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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과 요나단 (삼상 1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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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친구의 우정이 나타나는 대목입니다. 이이야기는 오늘날과 같이 이기적 일변도의 세상에서 동화책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 이유는 우정을 나누어야 될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적수라는 점입니다. 그가 승리하면 나는 패할 수 밖에 없고 그가 패해야 내가 성취할 수 있는 미묘한 관계에 있는 상황에서 생명을 가름하는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사소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왕권이 달려있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숙명적 관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감동적 이야기가 전설이 아니고 사실이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로 오랫동안 남아 아름다운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이와 관계된 세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리고 다윗입니다. 이 세 사람의 관계 속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 관계를 움직이고 계심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 설명이 필요한데 이때는 이스라엘의 국가적 운명이 매우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사사통치가 지나고 왕정통치의 새로운 정치제도가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초대 왕이 되어서 국가 운영의 질서가 매우 혼란한데다가 그 틈을 타고 이웃의 블레셋이라고 하는 강한 종족이 나라를 자꾸만 침략하는 바람에 국민들은 매우 불안해 했고 사울 왕은 국가 안보 문제에 대해서 능력 있는 정치를 발휘하지 못해 국민들에게 신뢰를 받기 어려운 그런 입장에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골리앗 대장이라고 하는 침략자의 키가 성경에 보면 아주 크다고 나오는데 도대체 그 키가 얼마나 되었나 연구한 학자들이 있습니다. 골리앗 장군의 키는 계산해보면 2미터 75센치미터 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장수 하나가 나타나 블레셋 군대를 이끌고 나라를 자꾸 침략해 오니까 불안해졌단 말입니다. 골리앗 대장에 비해서 사울은 이때 많은 늙은 때입니다. 자기 몸 하나 보호하기에도 힘든 나이라 국가의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너무나도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욕심이 많아지고 하나님 말씀도 잘 듣지를 않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국민의 최대의 위기를 민첩하게 구해낸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국민들은 다윗을 국민적 영웅으로 추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그 나라에는 여인들 간에 즐겨 부르는 민요와 같은 노래가 생겼습니다. 오늘 성경말씀 6~7절에 나타납니다.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이 대목은 이미 국민의 마음은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로 가 있다는 표현입니다. 국민의 마음이 이렇게 되니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8절에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옛날에는 임금 마음의 불쾌지수에 따라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고 사람의 생명이 죽고 삽니다. 사실 이 문제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나 대통령은 최종 결정권자가 됩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를 폭격해라!” 하면 하는 것이고 “그만 해라!” 하면 그만 하는 그러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통수권자 한 사람의 마음 방향에 따라서 국가 운명이 좌우됩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를 우리가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까? “대통령의 불쾌지수는 국민의 행복과 직결되어 있다. 옛날은 더 심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사울은 자기와 국가를 구원해 낸 다윗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질투심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나라는 이제 험악한 고난의 역사를 겪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시간을 놓칠세라 간교한 악령이 사울을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이 악령의 역사는 영리하기 때문에 언제나 불평과 불만이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도 가만히 보니까 가룟 유다의 마음이 제일 불편합니다. 혼자만 지역이 다르거든요. 그래서 소외감이 있었고 성경에도 제일 불평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악령이 그를 잡고 일을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이 “사울이 악신에 들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울은 악령의 노예가 되어서 악령이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 시키는 일이 무엇인가? 다윗을 죽이는 것입니다. 국가의 일등공신, 나라를 구원하고 사울 왕을 구해준 사람을 죽여 없애는 일을 하라고 악령이 시키니까 그렇게 합니다. 오늘 말씀에 임금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창을 던져 벽에 박으리라.” 이런 말씀이 아주 직설적으로 표현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로부터 대략 13년 동안 사울은 미친 듯이 국가 권력을 동원해서 다윗 죽이기에 나섰고 다윗은 도망을 다닙니다. 아둘람 동굴과 블레셋 망명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다윗이 어떻게 사울의 손에서 살아날 수 있었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신의 역사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리신 이 ‘악신’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범위 안에서만 역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욥기서에서 배웠습니다. 사탄이 하나님 앞에 요청을 합니다. “욥을 내게 맡겨주십시오. 내 맘대로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래라! 그러나 생명에는 손을 대지 말아라! 그것은 내 관할이다.” 그러니까 악령의 역사는 하나님이 정해주는 그 한도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하나님의 영은 이제 다윗과 함께 하시게 되고 악령은 사울과 함께 하는 이런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사실 다윗은 이때를 생각하면서 지은 시가 그렇게 유명해 졌습니다. 시편 23편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아둘람 동굴 속에 있을 때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악령의 영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이 부리시는 권한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믿음 하나로 고난의 13년, 아둘람 동굴의 망명 생활을 이겨내는 다윗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왕이 된 이후 신앙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여 이미 15장에서 사무엘 제사장의 저주 예언을 받은 바 있습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심판이 당신에게 임할 것입니다.” 저주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무엘 제사장은 16장에 와서 목동 다윗을 만나서 그에게 안수 기도로 축복 기도를 해줍니다. 16장 13절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그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하니라.” 사무엘의 기도를 받고 그날 이후로 이런 말씀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다윗과 이제 악령의 노예가 된 사울이 되는데 그 사실을 누가 알았는가? 사울 왕의 장남 요나단이 지혜롭게 영적으로 그것을 판단해 냅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을 버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을 선택합니다. 요나단 때문에 다윗은 살아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서 아버지 뒤를 이어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욕심대로 한다면 아버지와 함께 힘을 합쳐 다윗을 죽여 버리고 자신이 젊은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올라야 합니다. 왜 요나단이 그런 자리를 버리고, 더구나 아버지를 배반하면서까지 다윗을 도왔단 말인가?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으므로 내가 아무리 왕이 되고 싶다 하여도 이미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은 다윗에게 가 있도다. 목동의 신분으로 강대국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친 국가 구원의 이 사건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신 결과이다.

