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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과 진가 (요일 3: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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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사람을 영어에서 Person이라 하지요.
이 말은 그리스어 프로소폰(prosopon)
라틴어의 뻬르조나(persona)에서 나온 말인데
그 뜻은 가면이란 말입니다.
연극배우가 무대에 올라갈 때 쓰고 올라가는 가면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무슨 가면을 썼느냐에 따라
연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은 가면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가면적인 존재로 얼마나 연기를 잘하느냐에 따라
삶의 보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가식적인 생활을 너무나 능숙하게 하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이란 가면을 쓰고 살다보니 나도 신자인체 합니다만
그러나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것은
내 속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인답게
즉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8장에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신 후
요8:32절에 [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고 합니다.
진리란 알레데이아 라고 해서 - 원뜻은 껍질을 벗겨 놓는다 는 말입니다.
진리되신 예수님 말씀 앞에서
그리스도인인체 하는 우리의 가면이 벗겨지고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회복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요1서 3장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말하면서
앞부분에서는 깨끗한 삶을 말한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적극적인 삶,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 것인가를 깨닫기 위하여
참된 사람, 사랑의 진가에 대해 눈이 뜨여지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사도 요한의 권면은
13절 [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 는
말로 시작합니다.

1. 사도 요한은 신자들을 미워하는 세상을 왜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할까요?(13절)
오늘 말씀의 핵심은 형제 사랑의 실천입니다. <2>
그런데 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말로
성도들을 위로합니까?
이 말을 바로 이해하려면 미워한다는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미워한다는 말은 싫어한다는 말로 이해합니다만
말1:2절 하반절에 [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 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는 분이십니까? 아니지요.
이 말은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였고
에서는 선택에서 제외되었다 즉 신학적으로 유기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는 말은
세상은 사랑을 본질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괄호 밖에 왕따 시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사랑의 삶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처세술은 힘의 논리, 부의 논리요 어디까지나 이기적입니다.

근간에 1%만 다르면 삶이 달라진다는 내용의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중에 베스트셀러에 올라온 책 가운데 이런 내용이 실렸어요.
물론 열등감에 대한 처방으로 자기애(self-love)를 말하긴 해도
마22:39절 말씀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는 말씀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면
우선 자기 자신부터 사랑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라고 해석합니다.
글세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성경을 보아도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에서 받아드립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세상이 용납을 못하니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현대 교인들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 때문에
세상이 교회를 싫어합니까?
그 반대지요. 말로는 사랑 사랑하면서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으니
말 잘하는 예수쟁이들 하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시기할 만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내일의 가족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이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2. 그리스도인의 빛 된 생활이 어떻게 나타나며
형제 사랑의 본질은 무엇입니까?(14-16절)
14절 [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 <3>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의 증거는
바로 형제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구원받은 성도임을 타나낸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제 목양실에 과실나무를 몇 그루 심어 두었는데
나무 가지를 자세히 살피는 습관이 생겼어요.
왜? 영하의 겨울 날씨에 얼어 죽었는지, 아니면 살아 있는지
어떨 적에는 미심쩍어 가지 끝을 잘라 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푸른 기운과 아울러 아~! 살아있구나 싶어요
그런데 대추나무 포도나무 같은 것은 일찍 움이 돋지 않습니다.
그래도 때가 되면 살아있는 가지는 움이 돋고 싹이 나는 것 있지요.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생명 같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사랑의 싹이 피고 꽃이 핀다는 말입니다.
구원 받은 생명임을 형제사랑으로 증명해 보이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15절에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물론 이 구절에서 가인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12절의 가인에 대한 반복적 교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이 왜 동생을 살인한 사건을 성경이 맨 처음
우리에게 저주의 모델로 소개할까요?
역대로 살인한 사람들이 한 둘이 이겠습니까?
그러나 가인이 저주의 모델로 등장하는 것은
동생 아벨을 마땅히 사랑하고 가장 사랑해야할 형제가
동생을 미워하고 시기하여 살인했다는데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의 모델로서 가인의 행동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16절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의 표본으로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형제를 사랑한 모델입니다.
그 분은 우리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호의적인 생각을 갖는다거나
어느 정도 잘 대해주는 등의 자세가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의 원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므로 그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랑의 본질을 바로 알고 나면 <4>
형제 사랑한다는 것 마땅한 일인 것, 당연한 일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16절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우리는 여기서 사랑이 무엇인냐? 는 질문에 정의를 내릴 수가 있습니다.
사랑이 뭡니까? 사랑이 뭘까요?
김동길 교수의 <사랑이 뭐길래?>라는 글 한 토막 소개합니다.
강화도에 목회하는 목사님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눈이 사팔뜨기입니다.
하루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목사님을 뵈옵자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목사님이 학교에 갔더니 담임선생님이 하는 말이
[ 학생들이 목사님 아들을 자꾸 사팔뜨기라고 놀리며 왕따를 시켜
아들이 몸씨 힘들어 하는데 어떠하면 좋겠습니까? ]
목사님이 태연하게 말하기를
[ 선생님, 사팔뜨기를 사팔뜨기라 하는데 어떠하겠습니까?
제가 아들에게 잘 말하겠습니다. ] 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목사님이 교회 바닥에 엎드려 밤새도록 울며 하는 기도가
[ 아버지, 내 눈 하고 아들 눈 하고 바꿔주이소.
내 눈 하고 아들 눈 하고 바꿔주이소 ] 하더랍니다.
그래서 사랑이 뭐냐? 자신의 몸을 내 놓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이런 사랑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포타포스 사랑만이 몸을 내 놓는 사랑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만이 몸을 내 놓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한 귀결로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는 것입니다. 일찍이 주님은 요15:13절에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몸소 실현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은 말로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요 실제적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상징적인 것이나 학문적인 것도 어떤 이상도 아닙니다.
픽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 때문에 사랑을 맛보았기에
나도 사랑의 다큐멘터리가 있는 신앙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생명, 그 생명에서 나오는 사랑의 삶, <5>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이유요,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사랑에 눈이 뜨여져
우리의 삶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교수가
한국을 방문하여 여러 번에 걸쳐 기념강연을 한 바 있습니다.
그는 돌아가기 전 국민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기자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질문을 합니다.
[ 몰트만 교수님, 지난 시절을 회고해볼 때
과연 인생이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 라는 질문에
[ 인생이란 사랑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사랑가운데 거하고 사랑을 주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요?
사랑을 주지 못하면 죽은 것입니다. ]
형제사랑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관속의 신자일 뿐입니다.

