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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성령: 시작부터 끝까지 (막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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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의 앞부분에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네 권의 복음서들이 있습니다. 
이 네 권의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마가복음은 짧고, 간결하면서, 힘이 있고 박진감이 넘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교훈 중심이 아닙니다. 사건 중심입니다.
1장을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신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이 말을 깊이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장쾌한 선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자체가 ‘예수님은 그리스도, 메시아, 구세주이십니다.’하는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1절은 그 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사실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우리에게 복음(기쁜 소식)이 됩니다.’ 하는 것도 알려줍니다.
마가복음은 한 줄로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한 다음에 예수님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례 요한의 준비활동을 간결하게 언급합니다.
이어서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로 들어갑니다.
서론, 탐색전,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바로 본론입니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자마자 바로 슈팅이 터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마가복음 1장, 압축될 대로 압축되고, 불필요한 것이 없는 1장에 성령 이야기가 세 번 나옵니다.

본문 앞의 8절,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물 세례와 성령 세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근본적인 차이를 잘 알려주는 말입니다.

10절,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2절,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오늘은 마가복음 1장에 나오는 성령 이야기를 중심으로 은혜와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는 나에게 임하셨고, 임하시는 성령을 깨달아야 합니다.

10절과 11절,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기록은 한 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갖게 합니다.

10절을 다시 보세요.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이 갈라지는 것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예수님만 보셨을까?  아니면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도 모두 보았을까? 혹시 세례 요한과 예수님만 본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11절을 다시 보세요.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거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는 소리를 예수님만 들으셨을까? 아니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도 모두 들었을까? 혹시 세례 요한과 예수님만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명백한 답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후좌우 형편을 살펴보면 예수님만 듣고 보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다른 사람들도 보고 들었다면 그들은 당장 그 자리에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메시아로 추대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았다고 주관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은 3장 16절 앞부분에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하늘이 자기에게 열리고” 이렇게 역시 주관적으로 되어 있는 사본도 있습니다.

여하튼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는 이 중요한 순간에 성령이 자기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 사람과 함께 보았든지, 세례 요한과 둘이서 보았는지, 혼자서 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못 보고, 못 듣고 깨닫지 못했을지 모르나 예수님은 보고, 듣고, 아셨습니다.

성령은 필요한 때 성도들 각자에게 임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임하셨던 성령, 특별히 중요한 때에 여러분에게 강하게 임하셨던 성령을 지금이라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아 그 때 그것이 성령의 도우심이었구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령강림을 신비체험과 연결해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령강림은 신비체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신비체험,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신비체험은 우리가 특별한 때에 먹을 수 있는 별식과 같습니다.
성령은 일상적인 일 가운데, 일상적인 형태로 나에게 임하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늘 대하는 밥과 김치에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영양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고등학교에 믿음이 아주 좋은 교장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교장 사택이 학교 안에 있었는데 어느 날 밤에 잠이 잘 오지 않고 웬일인지 학교를 한 번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더랍니다.
이 교장 선생님은 일어나 옷을 입고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보는데 어느 교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전기가 합선이 되어 천정의 전선이 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5분, 10분만 늦었다면 그 불이 건물로 옮겨 붙을 형편이었습니다.
이 교장 선생님은 서둘러 전선의 불을 껐습니다.
당시 저는 그 학교의 교사였었는데 이 교장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면서 ‘유 선생, 나는 그 때 내가 잠이 안 오고 학교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분명히 믿고 있어!’ 하였습니다.
이 교장 선생님은 믿음이 좋을 뿐만 아니라 신학을 전공하고 성경에 대한 이해가 아주 깊은 분이었습니다. 30년 전에 급한 병으로 하늘나라로 가셨고  지금은 그 교장 선생님이 제자의 제자가 교장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그 학교에 간 일이 있었는데 교장실에 그 교장 선생님이 보시던 영어원서 성경주석들이 누렇게 바랜 채로 가득 꽂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희와 같은 지역사회에서 목회하고 계시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목사님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목회하던 분이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실 때  이 목사님은 일주일에 이틀은 다른 도시에 있는 신학교에 가서 집중적으로 여러 시간을 강의하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 강의를 마치고 밤에 교회가 있는 도시로 돌아오는데 몸이 매우 피곤했습니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차를 세우고 싶은 마음이 들더랍니다.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는데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는데 차가 절벽 바로 앞에 멈춰 서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차를 세우지 않았다면 차가 굴러 떨어지고 말았을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그 때 성령께서 자기에게 브레이크를 밟으라고 하셨다고 굳게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그 분의 간증 테이프에서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감사절을 앞두고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감사의 제목들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이 찾으셨습니까?
감사의 제목을 많이 찾은 분들은 성령을 많이 받은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조금 전에 부른 찬송가 1절 “강물 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함이라” 이 가사와 같이 마음에 기쁨이 강물 같이 흐르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감사의 제목을 찾지 못한 분들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 말은 성령강림절과 맥추감사주일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기교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게 하고, 감사가 있게 하고, 소망이 있게 하고, 사랑이 있게 하고, 의욕이 있게 하고, 건설적인 생각이 있게 하는 것은 성령이 하는 귀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음에 불평, 짜증, 미움, 건강하지 못한 생각, 파괴적인 생각, 이와 같은 것들은 성령의 반대가 되는 영이 역사하기 때문인 것을 알고 힘써 물리쳐야 합니다.

