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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한 종의 3가지 오해 (마 24: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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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들려주신 <달란트 비유>로 교회학교에서부터 들어온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비유의 클라이막스는 자기 소유를 종들에게 맡기고 떠난 주인이 나중에 돌아와서 종들과 계산하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이 때 주인은 어떤 종에게는 칭찬과 상을 내리 지만 어떤 종에게는 책망과 저주를 내립니다. 저는 이 부분을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가운데 하나로 꼽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마지막 날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도 주님은 똑같이 평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단 한번으로 지나가는 삶입니다. 지나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생에 종점이 있다는 것과 그 날에는 주님 앞에서 살아 온 날에 대해 보고해야 할 시간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내일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알게 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문득 제 나이를 세어보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새삼 제 나이를 깨닫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어떻게 주님의 얼굴을 대할까? 였습니다. 마치 선생님에게 방학숙제를 받아 놓은 학생이 정신없이 친구들과 놀다가 학교 갈 날이 며칠 남지 않은 것을 알았을 때 애가 타는 것과 같았습니다.

“내가 너를 목사로 세워주었는데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다가 왔니?” 반드시 주님이 물어 보실 텐데 그 때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유구무언이라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다면 얼마나 통탄할 일일까? 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저는 제 인생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님께 제 인생을 보고할 그 시간에 대답할 말이 있게 해 주옵소서. 지금까지 저는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종을 불쌍히 여기시고 한번만 더 기회를 주옵소서. 다시 한 번 힘을 주옵소서.”

그날 이후 저의 삶은 밀린 숙제를 하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삶이었습니다. 그날에 숙제를 못해 통곡해 할 자신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저는 제게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단 한번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한번은 결코 놓칠 수 없습니다. 제 모든 것을 올인 할 것입니다.

요즘 저는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삿16:28)
그때 삼손이 죽인 블레셋 사람의 숫자가 그동안 죽인 숫자보다 더 많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20장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주인이 포도원에 일할 일꾼을 찾아 장터에 나가 아침 9시에, 12시에 그리고 오후 3시에 각각 사람들을 들여보냅니다. 그리고 오후 5시에 나가보니 그때까지도 일을 찾지 못해 놀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도 포도원에 보냅니다.
보통 하루 일은 6시에 끝나기 때문에 5시에 일꾼을 쓰는 주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주인은 한 시간밖에 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을 채용했습니다. 그 날 빈손으로 아내와 자식들을 만날 생각에 낙심하고 있던 종에게 그 주인은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저는 생각해 봅니다. 아침부터 일한 종과 1시간을 일한 종 사이에는 분명히 일한 시간과 일한 분량에 큰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계산한 것은 일한 시간이나 양이 아니라 일한 종의 마음이었습니다. 마지막 오후 5시에 들어간 종은 주인에 대한 보답으로 얼마나 열심히 일했을까요? 그는 주인이 당신의 일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불쌍히 여겨 일을 맡겨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한 시간이지만 주인에 대한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어쩌면 남들이 쉴 시간에도 쉬지 않고 정말 죽도록 일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생각했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당신은 비록 일한 양은 달랐지만 그 중심은 똑같았다. 그러니 네도 이들과 똑같이 받을 자격이 있다.”

저는 이 비유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제 자신이 어쩌면 한 시간짜리 종과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판단하시는 주님이 너무 좋습니다. 너무 멋있어 보입니다.
“아, 그러니 주님이시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인도 똑같습니다. 5 달란트 받은 종은 2 달란트 받은 종에 비하면 결과는 <2배 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같은 칭찬을 들었습니다. 주인이 칭찬하는데 결과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 “너는 남보다 더 많이 남겼기 때문에 이 상을 준다” 고 하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기 때문에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역하면서 너무 결과에 집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 사람은 큰일을 맡아서 저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나는 작은 일이기 때문에 누가 알아주지도 않아.” 걱정하지 마세요.

컴퍼스로 원을 그릴 때, 큰 원이든 작은 원이든 크기는 달라도 원의 중심, 컴퍼스로 찍은 점만 똑같으면 두 개의 원은 결국 하나입니다. 그것을 동심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큰 원이냐 작은 원이냐는 컴퍼스의 길이에 따라 결정될 뿐입니다. 주님은 원의 크기가 아니라 그 중심이 같은 것을 보시고 똑같이 칭찬하시고 상을 주십니다. 비록 한 시간 밖에 일하지 못한 종이지만 하루 종일 일한 종들에 못지 않는 그 충성, 신실함 때문에 주인에게서 똑같은 상급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충성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역에 희생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를 보면 압니다.

