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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낮아져야 합니다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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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헨리 누엔’이라는 박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어느 날 갑자기 교수직을 버리고 지체장애자 수용소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살며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인기 있는 교수가 자질구레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그리해야만 했느냐?" “꼭 그렇게 해야만 했느냐" “그런 일은 당신이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인데... 혹시 위선이 아니냐?”하면서 별의 별 질문공세를 했습니다만 누엔 박사는 이에 대해서 일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을 지키던 그가 오랜 세월 후에 책을 한권 썼는데 “In the name of Jesus” 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책에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밝혔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오르막길만을 추구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오르막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는 ‘천재 신 동아’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결국은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교수직에 있으면서 20여권이 넘는 많은 책을 썼습니다. 모두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기와 명예와 부를 함께 누리는 삶을 지금까지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지체 부자유한 ‘아담’군을 만나면서부터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다 는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그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는 진정 예수님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쌓아 올린 그 모든 특권들을 다 내던지고 장애자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오르막길에서는 안 보이던 예수님이 내리막길에서는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내리막길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거기서 그들과 함께 살면서 진정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서 비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요, 엄청난 사건이요, 참으로 본받아야 될 진리요, 성경의 비밀을 체험한 것을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직까지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마음에 감사와 감격이 없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하면서 흔들리고, 갈등이 생기는 이유가 어디에 있고, 참된 신앙의 열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문제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고로 사람은 ‘헨리 누엔’박사님처럼 겸손하고야 예수님을 바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는 고 하니? 사람이 겸손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사실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던가요?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내가 배우고서, 가지고서, 존경을 받으며, 누리면서 겸손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겸손할 수 밖에 없어야 겸손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 유명한 <신곡>을 썼던 '단테'는 "자기에게 있는 죄 가운데 가장 길들이기 어려운 죄는 '교만'이었음"을 술회하고 있습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겸손과 은혜는 비례한다는 사실을 혹시 알고 계십니까? 분명히 성경을 통해 알려드리지만 '겸손한 만큼 은혜를 받습니다.' '낮아진 만큼 하나님은 높여주십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창조적 질서의 법칙'입니다.

그 유명한 '성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수사학자로서 웅변술의 제 1법칙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자신은 서슴없이 그것은 '발음'이라고 대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제2의 법칙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것도 '발음'이라고 대답하겠다고 했습니다. 제3의 법칙을 묻는다면 그 역시 '발음'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의 제1, 제2, 제3의 법칙은 '겸손'임을 강조했습니다. 그 만큼 겸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도 한마디로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실천하신 위대한 삶에 대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주셨다는 내용입니다.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이 낮아짐이 없이 높아지겠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심은 것도 없이 거두겠다는 강도의 마음이요, 땀 흘림도 없이 거두겠다는 불한당의 마음인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만을 바라는 신자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그저 편하게 예수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만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스스로 기만하다가 결국 신앙인으로도 바로 살지 못하고, 천국을 가로막는 자가 되어 가장 불행한 삶을 사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비극적인 사실입니다. 이 악한 세대를 그래서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알곡과 쭉정이가 같이 있고, 양과 염소가 같이 있다고, 어리석은 신부와 지혜로운 신부가 같이 있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통계에서 나온 불행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대 교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찬송이 무엇이냐? 라고 한다면 바로 355장이랍니다. 특히 3절은 안 부르겠다고 해서 아예 3절에 가서는 입을 다문다고 합니다.“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다.”

우리는 이 찬송을 부를 때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하여 불렀는데, 이 계산에 빠른 현대교인들은 아니올시다. 입니다. 싫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멸시천대를 당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Why Me? 왜 하필이면 내가 멸시를 당해야만 하느냐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이 땅에서도 존귀 영광 모든 권세를 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반대로 작사해서 부르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내가 홀로 받으리다. 멸시천대 십자가는 주님 지고 가십시오.”

