻐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도 다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와 같은 이유로 감사헌금을 주님께 드렸다면 별 것 아닙니다. 부처한테도 감사헌금을 드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렵사리 좋은 아파트를 분양 받았다면 기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온 천하 사람도 다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건강이 좋아서 날마다 힘이 넘쳐 감사하고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물론 믿음이 좋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그 정도는 다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고작 그 정도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일까?'

여러분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세상 사람이 모르는 찬송이 있고 비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왜 내가 찬송하는지 절대 모릅니다. 나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기쁨의 샘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이 잘 돌아가야 그 샘에서 기쁨이 솟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일이 잘 풀리든 풀리지 않든 상관없이 항상 끊임없이 솟는 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송하고 기뻐하는 수준은 세상 사람과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수준이 높아도 한참 높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저는 전도사 시절에는 예배 전에 찬양 인도를 했습니다. 대개는 늘 은혜롭고 놀라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도사도 사람인지라, 가끔씩 집에서 부부싸움을 하고 교회에 간 날은 정말 그 자리에 서기가 너무너무 싫었습니다. 집에서 아내와 싸우고 와서는 가장 거룩한 것처럼, 가장 행복한 것처럼, 가장 기쁜 것처럼 찬송을 부르며 인도해야 하는 그 일이 너무나도 싫었습니다. 그런 때에는 사실,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찬양 인도를 하지 않을 수도 없고 해서 억지로 하긴 해도, 저 자신이 은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면 제 마음 속에는 사탄의 속사임이 들려 왔습니다. '너는 이중인격자다. 너는 찬양할 자격이 없다. 찬양을 인도할 자격은 더더욱 없다. 아내도 사랑하지 못하는 네가 어떻게 감히 찬송을 인도한다는 거냐?' 그래서 하루는, 친구에게 제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시편 103편 1절 말씀을 펴고는 저에게 읽어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읽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이 말씀을 읽게 한 후 그 친구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명령이지 권면이 아니야. 하나님의 명령은 지켜져야 해. 하나님은 네 감정에 상관없이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셔. 네가 부부싸움을 해서 기분이 나쁘더라도 하나님은 그 순간에도 영광 받으셔야만 할 분이셔. 네가 도대체 뭐니? 너는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아. 네 영혼에게 이렇게 명령해. '하나님을 찬양하라.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아 그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라." 대통령께서 행차를 하는데, 비서실장이 "제가 오늘 아침에 부부싸움을 했거든요. 오늘은 기분이 나빠서 도저히 일 못하겠으니 집에서 좀 쉬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러면, 대통령은 뭐라 하겠습니까? "차라리 그러지 말고, 오늘부터 아예 푹 쉬게" 하지 않겠습니까? 위대한 기도란 무엇입니까? 청산 유수처럼 흘러가는 기도가 아닙니다. 내 기분, 내 감정, 내 체면, 다 묶어서 제단 앞에 바쳐 드리고 올리는 기도, 정직한 기도, 그것이 가장 위대한 기도입니다. 가장 위대한 찬송이 무엇입니까?  내 기분도, 체면도, 내 모든 인간적인 감정이나, 자존심까지도 다 죽여서 묶어 제단 앞에 바치는 찬송, 그런 찬송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온전한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내 상황에 따라 달라지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감정, 처지, 모든 것을 묶어 제사로 주님 앞에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언제나 찬송을 했습니다. 기쁘고 즐거울 때만 찬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 중에서, 심지어는 죽음 앞에서조차, 나라가 멸망하게 된 지경에서조차, 아니 나라가 망해버리고 모든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간 절망의 순간까지도,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습니다.  왜입니까? 저들은 고난가운데서도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 그리고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두 번째로 찬양은 자신뿐 아니라 듣는 사람들에게도 구체적인 속박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25-26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라고 말씀합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이들이 '계속해서' 찬양을 했다고 표현합니다. 또 '듣더라.' 라는 단어를 보면 자세히 진지하고 주의하여 들을 뿐 아니라 기쁘고 기대하며 듣는다는 의미의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시간은 '밤중쯤'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내일의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은 밤처럼 두려운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옥 속에서 절망의 신음과 탄식소리대신 희망의 소리가 울립니다. 죄수들은 압니다. 바울과 실라가 얼마나 아프며 그가 얼마나 좌절하고 있으며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신음소리대신 자신들의 영혼에 위로를 주는 음악이 들려집니다. 아니 위로의 노래가 아니라 희망과 구원이 선포되는 찬양인 것입니다.

