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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전신갑주 시리즈(2) : 의의 흉배 (엡 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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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보호해 준 성경

영국의 정치가 중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크롬웰은 왕권파와 맞서 공화정치를 추구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영국 왕 찰스 1세가 백성들을 무시하고 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탄압할 때 크롬웰은 청교도 신앙으로 무장한 군대를 거느리고 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공화정치를 폈던 사람으로, 지금도 영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 중 하나입니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면서도 전쟁터에 직접 나가 싸울 때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두려움 없는 용맹함은 어디서 왔을까요? 1657년 영국 의회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왕위에 오르도록 권고했으나 크롬웰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권력을 마다하고 왕위를 싫다고 하겠습니까마는 도대체 크롬웰의 이 겸손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 대답은 바로 그의 신앙입니다. 크롬웰은 철저한 청교도 가정에서 신앙 훈련을 받으며 자란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늘 크롬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편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편에서 일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일과 성경 읽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철저한 신앙 속에서 자란 그는 늘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에 힘썼고 전쟁터에서도 틈틈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치열한 싸움터에서 크롬웰은 총알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땅에 떨어지면서 그는 ‘이제 마지막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픈 곳도 없었고 몸에 아무 이상도 없었습니다. ‘웬 일일까?’ 하고 살펴보니 총알이 주머니에 있는 성경에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총알이 멈춘 곳을 펴 보니 전도서 12장 1절이었는데 이런 말씀이 써있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늘 하나님을 기억했더니 하나님이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가 옛날 청년부 활동을 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청년부에서는 군대에 가는 청년들에게 늘 포켓용 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군복 윗주머니에 쏙 들어갈 만한 자그마한 가죽 성경이었습니다. 제가 이래 뵈도 청년부 회장이었는데 회장으로서 그 성경을 선물로 줄 때마다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성경은 심장보호용입니다. 이 성경을 군복 왼쪽 윗주머니에 언제나 넣고 다니세요. 그러면 총알을 맞아도 당신의 심장을 막아 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물론 오늘날은 워낙 총알의 위력이 커서 아무리 두꺼운 성경이라도 절대 총알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물론 그 성경이 크롬웰처럼 총알을 막아줄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늘 성경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는 것은 그 병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대로 하나님이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그를 반드시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녀들이 군대에 갈 때 꼭 성경을 하나 사서 주머니에 넣어주십시오. 성경이 절대 부적은 아니지만 그 말씀이 우리 자녀를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왜 흉배(호심경)인가?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의의 흉배를 붙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이 의의 흉배가 사도 바울이 말씀한 하나님의 전신갑주에서 두 번째 무장에 해당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도 바울은 당시 로마 군인들의 무장을 보고 이 말씀을 한 것인데 흉배란 가죽이나 금속으로 만든 가슴 가리개를 뜻합니다. 이 흉배는 목에서 허리까지 가리게 되어 있는데 주로 가슴과 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람이 다른 곳을 칼로 찔려도 어느 정도 살아날 가능성이 있지만 급소인 심장을 찔리면 무조건 죽습니다. 그래서 싸움터에서도 이 심장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흉배는 심장을 보호하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보호할 ‘호,’ 심장 ‘심’ 자를 써서 호심경(護心鏡)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경주박물관에 가보니 신라시대나 가야시대에 쓰건 갑옷에도 호심경이 달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만큼 심장이 중요한 것입니다. ‘심장’ 하면 곧 생명이라는 의미와도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의의 흉배’를 두 번째 전신갑주로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 의(義)의 흉배인가?