낮아짐이 없이 저마다 높아지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데 은혜를 받지 못하고, 성도답게 바로 살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저 오로지 이 땅에서 손해 안보고 영광만을 누리겠다는 생각들입니다. 그것도 심은 것 없이 거두겠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도 없이 영광만을 누리겠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신앙인으로서의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가겠다는 신앙이 아니니 천국에서 주님이 내가 너를 도무지 안지 못하신다고 하셨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그 일지기 본회퍼라는 독일 신학자는‘값싼 은혜’라고 정의 했습니다. 현대인들이 너무 값싼 은혜만을 추구한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말입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영광스러운 주님만을 생각합니다.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실 주님만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본문 9절 이하만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였다는 것만 좋아합니다. 그래서 나도 높아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극히 높여지기까지에는 접속사‘이러므로’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바로 앞에 나오는 어떤 내용에 대한 결과입니다. 그 앞 절에 나오는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낮아지셨다는 이야기입니까? 대강절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여 오늘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하여 상고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근본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즉 능력에 있어서나, 자격에 있어서나, 인격에 있어서나, 영광의 있어서나, 지위와 본성에 있어서도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종속설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능력이 많으시고, 제일 높으신 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그 두 번째이고, 성령님이 세 번째라는 생각입니다. 맞는 생각입니까? 여러분들도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것은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능력과 영광과 본성과 주권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셨다구요? 어떻게 낮아지셨습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본문 7절에서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다.”고 말씀 합니다' 종의 형체'(모르펜 둘루)를 가지신 주님은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의 몸으로 오셨고, 심지어 종의 몸으로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었다."는 표현은 ‘에케노센’입니다. 이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empty'로, 현대인의 성경에서는‘포기했다.'로, 현대어 성경에서는 ‘버리셨다.’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였다.
2) 독립적인 권위 행사를 포기하였다.
3) 하나님의 대 권적(大權的) 권능을 포기하였다.
4) 존엄과 주권의 표지(標識)를 포기하였다.
5) 하나님의 속성 즉 무소부재, 전지전능 등을 포기하였다. 위의 견해들 중 세 번째가 타당합니다.

그렇습니다. 문제의 촛점은 그가 '무엇을 비었는가?'에 있습니다. 무엇을 포기하시고 버리셨는가에 있습니다. "그는 근본은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 됨의 영광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본래의 형체를 포기하시고, 그 높으신 분이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종의 몸, 종의 신분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종의 자리까지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종의 외적인 모습을 취하셨거나 종으로 가장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의 본질적인 속성을 취하셔서 종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당시의 종은 한 마디로 사람이 아닙니다. 종과 짐승의 차이가 있다면, 한쪽은 말 귀을 알아듣는다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뿐입니다. 그 외에는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물건 취급을 받는 것이 당시의 종의 형편이었습니다. 여기에 인권이니, 생존권이니, 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철저하게 자신의 권리가 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마굿간'에 태어 나셨습니다. 우리는 마굿간 하면, 감상적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려서 시골에서 자라면서 소를 먹여 본 경험이 있기에 마굿간이 어떤 곳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사람 잘만한 곳도 못되고요.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심지어 종들도 이런 곳에서는 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거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33년간의 생애를 그대로 대변해 주는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평생을 섬김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본 절의 '종'은 11절에 나타난 고양된 그리스도이신 '주'와 대조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자신의 권리나 특권을 포기하여 '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음을 시사 합니다(막10:45;눅 22:27). 이것을 마가는 이렇게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막 10:45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기려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이처럼 섬기는 종의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할렐루야!


2. 사람이 되심으로 낮아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 7,8절에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의 말씀에서 '같이' 의 헬라어 '호모이오마티'는 '유사함'(similarity)이나 '동일함'(identity)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의 본성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다른 모든 인간들과 같이 되셨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카네이션 사건입니다. 성육신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했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었는데 자신을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제2의 아담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된 인간의 삶속에, 구체적인 인류의 역사속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문화와 습관의 옷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사건 자체가 엄청난 '자기희생',' 자기비하', '낮아지심의 극치'였습니다.