이 나라의 최고의 제사장 사무엘이 이미 다윗을 불러 기름 부어 왕을 삼는 작업을 끝냈는데 하나님이 어찌 그 자리를 내게 주실 것인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하나님의 역사의 손은 다윗에게 가 있으므로 내가 무슨 능력과 힘을 가지고 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거역할 수 있단 말이냐? 하나님은 다윗에게 계시다.’ 이런 것을 가지고 신학적 용어로는 “사도적 관찰”, “영적인 시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을 볼 수 있는 능력 즉,‘영력’ 요즘 말로 ‘영성’이라고 합니다. 요나단이 아버지인 사울 왕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왕은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왜 아버지를 구원하고 나라를 구원하고 선한 일만 한 다윗을 죽이려 하십니까?” 오늘 말씀 4절에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이 구절은 왕자인 요나단이 자신의 모든 권리를 다윗에게 이양하였다는 말입니다. 왕자가 입는 옷은 아무나 입는 옷이 아니요 구별된 옷입니다. 그리고 허리띠는 황금 띠로서 왕자만이 하는 표시가 됩니다. 왕자가 가지고 있는 칼은 어검이라고 부르는 임금의 하사품이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왕자의 자격을 요나단이 다 벗어서 다윗에게 입혀줍니다. “네가 이 옷을 입고 이 칼을 들어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는 날 이 나라의 왕의 자리에 올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선한 왕이 되라. 나는 너에게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이 있음을 이미 보았노라.”

우리나라 조선 500년 역사는 가장 추악스러운 역사였다고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유난히 빛이 나는 임금이 한 사람 나타나죠? 세종대왕입니다. 어떻게 그가 그렇게 되었는가? 양녕대군이 자기의 권리를 세종에게 양보하므로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수천 년 역사 가운데 다윗 통치 40년이 가장 빛난 역사로 남아서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영광의 회복은 다윗 시대의 회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기는 흰 바탕에 별 하나를 그려 ‘다윗의 별’이라고 지었습니다. “영원히 빛나라.” 그런 뜻입니다. 요나단의 훌륭한 마음 결정이 혼란기 국가 구원에 결정적 역할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나라는 블레셋의 영원한 식민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다윗은 다윗 속에 들어있는 요나단이 왕 노릇한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친구 간에 깊은 우정이 아름답게 표현이 됩니다. 그러나 그 우정의 배경에는 하나님이 이 두 사람의 관계를 간섭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는 사울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을 요나단이 바로 관찰할 수 있어서 되어진 일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을 영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마지막 청산하고 마지막 어려운 과제가 이 여리고 성을 함락시켜야만 되는 쉽지 아니한 전쟁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사실 이 여리고 성은 유대 나라에서 제일 살만한 땅입니다. 비옥한 땅이라 채소가 많이 나고 과일 나무가 많고 지금도 바나나 나무가 척척 늘어져있고, 야채 가게에 가면 야채가 산더미같이 있고 과일 가게에 가면 과일이 산더미같이 있고……. 그러니까 이 곳을 점령하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침략을 해서 여리고성이 있는 것입니다. 전쟁도 먹으면서 해야지요. 그래서 여리고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장군이 정탐꾼을 보내서 정탐을 합니다. 그때 만난 사람이 그 땅에 사는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기생이 활동할 수 있을 만큼 먹고 마시는 것이 넉넉한 땅입니다. 그래서 여리고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성에는 기생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이 라합이라고 하는 기생을 만나지 아니하였다면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때 여리고에는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이 여리고 침략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이냐?” 그래서 여리고 성은 지금 초비상사태에 있습니다. 이 정탐꾼들도 머리가 비상합니다. 인종이 좀 다른 사람들이 보이면 금방 발견이 됩니다. 의심을 받습니다. 아무 데나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생집은 아무나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기생집을 찾아간 것입니다. 결국 이 기생 라합이 자기 민족과 자기 국가를 배반하고 정탐꾼을 선택하므로 하나님의 역사 진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는데, 라합이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는가? 여호수아 2장 8~11절에 보시면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렇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이 있는 당신들에게 이 땅에 누가 당하랴? 당신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사도적 관찰입니다. 그래서 그의 역사관이 바뀌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은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라.” 어떻게 그런 사도적 관찰, 영적 능력이 기생에게 주어졌는가?