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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수 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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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아들이 멀리서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까, 핸드폰을 사주어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핸드폰을 일제히 압수해서,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만 사용할 수 있게 해줍니다.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6시쯤 되면, 어김없이 아들에게서 문자가 날아옵니다.
“폰 받았삼.”
화요일과 목요일마다 늘 같은 문구입니다. “폰 받았삼.”
핸드폰 받았으니 전화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처음에 “폰 받았삼” 이란 말투가 좀 이상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받았습니다” 라고 높임말을 해야지, “받았삼” 이 뭐냐고 말이지요. 제가 교육을 잘못시켰구나 라고 혼자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애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에 신문에 중고등딩 자녀들과 문팅을 하는 부모들을 위하여 중고등학생들이 문자메시지에서 사용하는 그들만의 특유한 단어들을 설명해주는 글을 읽었습니다.
‘삼’ 으로 끝나는 것이 핸드폰 문자메시지에서 줄임말로 많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폰 받았삼’ 은 ‘폰 받았습니다.’ 란 뜻입니다. 그 외에도 많습니다. 대략 난감(아주 난감하단 뜻), 열공하삼(열심히 공부해! 란 뜻), 감기 열라 심해(감기 무척 심하다는 뜻), 제 얼굴 폭탄이네(그의 얼굴이 아주 못 생겼다는 뜻).
언어의 세대차이가 이렇게 큽니다. 우리 기성세대가 청소년들을 이해하려면,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만큼, 자녀들과 더욱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너무나 차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넓은 간격을 메우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바빠서, 일이 많아서, 몸과 마음이 지쳐서, 살기 힘들어서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여유도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성숙한 신앙인이 됩니다.
제 아들은 제가 누군지 잘 알기 때문에 저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주말이 되면, 외출을 해야 하는데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선생님들이 외출을 시켜주지 않습니다. 답답하면, 제게 전화를 합니다. 선생님께 전화를 하여, 외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요.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부쳐달라고 부탁도 합니다. 그러면, 즉시 부쳐줍니다. 제가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을 더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필요를 아시고, 구하는 것을 주시고, 찾고자 할 때 찾아주시고, 문을 두드릴 때 열어주십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고 있는 여호와, 그분은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역사 속에서 체험하여 알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홍해 앞에 다다랐을 때에,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적지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그 이후 40년간 사막에서 방황하며 고생합니다. 지도자 모세는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요단강 맞은편에서 죽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어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그 때, 요단강은 강물이 범람할 정도로 많이 불었을 때였습니다. 물이 제방을 흘러 넘치고 있는데, 어떻게 60만명이나 되는 어린아이들과 노인들과 짐승들을 데리고 건널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합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에서 행하여 요단강 물에 들어가라.”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앞장서서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물에 들어섰습니다. 그 때, 흘러내리던 강물이 위로 물러가 끊어지고 요단강을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합니다.
“요단에서 열두 돌을 주워서 길갈에 기념비를 세워라.”
이제 곧 목적지 가나안 땅에 정착할 일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요단강을 기적같이 건넨 기념비를 세우라고 합니다. 새 시대를 위한 준비입니다. 이제 앞으로 곧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도시 국가들과 전쟁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닥칠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기념비를 세워 하나님의 능력, 기적을 잊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3. 개인이나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보면, 반드시 흥망성쇠를 반복합니다. 잘 될 때가 있고, 좀 지나면 고생을 할 때가 옵니다. 고생을 하다가도 참고 견디면, 곧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이집트에서 총리 요셉의 때처럼, 7년 풍년 후에 7년 흉년이 옵니다. 잘 될 때, 흉년을 예비해두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렇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다가 해방되었습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곧 홍해라는 큰 어려움에 부딪칩니다. 홍해를 기적같이 이겨낸 후에, 다시 사막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40년간 사막생활을 한 후, 목적지 가나안을 앞두고 요단강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고 나서 이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어려움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위기와 은혜의 반복, 성공과 실패의 반복, 경기 활황과 침체의 반복.