혹시 성도 여러분 가운데 '다미안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신분 있습니까? 평생을 문둥이들과 함께 살다가 죽은 사람 말입니다. 그는 본래 부자요. 귀족이요. 학자 출신이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여행 중에 문둥이들이 모여 사는 <몰로카이 섬>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몰로카이는 '하와이의 많은 섬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기서 그는 문둥이들을 보고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그들을 위해 살리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 많은 재산을 다 정리하고 섬으로 가서 선교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영육간의 치료사역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혀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건강한 사람이 사치로 돕는 것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도우며 즐기는 것 반갑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받아들이지를 않자, 그가 하나님 앞에 마지막으로 무슨 기도를 한줄 아십니까?

“하나님이여,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시옵소서. 문둥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결국 기도대로 문둥이가 되어 그 섬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더니만 그 제서야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더랍니다. 문둥이가 되어서야 비로써 저들과 커뮤니케이션이 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에는 '많은 희생'과 '포기가 필요 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신이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여기에는 엄청난 희생을 각오한 것입니다.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자리를 포기하셔야 했습니다. 빛나고 높은 보좌를 내어 놓으셔야 했습니다. 섬김을 받으시던 그 영광을 모두 포기하셔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래 여기서 '아픔의 신학'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과 천대와 멸시와 배반과 십자가 처형당하심을 위해 죽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진정한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모습이 육신으로 태어남에 있습니다.


3. 십자가의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 8절에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아지심에서 잘 드러납니다. 영화로우신 분께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지극한 겸손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겸손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발적인 순종 가운데 십자가를 지는데 까지 나아갑니다.

어디까지 자신을 낮추셨느냐구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의 자리까지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흉악범을 죽이는 사형 틀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의 극치'입니다. '자기 비하의 크라이막스'였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요, 수치의 상징이요, 저주의 상징이요, 절대복종의 상징이요, 그리고 낮아짐의 상징입니다. 그 이상의 낮아짐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도 문선명 집단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는고 하니? 예수님의 실패작으로 이해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고 하다가 서른 세 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패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선명 집단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능력이 모자란 것도 아니요, 무능력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우리 위해 대신 죄인 되어 죽어 주셔야 구약의 소죄제물, 세례요한의 세상 죄를 지시는 대속의 사역,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으로의 뱀의 머리를 상하시는 인류 구원이 성취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저주를 받은 자가 선택하는 십자가에 죽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신 십자가의 죽으신 사건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는 최후의 사랑의 확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낮아지셨다는 것입니까? 낮아지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①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한 것은 '빌립'만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고자 했고,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체가 없으십니다. 형상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곧 우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위대한 결단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성육신(육신을 입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 사건이었습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든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더냐?”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이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우리의 눈을 가지고 그 영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만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처럼 감격스러운 사건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우리에게 이같은 감격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②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체적으로 사랑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구체적인 사랑하심이 십자가 속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보면 그렇습니다. 어른들만 살던 가정에 아기라도 태어나게 되면, 온 가정 식구들이 그 어린 아기 수준에 맞추어서 살아감을 봅니다. 더욱이 손이 귀한 집안일 수록 더 요란합니다. 마치 세상에서 자기들만 자식 얻은 것 모양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 돌  잔치 하는 것을 보면, 마치 한갑 진갑을 방불케 합니다. 저는 그런 곳에 갈 때 마다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곤 합니다. 어쨋든 보세요, 아이가 태어나므로 해서 가정의 분위기부터가 달라지게 됩니다. 식사 때에도 모든 식구들이 맘마로 통하게 됩니다. '진지'나 '식사'라는 말은 온데 간데 없어 지고 '맘마'만 남게 됩니다. 한마디로 유치해 지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이렇게 유치해 져야 아이를 이해 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기 대문입니다. 그것은 참된 내리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유치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의 언어가 아닌 어린 아기의 언어를 쓰게 되고, 나의 수준이 아닌 어린 아기의 수준으로 돌아가서 그를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위 '눈높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도, 육신의 몸을 입으심도 여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극진히 사랑하기 때문이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보좌위에서 우리를 올라오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친히 육신을 입고 사람의 몸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 속에 지극한 사랑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③ 우리를 높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했습니다. 지극히 높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립소센'은 '휘페르'('위로')와 '휩소스'('높은 곳')의 합성어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 지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겸손과 수치스러운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부활과 승귀(昇貴)를 통해 영광에 이르도록 높이셨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높이셨습니까?