여러분, 밤중에 부르는 노래는 낮에 부르는 노래와는 다릅니다. 밤중에 들리는 노래는 가볍게 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을 파고 들어옵니다. 우리가 형통할 때 부르는 찬송도 은혜스럽지만, 그런 찬송은 입에서만 나오는 찬송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밤에 부르는 찬송, 고난을 당할 때,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렸을 때, 실패를 당했을 때, 건강이 좋지 않을 때, 앞날이 막막할 때 부르는 찬송은 영혼에서 나오는 찬송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누가 인생의 밤을 좋아하는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밤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싫어하는 인생의 밤을 주십니다. 꽃은 아침에 피어나기 위해 밤에 준비를 합니다. 아름다운 봉오리가 이슬을 머금고 입을 벌려 피어나기 위해서는 어두운 밤 동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밤이 없다면 꽃은 피지 못할 것입니다. 인생의 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밤 동안 인간에게 꽃을 피울 준비를 시키십니다. 만일 고난이 없다면 인생의 꽃은 피지 못하고 신앙의 꽃은 영글지 못한 채 시들고 말 것입니다. 즉 자기교만과 완악한 자기자랑에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손에 바로 쓰임을 받은 인물 치고 인생의 밤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좋다고 하는 분들을 가만히 보면 대개가 밤을 통과하신 분들입니다. 인간은 밤을 통과하지 않고 온전히 만들어지지 아니하는 고약한 기질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는 마치 채광석이 용광로에 들어가지 않고는 순금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밤을 중요하게 다루십니다. 때문에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찌라도 고난의 용광로 속에 던지시길 주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렇습니다.

저 골고다 언덕을 바라보십시오. 잔인하고도 무서웠던 십자가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당하신 잔인한 고난의 밤길 말입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죄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전 인류를 위하여 피 흘리게 하시고 그 처절한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인류가 죄 용서함 받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밤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18에서 사람들이 이것을 볼 때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이 밤의 방법이 하나님께는 지혜로운 구원의 길이요 능력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이 밤이라는 방법이었다면 한평생을 세상에서 살아야 할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밤이라는 용광로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왜 구원하셨습니까? 에배소 1장에 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세 전에 예정해 놓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도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이유도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만 닿으면, 금방이라도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천국의 거문고와 같습니다. 성도는 이미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노래하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의 골고다를 향하시면서도 제자들과 함께 찬양했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성령 받은 사람은 찬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큰 기대를 걸고 인생을 투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눈에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나그네들입니다. 그러므로 밤이 와도 크게 타격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래합니다. 때로 내 손에 쥔 것이 아무것이 없다 하더래도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밤에 노래를 부르는 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내 인생에 찬양을 포기하지 마세요.