그러면 왜 본문은 ‘의의 흉배’라고 했을까요? 조금 전 설명한 대로 흉배는 심장을 보호하는 호심경이요, 심장은 곧 생명을 뜻하므로 ‘의의 흉배’라 하면 의(義)가 적의 공격으로부터 우리 생명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이 ‘의’가 무엇이냐가 중요하겠지요? 여러분, 의란 무엇일까요? 옳을 의(義) 자를 쓰기 때문에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는 방법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로마서 3:10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인간 가운데서는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 인간이 아무리 애를 쓴다 해도 절대 인간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지난 2003년 8월 강원도의 한 해수욕장에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윤 모 군이 같은 학교 친구 5명과 물놀이를 하다가 큰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친구를 보게 되었습니다. 윤 군 자신은 무사히 밖으로 나왔지만 파도에 휩쓸린 친구를 보고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사경을 헤매던 친구는 윤 군이 물속에서 어깨로 자신의 발을 받쳐주어 무사히 해안까지 헤엄쳐 나왔지만 윤 군은 빠져나오지 못한 채 파도에 휩쓸렸고 윤 군은 실종된 지 1시간이 지나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린 사람을 의사자(義死者)라고 부릅니다. 옳을 의(義), 죽을 사(死) 자를 써서 ‘의롭게 죽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의사자가 되면 국가에서 배상을 받을 수 있는데 처음에는 이 작은 아이가 도대체 어떻게 친구를 구하냐며 인정해주지 않다가 2년이나 지나서야 윤 군을 의사자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남을 위해 죽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이들의 죽음을 사람들은 ‘의로운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 인간의 힘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는 어떠한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도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심지어 앞서 말한 대로 남을 위해 죽는다 해도, 남을 위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고전 13:3).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죄인이 의롭게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본질적으로 죄인인 인간은 의로워 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칭의’(稱義)라는 방법을 생각해 내신 것입니다. 즉 본질적으로 의롭게 될 수 없는 죄인을 의롭다 칭해주시는 방법입니다. ‘칭의’는 법정인 용어로서 ‘무죄방면’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기록을 보시니 거기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수많은 죄 때문에 우리는 사형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의 기록을 삭제하십니다. 그리고 그 빈 칸에 예수님의 의(義)를 기록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으로 보십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17에서 하나님은 “저희 죄와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참소(讒訴=중상모략)하는 자인 사탄이 하나님 앞에 와서 나에 대해 “이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그의 삶은 온통 죄뿐이에요. 이 책(사탄이 가진 죄 목록 책)을 보세요. 이 사람의 추악한 죄가 페이지마다 가득해요.”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이 가진 책을 펼치시고 “이 사람이 평생 어떤 죄도 저질렀다는 기록이 내게 없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인간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예수님의 의가 전가됨으로 우리는 의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공격할 때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심장을, 즉 생명을 보호하는 흉배가 됩니다. 사탄의 공격은 너무도 강력해서 도저히 우리 힘으로는 견뎌낼 수 없습니다. 사탄은 특히 우리의 심장을 노립니다. 죄라는 날카로운 칼로 우리 심장을 찔러서 완전히 사망에 이르도록 만들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칼날로부터 우리 심장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의의 흉배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라는 흉배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 심장을 보호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아예 우리 심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변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다같이 빌립보서 1:8을 찾아 읽어봅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의가 흉배가 되어 내 심장을 보호해주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내 심장 자체를 이식수술을 했다는 것입니다. 전에 있던 내 심장은 들어내고 거기에 대신 예수님의 심장을 이식수술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생깁니까? 예수님의 심장은 뜨거운 심장입니다. 특히 사랑만 생각하면 뜨겁게 타오르는 심장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예전에 죄인인 우리를 살리려는 사랑으로 심장이 십자가 위에서 터져버려 붉은 피를 다 흘리고 죽으신 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랑으로 불타는 예수님의 심장을 내 안에 가지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사도 바울이 오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증인이 되신다”고 고백한 것처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면 우리도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됩니다.

심장 중에서 최악의 심장, 가장 안 좋은 심장은 미지근한 심장입니다. 요한계시록 3:15~16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하니하도다.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습니다. 물론 차가워서도 안 되겠지만 미지근해도 안 됩니다. 아주 뜨겁지 않으면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없고 토하여 내쳐지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주님은 잘난 사람, 공부 많이 한 사람, 부자인 사람, 세상적인 조건을 두루 갖춘 사람이 아닌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을 찾으십니다.

제가 올해 초 제직수련회 때 특강을 하면서 아주 짧은 시 한 편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참 재미난 시입니다.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저는 이 시를 쓴 분이 교회에 다니는지는 모르지만 참 성경적인 시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얗게 타서 버려진 연탄재는 그래도 한 번은 누군가를 위해 뜨거웠던 적이 있는데 너는 어떤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단 한 번도 뜨거워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연탄재라고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뜨거운 심장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주님을 위해 뜨거워 본 적이 없는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뜨거워 본 적이 없는 사람이면서 연탄재 발로 차듯 남이나 판단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정말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는 이 뜨거움이 있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 속에 주님의 일을 하고 그 분께 충성하려는 열정이 있습니까? 한 사람의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주님의 심장이 내 속에 있습니까?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교회 직분은 권사, 안수집사, 장로로 올라가는데 이 뜨거운 심장을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너무도 냉랭합니다. 너무 이성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물론 우리가 마냥 뜨겁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뜨거움과 더불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자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뜨거움이 없는 이성이 가장 위험합니다. 주님의 일을 자기 이성과 기준만으로 판단하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이 분들의 말은 물론 틀린 것이 하나도 없고 구구절절 옳습니다. 하지만 옳은 말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의(義)는 분명 중요하지만 사랑 없는 의(義)는 아주 위험합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대개 교회에서 제3자가 되거나, 구경꾼이 되거나 심지어 심사위원이 되려고만 합니다. 그 속에 들어가 직접 일하는 것이 아니라 연탄재 발로 툭툭 차듯이 판단만 하고 평가만 하고 냉소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많으면 교회가 불행해지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제일 불행해 집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교회 다니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세월 동안 뜨거웠던 적은 얼마나 있습니까? 정말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뜨겁게 헌신하며 충성하고 정말 예수를 뜨겁게 믿었던 적은 얼마입니까?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을 뽑으러 갑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집에 가서 그 아들들을 선보는데 맏아들 엘리압을 보니 용모와 신장이 과연 왕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십니다. 7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여호와는 무엇을 보신다고 했습니까? 용모와 신장, 겉모습이나 조건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심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레바브’ 즉 마음, 심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쓰고자 할 때 겉모습이나 조건이 아니라 우리 심장을 보십니다. 심장을 어떻게 보시는가?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지 보십니다. 우리 심장에 온도계를 꽂아 심장의 온도를 재보십니다. 심장이 뜨거워야 합니다. 중심이 불타올라야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의의 흉배로 우리 심장과 생명을 지킬 뿐 아니라 우리의 심장에 손을 얹고 온도를 재봅시다. 내가 정말 주님을 위해 자신을 태울 그런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인지 말입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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