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나온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건너온 사건을 내가 이야기를 들었노라. 아모리 족속과의 전쟁이라든가 이런 것은 하나님의 초능력의 역사의 손길이 당신들에게 있기 때문에 되어진 일이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당신들을 누가 당할 수 있겠소?”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이 기생만도 믿음이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기생만큼은 볼 수 있어야 ‘아!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면 “사람의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하셨는데, 그러면 친구를 위한다고 의롭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의롭지 못한 친구를 위한 죽음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히려 불의의 세계가 친구의 우정은 더 깊을 수가 있습니다. 깡패의 집단이라든가 불의한 세력의 조직이라든가 미국 같은 경우 마피아 집단이라든가 이런 친구들은 정말 같이 죽고 같이 사는 생사를 초월하는 힘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강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런 것에 해당되는 말씀인가? 그 다음 성경 구절이 바로 연결되면서 진리의 빛을 드러냅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진리 안에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때 제일 큰 사랑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실천하십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잡으러 왔을 때 어두워서 횃불을 들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 산중에서 누가 예수인지 제자들과 섞여 있는데 거기서 칼싸움이 벌어져서 베드로도 어느새 로마 군병의 귀를 깎아버린 그런 상태인데 예수님이 급하게 나서며 말씀하십니다. “누구를 찾느냐?” “예수를 찾는다.” “내로라 하시니라. 이들을 가게 하라.”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다른 사람은 해치지 말라.” 사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으면 그날 저녁 제자들은 전멸했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칼을 써서 로마 군인의 귀가 떨어져나간 상태의 칼부림이 이미 벌어졌는데 군인들이 가만있겠어요? “다른 사람은 가게 하라. 목적이 나니까 내로라 하시니라.”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단검 하나를 가지고 천하무적 로마의 군대를 당해내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나는 마음을 결정했으니” 제자들을 안심하게 피난을 시키고 자신이 잡혀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일이 이루어지는 일에 친구를 위한 희생이 최고의 사랑으로 평가를 받는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를 볼 수 있는 영적 힘! 지금 요나단은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의롭지 못한 자기 아버지를 버리고 다윗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자기에게 돌아오는 왕의 자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손길이 담긴 다윗에게 왕자의 황금 띠를 풀어서 그의 허리에 자신의 손으로 매어주며 “네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날 이 칼과 이 허리띠를 차고 이 나라를 구원하라!” 아마 성경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둘이 얼마나 우정 어린 말을 했겠습니까? 또 다윗도 요나단에게 “마땅히 네가 왕의 아들, 장남인데 네가 그 띠를 두르고 그 칼을 가지고 이 나라의 왕이 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손길은 이미 너에게 와 있다! 그것을 나는 보았다. 하나님이 너에게 역사하시는데 내가 어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으랴? 일이 끝난 것이다. 네가 왕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 서구사회에 아주 유명한 이야기, 누구든지 기억하는 친구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피디아와 데미니의 이야기이죠? 피디아는 사형수인데 다른 죄가 아니라 혁명 주도 죄입니다. 정부를 정복시키려고 혁명을 주도했으나 잡혔어요. 사형수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어요. 그의 마지막 소원은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허락하겠다. 대신 네 친구 하나를 인질로 두면 갔다 오라!” 그래서 친구 데미니가 나타났잖아요? “내가 있겠습니다.” “약속한 10일의 시간 안에 못 돌아올 경우에 데미니 너는 네 친구를 대신해서 목숨을 잃어야 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피디아를 보냈습니다. “빨리 가서 어머니를 만나라!” 그런데 약속한 시간 안에 안 나타났습니다. 임금이 조롱을 했습니다. “보라! 내가 그렇게 믿었던 네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네가 죽어야 된다.” “네! 제가 죽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죽은 후에도 친구는 틀림없이 돌아올 것입니다. 얼른 죽이십시오.” 그리고 사형장으로 끌려 나가는데 아, 피디아가 막 고함을 치면서 달려왔습니다. 둘이 막 사형장에서 싸웁니다. “피디아! 너는 네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 네가 죽는 것보다 어머니 슬픔이 더 크다. 나는 슬퍼할 어머니가 안 계시다. 이미 하늘나라에 가셨다. 내가 죽는 게 훨씬 더 이롭다. 너는 어머니를 위해서 이 땅에 살아라!” 