그런데 교우 가운데서도 힘들 때 자꾸 세상의 노래를 달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노래는 우리자신을 그 사건으로 우리를 몰입해 가는 힘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기사가 있어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대중가요가사를 만드는 작사가들의 모이인 '노랫말 연구회'란 단체에서 글을 발표했는데,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슬픈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일찍 요절하거나 슬픈 운명의 길을 걷는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1926년 현해탄에서 연인이었던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투신 동반 자살했던 한국 최초의 여가수 윤심덕은 자신의 죽음을 찬미하듯이 '시의 찬미'라는 노래를 부르고 죽었고, '애수의 소야곡'등 숱한 히트곡을 남긴 남인수는 1962년 '눈감아 드리오리'란 노래를 남기고 41세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며, 영원 불멸의 가수로 지칭되던 이난영은 그의 노래 '목포의 눈물'처럼 슬픈 인생을 살다가 가슴알이 병으로 49세에 숨졌습니다. 1968년 가을, 뇌의 염증으로 인해서 29세에 요절한 차중락은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으며, 신장염으로 세상을 떠난 배호는 '마지막 잎새를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1985년 폐결핵으로 숨져간 김정호는 이미 죽음을 예견한 듯 '간다 간다 나는 간다'라는 가사의 '님'이라는 노래를 마지막으로 발표하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습니다." 저도 옛날에 그 노래를 많이 불렀어요.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창피한지... 그런 노래를 부르면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의 노래는 우리자신을 그 사건으로 우리를 몰입해 가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하나님을 더 깊고 더 섬세하게 만날 수 있는 분위기와 마음을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생각, 감정 그리고 모든 감각이 찬양을 통할 때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주변의 복잡하고 감당하지 못했던 두려움이나 염려 그리고 심지어는 내면의 숨겨진 아픔과 상처까지 밖으로 드러나게 하며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찬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찬양 중에 거하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22편 3절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바로 나의 찬양을 통해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물러가고 그 가운데 계신 주님을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26절에 빌립보 감옥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을 찬미할 때에 홀연히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옥터가 흔들렸습니다. 감옥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착고가 다 풀렸습니다. 기적입니다. 찬송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그 능력을 의심치 않고, 온전히 기뻐하며, 그분의 크심을 찬양할 때 나타난 찬송의 능력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바울과 실라의 찬양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30-31절 말씀을 봅시다.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즉 바울과 실라가 찬양 할 때에 이 찬양은 이미 간수의 가슴에 파고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찬양을 통한 자유함이 있을 때에 바울은 자기의 유익만을 취하지 아니했습니다. 아마 바울이 그대로 도망쳤더라면 이 간수는 죽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 간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찬송에는 세 가지 힘이 있다고 합니다. 위로 올라가는 힘 즉 기도응답이요, 둘째는 가슴을 파고드는 힘 즉 회개와 용서요, 마지막으로 밖으로 뻗어 가는 힘 즉 사명의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찬양은 병든 가슴을 찾아갑니다. 낙심한 마음, 인생의 사슬에 묶여서 헤매며 죽어 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를 향하여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까 라고 물어볼 수밖에 없던 신세에서 오히려 죄수를 지키던 간수가 이 바울과 실라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이 그의 마음을 파고 들어갔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선포는 기독교 역사가 혼란 가운데 있을 때, 그리고 구원의 문제로 논쟁을 벌일 때마다 이 한 구절의 말씀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이해하는데 이정표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는 '이신득의'의 교리에 근거에 되는 중요한 성경 구절로 수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지 않았습니까? 찬양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찬양은 나도 살리지만 다른 사람도 살리면서 그 공동체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남깁니다. 여러분! 지금 처해있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너무 마음쓰지 마십시오. 밤은 반드시 밝아 아침이 옵니다. 오늘의 모든 고통과 역경을 하나님께서 다 제거해 주시고 찬란한 아침 햇살을 안고 기뻐할 날을 반드시 주십니다. 그와 같은 소망을 바라보고 부르는 이 영혼의 노래가 우리 안에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합니다. 찬송 생활의 기적, 이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 속에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감사와 찬미가 없다고 한다면, 이제부터 소망의 날개를 달고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날아가도록 하십시다. 찬양과 기도의 두 사닥다리를 타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지점까지 올라가십시다. 절망의 구름을 뚫고, 불평과 욕구 불만의 구름을 헤치고, 높이, 높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 갈 수 있도록 마음의 날개를 달도록 하십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달라 질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달라지며, 모든 사람들이 우리 앞에 와서 예수 믿고 싶다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진이 일어 날 것입니다. 옥문이 열릴 것입니다. 쇠사슬이 풀릴 것입니다. 모든 불가능한 문제들이 해결 될 것입니다. 찬양으로 살아가는 우리 앞에, 날마다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앞에, 기적은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찬송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딱딱하게 굳어서 전혀 움직일 줄 모르는 강퍅한 마음들에 지진이 일어나고, 그 마음 문이 활짝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을 얽어매고 있던 온갖 죄악의 사슬과 욕심과 탐심, 그리고 악한 생각들이 다 풀려 자유케 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헬렌 켈러의 고백을 소개하며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나는 나의 몸이 온전치 못한 까닭에 나 자신과 나의 의무,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온전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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