헌금에도 우리의 희생, 피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백만원을 했습니다. 어떤 분은 천원을 했습니다. 누가 더 헌금을 많이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나님은 액수가 얼마인지에 상관없이 누구의 헌금에 희생이 들어갔고 자기의 최선을 드린 것인지를 보고 판단하십니다.

사실 희생이 들어가지 않은 사역은 취미 생활이지 참된 사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그마한 희생이 요구되어도 사역을 그만 둔다면 그 사람은 사역이 아니라 취미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희생은 우리의 사역이 참된 사역임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도 증명해줍니다.

여러분이 5달란트를 맡았든 2달란트를 맡았든, 하나님은 일의 결과가 아니라 여러분이 그 일에 바친 희생과 최선을 평가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고 한들 그 가운데 얼마를 주님이 인정해 주실까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과연 무엇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두렵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이 제일 걱정입니다.

저는 인생의 마지막 날 고개를 떨군 채 “나는 내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통곡하게 될까봐 제일 두렵습니다. 저는 여기 계시는 분 중 한사람도 그런 분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사실 너무나 많은 시간과 기회를 낭비해왔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 남은 이것마저 놓칠 수는 없습니다.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늦은 5시이지만 다시 기회를 주실지 누가 압니까? 그래서 밀린 숙제를 다 끝낼 수만 있다면 이 땅에서 우리의 남은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래서 제게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세 명의 종이 나오는데 저는 한 사람에게 주목했습니다. 누구일까요? 마치 저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한 한 달란트 받은 종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저였습니다. 한편 저는 그것이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왜냐구요? 지금이라도 알게 해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자신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인 줄 철저히 믿고 있다가, 그때 주님 앞에서 "아니다 너는 한 달란트 받은 종과 똑 같구나" 라는 책망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때는 다시 돌이킬 기회도 없지 않습니까?

아직 그래도 우리에게는 남아있는 시간이 조금은 있습니다. 그 시간에 한 달란트 받은 종에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렇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가진 오해를 3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안전에 대한 오해입니다. 인생은 무엇이든 안전하고 편안하면 좋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사람은 순탄한 인생, 문제없는 인생을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통이나 상처를 싫어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것을 땅 속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괜히 장사한다고 시작했다가 실패하면 주인에게 꾸중이나 들을 거고, 장사가 쉬운 일인가? 얼마나 많은 문제와 어려움에 부딪칠텐데” 그래서 주인의 꾸중도 듣지 않고 고생도 하지 않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받은 그대로 지키고 있다가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을까요?

사람들은 안전에 대한 신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에 고통이 없고 위험이 없는 안전지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바칩니다. 사람들이 공부하고 출세하려는 것도 다 고통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사막의 신기루와 같이 처음부터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진정한 안전은 없습니다.

인간의 두려움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무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세상은 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처음 세상이 고장 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세상에 참된 안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고난 없는 삶을 사시지 않았습니다. 힘겨운 인생의 짐을 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고난 없는 삶, 문제없는 인생을 한 번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너희도 나와 같이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전에 대한 신화를 깨십시오. 세상에 없는 안전을 좇아가며 불안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전이 인생의 목표가 아닙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안전은 없다면 믿음으로 모험의 길을 택하는 것이 낫습니다. 믿음은 모험으로 사는 것입니다. 무사안일과 현상유지는 믿음의 길이 아닙니다. 성경은 상처를 피하는 길, 고난을 피하는 길, 희생 없이 사는 길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형통이란 고난이나 문제없는 삶이 아니라 어떤 형편 조건에서도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 복을 말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문제없는 곳은 어느 곳도 없습니다. 공동묘지만 빼고요. 사람이 살아 있는 곳에는 항상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다음 3가지 를 꼭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모든 문제에는 수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걱정했던 일을 지금은 기억조차 하지 않지 않습니까?
둘째, 문제를 극복하도록 도와 준 것이 무엇이냐? 결국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지만 그러나 오늘의 문제 때문에 지난날의 문제는 극복된 것입니다.
셋째, 문제가 생겼을 때 장애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기회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현재에서 더 나아지게 하든지 더 나빠지게 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문제를 통해 인생을 재조정하고 성장하는 기회로 삼든지 넘어져 낙심할 장애물로 삼든지 그것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다음으로, 안전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능력 범위 안의 일을 합니다.
자기 힘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만 합니다. 늘 얕은 물가에서 물장구나 치며 놀지 저 깊은 바다 속을 헤엄쳐 보지 못합니다.