서로 죽겠다고 싸우는 그 광경을 보고 하는 말이 “나는 이 나라 임금인데 어찌 저런 친구를 하나 갖지 못했는가?” 결국 둘을 살려 국가 정책에 참여시켰다는 감동 이야기! 옛날부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고난의 시간이 다 지났을 때는 이미 요나단은 다윗의 일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자청했습니다. 사태가 그렇게 되니 사울 왕가는 자연히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30세 청년으로 왕위에 오른 다윗은 정치를 얼마나 잘했는지, 내정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서 중앙정부를 세우고 행정지도 철학을 하나님의 공의와 의를 내세워 국가 기반을 아주 튼튼히 했고 영원한 숙적 블레셋을 멸망시켜 국력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태평성세의 40년을 통치했어요. 그의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요나단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그의 가문이 어떻게 되었느냐?” “다 죽었습니다.” “아무도 없느냐?” “도망간 므비보셋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장애인입니다. 숨어서 살고 있습니다.” “빨리 데려 오라!” 데려다 놓고 “나의 이 영광은 네 아버지 때문이다. 나는 이 나라 통치가 너의 아버지가 내 속에 살아서 통치하는 것이다.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는 너의 아버지의 자리이다. 너는 오늘부터 평생을 이 왕궁에서 나와 함께 내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살아라.”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우리가 보아온 대로 다른 것은 다 발전했는데 가장 늦은 분야가 정치입니다. 서로 죽이잖아요? 양녕대군 같은 정치인들이 좀 나왔으면 좋겠어요. 요나단과 같이 틀림없이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자리의 확고부동한 위치를 확보한 그런 사람도 이 나라를 위해서 더 훌륭한 사람이 있을 때는 이런 아름다운 역사를 남기고 가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해서 길이길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회가 건강한 이유 가운데 큰 몫을 차지하는 정신사의 흐름을 일본의 교육자들이 평가하는 것으로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정신이란 무언인가? 의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옳은 일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지도자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밤에도 저는 세미나를 위해서 일본 동경으로 갑니다. 지난번에 오사카를 갔을 때는 우리나라의 한 재벌 총수가 투신자살 했을 때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저한테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저런 일은 우리나라에도 흔하게 있다. 저것은 모든 책임은 나한테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틀림없이 그 주변에 한 두 사람이 더 자살할 것이다. 일본 같으면 그렇게 한다. 그의 측근의 비서관이라든가 아니면 그를 모시던 운전기사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따라서 자살할 것이다. 일본의 정신은 그렇게 훌륭한 분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분이 없는 세상에 내가 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모시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본 국민의 특성 중의 하나입니다.

훌륭한 일을 위해서 내 몸을 그 분을 위해서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마지막에는 의롭게 죽는 그러한 일본인들의 삶을 철학을 우리가 좋게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는 매우 행복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몸을 바치는 자리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이 희생의 자리에 내가 몸을 던질 수 있다.” 오늘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하여 우리 주변에서 이루어져 갑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은 어디에 있는가? 요나단처럼 영적 시각을 가지고 사도적 관찰을 가지고 볼 수 있는 힘이 생길 때 그곳에서 하나님의 창조적 구원의 빛은 어둠을 밝히게 되는 것입니다. 왕위의 자리를 버리고 죽음의 길을 선택하면서 하나님의 역사성을 위해서 다윗을 살려낸 의인 요나단은 두 사람의 우정 때문에 하나님이 내리신 축복이 선민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살려내는 빛나는 역사 창출이 이 정치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적 손길을 보는 눈, 요나단 같은 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가지는 자! 우리 모두가 그 길을 따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여! 오늘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에 우리가 우둔해서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을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망치고 교회를 망치고 있습니다. 우리 다 성령이 충만해서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을 사도적 관찰로 파악하고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는 왕위도 버릴 수 있고, 의를 위해서는 죽을 수 있는 희생의 그 길까지 저희들이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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