본문 9절에 보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심으로" 예수님을 높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명예입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심으로" 예수님을 높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권세입니다. 최고의 권세를 누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모든 무릎이란? 하늘에 있는 존재들이나, 땅에 있는 존재들이나, 땅 아래 있는 존재들까지도 다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에수님의 권세아래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또한 본문11절에 보면, "모든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케 하심으로" 예수님을 높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11절에 나오는 '주'는 그리스도께서 전 우주를 다스리시는 주권을 소유하신 '주'이심을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에푸라니온), '땅에 있는 자들'(에피게이온) '땅 아래 있는 자들'(카타크도니온)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명예로, 권세로, 영광으로' 높여주셨습니다. 저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얻게 되었으며, 저가 모욕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저가 낮아지심으로 우리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내 영광이 되고, 예수님의 권세가 바로 내 권세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낮아지시고,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류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실천을 하신 것입니다 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여기 나오는 세 가지는 모두 수동태라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내가 내 이름을 뛰어나게 했고, 내가 많은 무릎을 내게 꿇게 했고, 내가 나를 주로 시인케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체는 누구라구요? 본문 9절에 보면,“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지는 일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그를 높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은 하나님이 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그 잘난 일을 하나할 때에도 돌아올 보상부터 생각하고 일을 합니다. 칭찬과 명예부터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바칠 때에도 만 배 천배 보상을 생각하면서 바치고 있습니다. 내가 바치고 내가 얻겠다는 심사입니다. 교회 안에 많은 성도들의 선심과 바치는 동기가 순수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일은 겸손이요, 순종이요, 섬김이요, 낮아짐입니다. 나머지 일체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벧전 5:6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따라합시다. "내가 할일은 낮아지는 일입니다." 그러면 때가 되어 나를 높여주실 분은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만큼 높여 주십니까? 낮아진 만큼만 입니다.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하나님은 그만큼 높여 주실 것입니다.

어느 기자가 존경받는 성자에게 물었다고 합니다.“지금까지 평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남의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이때 성자를 힘들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은 겸손해 지는 일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이 이렇게도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힘들다는 이야기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또 한 가지는 <힘든 만큼 은혜가 주어진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선한도구가 되고 싶고, 충성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위해 낮아지신 예수님을 그 모델로 삼고, 겸손을 몸소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주님을 만날 수가 있고, 성령을 받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겸손케 하시는 은혜가 이 시간에도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귀한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시고, 귀한 예배로 하나님을 섬기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결심할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니 신앙생활 하면서 낮아져야 하고, 섬겨야 마땅한 줄 알면서도 섬김만 받으려 했던 어리석음과 교만을 고백 드립니다. 교만이 죄인인줄 몰랐던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기어 주시옵소서.

주님을 믿고 따르노라고 하면서도 주님 중심의 신앙으로 십자가를 자랑하고, 하나님을 높여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내 중심의 이기적인 마음 가지고, 나를 나타내며, 내가 항상 인정받는 자리만 좋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생각했음을 고백 드립니다.

이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의 삶을 본받아 '겸손과 온유'의 삶을 사신 모습을 따르며, 살아가신 발자취를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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