나에게 임하시는 성령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들려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의 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잘 알고 그것에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는데, 그 가운데 나도 있었는데 내가 나에게 임한 성령을 깨닫지 못하면 성령의 임재는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오순절에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제자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었습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내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내 위에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모습으로 임한 성령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래서 다 전도하러 나가는데 나는 집으로 갔다면 내가 비록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성령강림은 나와 무관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입니다.
여러분, 비극의 주인이 되지 말고 성령과 함께 힘 있게 활동하는 액션의 주인공이 되세요.

1907년에 우리나라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흥운동이 시작된 기록을 보면 평양 어느 교회의 부흥회에 성령이 강림했는데 교회당 전체에 성령의 열기가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더 나가서 그 회개운동, 부흥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나는 구경꾼에 그치고 맙니다. 
구경꾼이 되지 말고 함께 회개하고 새롭게 뛰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하셨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신앙공동체로서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는 시작되었고,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교회는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키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앞으로도 변함없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면서 힘차게 앞으로 나가게 할 것입니다.
복음이 역사가 이 땅 위에서 골고루 퍼져나가게 할 것입니다.

어제 「국민일보」 미션 면에는 재미있는 광고가 하나 실렸습니다.
‘기쁘다 성령 오셨네!’라는 문안이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광고였습니다.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낸 광고인데 저는 그 광고 문안을 보고 무심결에 혼잣말로 ‘그거 말이 되네!’ 했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오늘이 성령강림절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일부러 이런 광고를 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오늘만 성령강림절이 되지 말고 매일 매일이 성령강림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광고에는 ‘우리는 성령이 있어 행복합니다!’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이 성령이 있어 행복한 날이 되기 바랍니다.

다른 날이 아니고 오늘,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나에게 임하는 성령을 깨닫고 성령이 나에게 하시는 음성을 들으시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 바랍니다.

둘째, 성령은 우리를 광야로 몰아내시는 일도 있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10절에 있는 성령이 내려 오셨다, 한자 낱말로는 강림하신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이고 또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다시 보세요.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성령이 누구를 몰아내신다, 이것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더구나 성령은 예수님을 좋은 곳으로 몰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그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13절을 보세요. 사탄의 시험이 있는 곳입니다. 들짐승들이 있는 곳입니다.
더욱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셔야합니다.
성령은 때로는 우리를 광야로, 폭풍우 가운데로, 시험 가운데로, 고통 가운데로 몰아내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기록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아브라함을 만득자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모리아 땅의 산으로 몰아내셨습니다.
성령은 욥을 재산 상실, 자녀 몰사, 건강 상실이라는 광야로 몰아냈습니다.
성령은 다니엘을 사자굴과 풀무불로 몰아넣으셨습니다.
성령은 요나를 고기 뱃속으로 몰아넣으셨습니다.
성령은 바울과 실라를 빌립보 옥 가운데로 몰아넣으셨습니다.
성령은 가도 요한을 밧모섬으로 몰아내셨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이겼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광야로 가시기 바랍니다.
광야에서 쓰러지시면 안 됩니다.
이기시기 바랍니다!

만일 이 때 예수님이 ‘나는 광야로 가지 않겠습니다. 메시아인 것이 확실해진 내가 왜 광야로 가야합니까? 나는 당장 예루살렘으로 가겠습니다!’ 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광야로 가시기는 했지만 시험을 이기지 못했다면 또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광야로 몰아내심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메시아운동의 방향을 확립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내용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복음서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내용을 알 수 있는데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라,  마귀에게 절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물질과 인기와 권세의 시험이었습니다.
‘네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하는데 물질, 인기, 권세, 이런 것을 도구로 삼아라’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지고 이 시험들을 물리치셨습니다.
‘나는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구하겠노라!’ 하신 것입니다.

야구 경기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는데 늘 스트라이크만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높은 공을 던지기도 하고, 일부러 스트라이크 존을 크게 벗어나는 공을 던지기도 합니다.
이것을 잘 배합하는 투수가 좋은 투수입니다.
늘 스트라이크만 던지려고 하다가는 홈런을 얻어맞기 쉽습니다.
투수가 볼을 던질 때 야구공은 ‘내가 왜 볼이 되어야 해? 나는 스트라이크가 되어야 해! 그래서 주심의 손이 멋있게 번쩍 올라가고 관중들의 박수를 받아야 해! 나 이번에 안갈 테야!’ 할 수 없습니다.
야구공은 그저 투수가 던진 대로 날아갑니다.
그것처럼 성령께서 우리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조롱과 멸시가 있는 곳으로 내몰 때 우리는 가야합니다.
여러분, 가시기 바랍니다.
가면서, ‘성령님, 나는 성령님의 내몰림에 의해 광야로 갑니다. 광야를 이길 힘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며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디베라 호수에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세 번 부탁하시고 마지막으로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 18) 하셨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갈 것을 일러주신 것으로 전해집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나는 십자가에 바로 달릴 자격이 없습니다. 나를 십자가에 거꾸로 달아주세요.’ 자청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는데 그 십자가는 밀물이 들어오는 바닷가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장엄한 순교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적은 다음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9절인데요,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그 다음에 어떤 말이 나오는지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몰아내실 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성령이 나를 광야로 몰아내실 때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 바랍니다.