그럼 참된 사랑은 우리의 삶에 어떻게 나타납니까?
3. 참된 사랑은 우리의 삶에 어떻게 나타납니까?(17-18절)

17절 [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
실제적인 사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성도들이 이 세상 재물로서 곤궁에 처한 형제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속에 있다고 어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도 약2:15-16절에
[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 ]

사랑이 만약 이론과 지식에만 머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함은 믿음의 실천이듯이 사랑은 실천이 함께 할 때 진실한 사랑이 됩니다.
사랑의 진가는 바로 실천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도 행함으로 나타나야 참된 사랑입니다.

특히 18절은 사랑의 성격을 제시합니다.
[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사랑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이루어집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따르지 않는 사랑은 위선입니다. 여기에 행함은 사랑의 역동적인 측면을 말하는데 <6>
사랑이란 항상 행동과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진실"이란 사랑의 질적인 측면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거짓된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전13:4-5절 [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사랑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 그 자체로 행할 때 사랑입니다.

중국의 선교의 문을 열었던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어느 날 고곡에 돌아와서 젊은 선교사 후보들을 접견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지에 더 많은 선교사 후보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고사 지망생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 당신들 무었 때문에 선교사로 중국에 가려고 합니까? ]
한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 중국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
또 어떤 청년은 대답합니다.
[ 그것은 중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
또 어떤 청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가기를 원합니다. ]
그 대답을 다 듣고 허드슨 테일러가 대답했습니다.
[ 여러분의 대답 모두가 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대답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만으로는 당신들의 삶의 역경과 선교의 어려움 속에 크게 부딪히면 흔들리고 말 것입니다. ]
이 대답을 듣자 그 중의 한 후보생이 허드슨 테일러에게 이렇게 되묻습니다.
[ 그렇다면 선교사님은 무슨 동기로 중국에 가셨습니까? ]
[ 내게 있어서는 한 동기밖에 없습니다. 중국인을 사랑해서입니다. ]
사랑에는 더 이상 포장할 것이 없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수님의 글이 기억납니다.
자기에게 가장 기억에 남은 학생은
어느 날 자기에게 쪽지 한 장을 던져주고 갔는데 그 쪽지에
[ 선생님이 좋아요 기냥, ]
평생 잊혀지지 않는 학생이라는 말에 저도 공감을 합니다.
저도 한 번 들어 본적이 있어요, 목사님 기냥요,
사랑에는 기냥입니다.
다른 어떤 조건이 따르면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실천하게 될 때 <7>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4. 사랑의 실천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떤 유익을 가져다줍니까?(19-22절)

1) 주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습니다.
19-21절이 말하고 있는 바는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마음을 주님 앞에서 굳세게 합니다.
"굳세게 한다"는 것은 "확신시킨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함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들임을,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서 확신하게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진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할 때는 우리 마음이 스스로를 책망할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담대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따라 형제를 사랑할 때면 우리 마음이 떳떳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는 담대함을 얻을 것입니다.

이럴 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2) 기도의 응답입니다.
22절 [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주의 계명대로 사랑의 손길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구하는 모든 것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하니
하나님도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럼 주의 계명을 따라 산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5. 주의 계명을 따라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말합니까?(23-24절)

사도 요한은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제시합니다.
23절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사실상 분리되지 않습니다.
믿는 자는 또한 형제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신학자 <리처드 니버>는 <8>
신학자로서 자기가 말 하고 싶은 최선의 말은
인간의 이상형으로 예수를 본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누구나가 닮고 따라야 할 인생의 정도가 곧 예수라고 하면서
그분의 전생에 속에서 두 가지를 본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이며,
또 하나는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인간을 사랑하면서 사는 길이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 같은 자에게 24절에 주님은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이 누리는 최대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동거입니다.
24절 [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거하는
초대의 복된 삶이 내게 주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참된 사람의 결과요 진가임에 눈이 뜨여지시기 바랍니다.
<결론>
상담학자인 데이비드 씨멘즈(David Simans)란 분이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기고한 글 중에
일생동안 많은 사람들을 상담했는데
그의 많은 경험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 나는 오랫동안 많은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정서적 문제의 주요원인은
첫째는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를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둘째는 그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베풀 줄 모르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을 베풀면서 참 사랑을 깨닫고 배우게 돼있는 것인데
베풀지 않으니까 받은 사랑도 모르게 되더란 것이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참된 사랑의 손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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