언젠가 내 모습이 하향지원하는 입시생과 같다는 것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늘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선택 할 때마다, 항상 자신의 실력보다 한 계단 낮은 쪽을 선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내 실력보다 높은 것은 무조건 포기했습니다. 그 심리적 배경에는 갈등이 싫고 문제를 피하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살자, 편하게 살자. 그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은 신지 말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능력 범위 안에서 일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한계를 긋지 말고 무모하게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틀림없이 우리는 능력 범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나보다 더 인격이 훌륭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보다 더 성공한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은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내 능력 범위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쉽고 편안한 일, 문제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할까요?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꼭 맞는 신발을 신지 마세요. 더 이상의 성장은 없습니다. 항상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살기로 결정하는 것은 평범한 삶을 살기로 결정하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 중에는 고상하게 예수를 믿으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 사람들과 얼굴 안 붉히고 갈등 안하고, 상처 안받기 위해, 순모임에도 나가지 않고 뷔페팀에 가입하지도 않습니다. 교회 일을 해도 사생활에 방해받지 않는 범위에서만 하고, 온 몸을 던져야 할 일에는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정말 그것이 고상하고 우아하게 예수 믿는 것입니까?

여러분,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어떻게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하고, 사람 있는 곳에는 문제 있는 법인데 어떻게 문제를 피하면서 교회는 나오시려고 하십니까? 지상에 모든 교회는 문제없는 교회가 아니라 문제를 믿음으로 이겨내는 교회, 문제를 은혜로 덮는 교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세요?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문제 때문에 오히려 믿음이 자랍니다. 은혜가 넘칩니다. 우리의 인격이 주님을 닮아갑니다. 그러니 문제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간증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문제를 피하려고 하세요? 그렇다고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되지만 어쩌면 문제는 우리에게 축복일지 모릅니다. 사탄은 자기 일을 한다고 열심히 문제를 만들어 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우리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남자들은 군대 이야기만 하면 서로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누가 제일 존경받는지 아십니까? 전방 수색대나 해병대에서 근무한 사람들입니다. 거기가 제일 군기가 세고 훈련이 고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죄송하지만 방위나 군 면제자들은 끼일 자리가 없습니다. 제 말에 상처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 이야기를 위해서 한 말입니다.

천국가면 그럴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제일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주님 위해 한쪽 팔을 잃어버린 사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다 자신의 다리를 바친 사람, 복음을 위해 선교지에서 남편과 자식을 바친 사람, 그런 분들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저에게도 적지만 주님과 비슷한 흔적이 있네요. 주님 보세요.”
“그래 내가 받은 상처와 똑같구나. 수고 많았다. 나처럼 너도 영광을 받을 것이다.”
그때 십자가의 흔적을 지닌 성도들은 주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실컷 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통곡하는 성도들도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주님위해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어, 사랑하는 주님을 대신해서 받은 상처가 없어,
아, 너무 부끄럽다. 나는 그 많은 기회를 놓쳐 버렸어.”

여러분, 지상에서는 진정한 쉼도 없고 휴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이 지상에서 안전을 찾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싸움에 동참하여 공을 세우십시오. 본향에 돌아가는 날에는 가슴에 하나 가득 하나님 나라 훈장을 달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 그러지는 못한다 해도 하나님나라 군인으로서, 어느 한군데에는 하나님 나라와 주님을 위해 싸우다 입은 영광스런 상처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주님을 위해 피 흘리기까지 한번쯤은 싸워본 적이 있어야 그날에 뭐라고 말할 거리라도 있지 않겠습니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지않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를 악한 종이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현상유지는 죄가 됩니다.

교회 안에는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을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분들이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한 달란트 받은 종과 똑같은 대접을 받지 않겠습니까?