  부흥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극심한 정치 경제적 위기, 영적 위기 후에 부흥이 왔습니다. 17세기에 유럽에서는 카톨릭교회와 개혁교회 사이의 치열한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이 일어나서 독일을 중심으로 한 개혁교회가 패배하였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독일은 인구가 1,500만에서 600만으로 급감하였고, 국민들의 도덕성은 부패하여졌고, 교회는 타락해버렸습니다. 이런 심각한 사회적, 도덕적, 영적 위기 후에 독일의 목사 슈패너에 의해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하기 원하는 평신도들이 공식적인 예배 외에 자유스럽게 각 가정에 모여 성서와 경건한 서적들을 읽고, 토론의 시간을 가지며, 찬양의 시간, 간증, 명상과 기도시간을 가졌습니다. 이게 슈패너 목사 사택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슈패너 목사에 의해 시작된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 모라비안 공동체에 영향을 미쳤고, 그들은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성령의 충만을 받은 모라비아 교도들은 12명 중 1명이 해외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가 모라비아 교도들을 만나 회심하게 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웨슬리가 미국에 선교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갑자기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에 탄 사람이 다 죽게 생겼습니다. 웨슬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배에 타고 있던 26명의 모라비아 교도들은 죽음의 위기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이 형편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Holy Club 이란 동아리를 조직하여 대학생 복음운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세속화되고 부패해가고 있는 교회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먼저 바로 서야 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서 이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 꼴이 뭐냐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 내 모습. 웨슬리는 여기에서 큰 충격을 받고 미국에서 돌아와 모라비아 교도들을 만나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 이후에, 그는 영국에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는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설교가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8세기에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합리주의, 이성주의가 판을 치면서,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선배들이 가졌던 청교도적 신앙의 열정이 사라지고, 영적 무기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적 위기를 겪고 있던 시대에 조나단 에드워드가 일어나서 미국의 영적 대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1905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우리는 일본제국에 주권을 빼앗겨버렸습니다. 백성들이 소망을 잃고 방황할 때였습니다. 이 때, 한국에 온 미국의 선교사들은 감옥에 갇힌 민족 지도자들을 찾아가 위로하며 성경 찬송가를 나눠주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감옥에서 예수믿은 민족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이승만, 이상재, 이원긍, 유성준 등입니다. 1905년 선교사 크램은 “교회가 전에 없이 가득 차고 있듯이 사람들의 마음과 심령은 위를 향하고 있다.” 고 보고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영적대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평양시민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며, 평양 시내에서는 범죄가 현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기생의 도시, 환락의 도시 평양이 한국의 예루살렘이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몹시 침체되어가고 있습니다. 동일하게 한국교회도 양적으로, 질적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1990년대부터 교회성장이 급격히 둔화되더니, 2000년대에 와서 통계적으로는 미미한 성장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습니다. 지난 달에 통계청이 발표한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에서 이제 통계적으로도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3개 종교 중에서 기독교만이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침체,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침체, 그리고 영적인 침체는 이제 곧 한국교회의 부흥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침체되어 있는 한국교회와 사회에 부흥의 불길을 당길 때가 왔습니다. 우리교회가 부흥의 불씨를 당기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부흥을 일으키는 주역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 부흥을 사모하는 사람, 부흥을 열망하는 사람은 지난 날 우리 믿음의 선배들에게 일어났던 영적부흥의 경험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거슬러 올라가서 미국, 영국, 독일, 더 올라가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원초적 부흥운동인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길갈에 기념비를 세운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 기적, 위대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요단강을 건넌 곳에 기념비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영적부흥을 다소 경험하였습니다. 그 때만 해도, 초등학생들도 기도하면 방언을 받았습니다. 중고등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청년들끼리 열심히 모여 기도하며 찬양하고, 밤10시쯤에 주암산 기도원에 올라가서 밤을 세워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몸매가 20대 때의 날씬한 몸매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분의 능력은 동일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불같은 성령, 바람같은 성령으로 임하신 하나님,
요한 웨슬리를 통해 영국의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신 하나님,
조나단 에드워드를 통해 미국을 영적 대각성 부흥의 파도를 일으키신 하나님,
평양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을 통해 철저한 회개와 기도와 변화와 부흥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신 하나님,
그 분은 오늘 우리를 통해 침체된 한국사회와 교회를 부흥시키실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이 도시와 나라와 민족을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신 하나님, 요단강의 물을 멈추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과 제 안에서 살아 계십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찬양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24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매 순간, 모든 사건 때마다 자기의 영혼에 무엇인가를 심습니다. 바람이 수없이 많은 씨를 나르듯, 매 순간은 사람의 마음과 의지에 알아챌 수 없게 자리 잡는 정신적 활기의 씨앗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많은 이 씨의 대부분은 말라 죽어 없어집니다. 사람들이 씨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씨들은 아무 곳에서나 싹트지 않고, 자유와 자발성 그리고 사랑의 좋은 흙에서만 싹을 틔우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 새 명상의 씨. 2005년, 카톨릭출판사. p.29>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지금 여러분의 마음 밭에 뿌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씨, 위로의 씨, 기쁨의 씨, 평화의 씨, 능력의 씨가 우리의 찬양과 기도 가운데 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바빠서, 우리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우리 마음이 그 씨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죽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의 씨, 능력의 씨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틀에 박힌 진부한 고정관념 때문에 날마다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그분은 유일한 하나님, 참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욕심과 욕망을 과감히 벗어 버리고, 평소에 익히 잘 알고 있는 익숙한 관습과 경험들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것,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의 고정관념, 그리고 익숙한 삶과의 과감한 결별을 통해 매 순간 하나님이 심으시는 은혜의 씨앗, 능력의 씨앗, 진리의 씨앗을 우리 마음과 의지 안에 받아들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언젠가는 엄청난 수확을 거둘 날이 올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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