저는 12절,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하는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님, 오늘 목양교회 성도들을 한 분도 빠짐없이 노방전도 현장으로 몰아내 주세요.’ 기도했습니다.

여기 ‘몰아내신지라’는 ‘내던지셨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강제로 던지셨다는 뜻입니다.
‘성령님, 강제로 전도현장으로 던져 주세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기 “곧”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1절에도 “곧”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마가복음에는 “곧”이라는 말, ‘즉시’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이 마흔한 번이나 나옵니다.
아까 마가복음은 박진감이 넘치는 성경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곧”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박진감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미루지 말고 곧 나가셔서 박력 있게, 힘 있게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시작하실 때 함께 하신 성령은 끝까지 함께 하시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복음의 시작인 마가복음 1장에는 성령이 이렇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일이 시작될 때 함께 하십니다.

성령은 천지가 창조될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영이 곧 성령입니다.

성령은 교회가 시작될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석 주일 뒤가 목양교회 창립 45주년 감사주일인데 성령은 1961년 6월 25일, 목양교회가 개척 설립될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령은 시작할 때만 함께 하십니까?
마가복음을 보아도 1장에는 성령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여러 번 나오는데 2장부터는 성령 이야기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서너 번 나옵니다.
그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성령은 시작할 때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늘 함께 하십니다.
중요한 단계에는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신구약성경에는 성령이라는 말이 191번 나오는데 성령이라는 말이 제일 많이 나오는 성경은 사도행전입니다. 49번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별명이 ‘성령행전’입니다.
그 다음으로 성령이라는 말이 나오는 성경은 성경의 제일 끝에 있고, 세상의 마지막이 어떨 것인지 알려주는 요한계시록입니다. 열세 번 나옵니다.

아까 조용한 기도를 드릴 때 사회를 보시는 목사님이 요한계시록 21장 5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드렸습니다.
그 가운데  6절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씀이  요한계시록 끝 장인 22장의 13절에도 나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성령도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이시요, 시작이며 마침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이와 같이 “이제도 있고” 현재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성령은 시작할 때 계셨고, 이제도 계시며, 끝까지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마가복음도 그렇고, 다른 복음서들도 그렇고 왜 시작 부분에는 성령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왜 많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
자동차 시동이 걸린 다음에는 그저 달리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시동이 걸려서 달리기 시작했으면 시동을 거는 키에 다시 손 댈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운전을 끝낼 때 다시 키에 손을 댑니다.

여러분의 삶의 시작에 함께 하신 성령님이 지금도 함께 하시고 끝까지 함께 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사흘 시간을 내서 기도원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요즘 교회에 일이 너무 많아져서 그만큼 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루는 점심시간에 기도원에서 나와 투표를 하고, 청장년연합회가 주최하는 축구경기에도 참가했었습니다.
저도 선수로 한 경기에 뛰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한상균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시작부분에서 이 축구경기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하기에 틀림없이 ‘올해 우리나이로 6학년 3반인 담임목사님도 선수로 뛰었습니다. 그것도 풀타임을 뛰었습니다. 센터포드로 뛰었습니다.’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랬는데 그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동안 시합에 나갈 때는 교인이 아닌 분들도 빌려서 나가는 일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순수한 교인들로만 나갔습니다. 세 팀이 참가해서 3등을 했는데 유쾌한 3등이었습니다.’ 하시더군요.
듣기에도 매우 유쾌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하나님은 정직한 B학점을 더 사랑하신다는  책자를 내신 일이 있는데 한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기도원에서 옛날 기록, 이전에 기도한 것들, 이전에 메모한 것들을 들춰보다가 확실하게, 강하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 성령께서 이 교회와 언제나 함께 하셨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교회와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이 교회가 임시 조립식 건물에서 예배드릴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아마 그 때 제일 가까이에서 제일 강하게 함께 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으면서 ‘아, 성령께서는 이 교회와 끝까지 함께 하실 것이다!’ 하는 믿음이 새로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임하셔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과거에도 그렇게 하신 성령님, 지금도 그렇게 하시는 성령님이 앞으로도, 끝까지 그렇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성령이 여러분을 광야로 몰아내시더라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와 같이 하는 가운데 주님이 보여주신 모범을 본받고,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보혜사 성령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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