아무 것도 안하면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줄 착각하지 마십시오. 선을 행할 힘이 있었고 선을 행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에드먼드 버크>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악이 승리하는데 필요한 유일한 길은 착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2.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을 굳은 사람, 무자비한 사람, 항상 결과에 대해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믿고 맡겨주는 주인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이겨내는데 사랑하지 않으니까 주인에 대한 책임과 의무만 남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을 꼭 자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은 자기 고집대로 강요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착취하고, 그리고 항상 엄격한 기준으로 하나하나를 심판하고 비난하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나를 잘되라고 하신 말씀인데도 책임과 의무로만 여겨지고 무거운 짐으로 생각합니다.

주위에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주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믿는 분들 가운데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아니라 일종의 강박감으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는 강박감이 들면 들수록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더욱 커집니다.

"아무개는 돈을 잘 버니까 헌금도 많이 하고 구제도 잘 하지만 나한테는 경제적인 어려움만 주시면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까?" "아무개에게는 좋은 성격과 외모를 주셔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게 하시고, 나에게는 불우한 어린 시절과 상처 받는 마음만 주셨는데 어떻게 그 사람과 똑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아무개에게는 큰집을 주셔서 순 모임도 하고 순장도 할 수 있지만 나는 내 집도 없이 월세방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사는 신세인데 어떻게 순 모임을 가지고 순사역을 하라는 것입니까?"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때에는 할 수 있는 만큼만 요구하십니다. 또 일을 시키실 때에는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이미 주신 것을 가지고 최선만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최선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잘못된 생각에서 우러난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된 이미지를 갖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아주 잘못되었고 조금 잘못된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온전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자라려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풀고 참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공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만 잘못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교정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좋고 아름다운 단어를 선택한 다음 그 단어의 최상급을 사용하여 묘사해도 절대 틀림이 없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알게 된 후에는 주를 섬기는 것이 강박감이나 죄책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감사함에서 우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아내와 연애할 때 제가 늘 흥얼거렸던 노래가 있습니다. 그 시절 어떤 영화의 주제곡으로 생각되는데 지금도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오직 이 한절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게 되니까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더라구요. 하나님이 아시면 <야, 섭섭하다. 너는 언제 나에게 그런 노래 불러준 적 있니?> 하실 것 같아서 죄송스럽지만 사실입니다.

사랑 없이 하는 일은 무거운 짐이지만 사랑하면 기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라는 노래는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들, 순종하는 자들이 늘 부르는 주제곡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종은 자신이 받은 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이 받은 것을 다른 두 종과 비교해 보고 하찮은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달란트의 가치는 노동자의 15년 품삯에 해당하는 큰돈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3억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물론15억, 6억에 비교하면 작은 돈일지 몰라도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장사할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종은 자기가 받은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가져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포기했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는 항상 비교의식이 남아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낙원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아담에게도 비교의식이 들어가니 에덴동산이 낙원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지 행복했던 삶이 형편없이 초라하게 여겨졌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모든 것을 하나님처럼 할 수 있었고 단 한 가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그 하나 때문에 자신이 받은 전부를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자신이 가진 전부를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비교의식은 대통령이 되면 없어지겠죠? 억만장자는 비교의식이 없겠죠?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비교의식만 들어가면 자신을 초라하게 봅니다. 불평이 생깁니다.
비교의식을 버리려면 창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사람 한사람을 다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은 각 사람을 어딘가 필요한 곳에 쓰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로 비교하여 누가 더 잘 났는지 싸우라고 다르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만드셨다면 틀림없는 걸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생을 살 때 이 악한 종처럼 살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대로의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늘 남과 비교하고,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가치를 모르고 늘 내게 없는 것 때문에 불평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임무를 포기하고 수많은 기회를 놓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살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마지막 날 많은 성도들이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책망 받을 것입니다. 마지막 날 많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한 일이 적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 때문에 책망 받을 것입니다. 마지막 날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깨닫지 못하고 수많은 기회를 놓친 것 때문에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저는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주님을 뵈올 때, 그분을 어떻게 대할까? 가 제일 두렵습니다. 시험 날 받아 놓은 학생같이 그것 때문에 제일 마음이 탑니다. 헛된 삶은 안되어야 할텐데. 주님 앞에 한마디라도 드릴 말은 준비해야 할 텐데. 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집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우리와 결산하십니다. 단 한 번의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자신의 남은 생을 올 인하여 주님의 칭찬과 상급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권영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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