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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란 무엇인가 (히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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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신앙하는 마음으로 꼭 그렇게 여겨서 의심하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에 대한 성경적 의미는 우리의 예측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내용에 대해 굳게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믿음은 믿는 내용을 진리로써 받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믿음은 요한과 바울이 생각하는 믿음의 개념과는 다른 의미로 나타납니다. 요한과 바울의 믿음은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고 의지하므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현실화시키는 행위적 개념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실상"(휘포스타시스, )이란 말은 '아래'(휘포, )와 '서게 하다'(히스테미, )와의 합성어입니다.
실상 즉, 휘포스타시스는 사람의 생각에 좌우되는 주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객관적인 실체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객관적인 실체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확신을 더하는 근거라고 했습니다(Lane, 강병도 히브리서 주석 p.222).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은 믿음은 장래의 소망적 특성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Substance)이란 단어는 라틴어 Substans에서 온 것입니다. 그 뜻은 '아래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첫째,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때까지 기다리는 근거가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을 신뢰하는 근거가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그 어떤 환경적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6장 15절에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오래 참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하신 것을 결코 어기지 않을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뢰는 너무 강하기 때문에 바라는 것이 이미 자신이 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실체를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Mett Herry는 믿음 가운데 있는 성도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며 이 믿음에 대한 보상은 우리가 믿는 것을 실제로 눈으로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주관과 객관을 연합하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깝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6-7절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어떻게 하여 바라는 미래를 현실의 실상으로 만들어 줍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성(immutability)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언약에 대한 확신이 우리의 삶에 행동화 되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은 그 행위와 결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행위와 같이 일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음은 맹목적 낙관주의(optimism)나 적극적 사고방식에 의한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Ⅱ.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본문 11장 1절에 "믿음은…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지 못하는 것들"의 "것들"(프라그마톤, )은 되어진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 전체를 의미하는 인간사(human events)를 의미합니다. 여기 보지 못하는 것들은 종말론적 미래에 나타난 사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증거"(엘렝코스, )는 객관적 증거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성도들에게 보이지 않는 미래 사건들에 대한 객관적인 확실한 증거(proving)가 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8장 24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상으로 확신을 시키는(convince)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처구니없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시(revelation)의 일을 인지할 매개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계시의존적(啓示依存的)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합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7절에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라고 했습니다.
자연인은 감각의 세계를 더 좋아하고 인간의 이성작용에 의해 검증된 과학적인 증거를 더 믿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이성 이상의 세계이고 과학이상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실체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죄악의 즐거움을 멀리합니다.
히브리서 11장 25절에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믿음으로 인하여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믿음은 자신의 실존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이사야 7장 9절에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시대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결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격화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믿음은 장차 오실 메시아(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믿음은 약속대로 오신 메시아(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믿음의 대상이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 믿음의 대상이 미래적 현실이요, 현실적 미래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Ⅲ.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본문 11장 2절에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선진들"(호이 프레스뷔테로이, )은 조상들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로써"는 이미 1절에 언급된 믿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믿음으로'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유가 아니라 상태입니다. 그들의 믿음 안에 어떠한 공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믿음은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아더 핑크(Arthur W. Pink)는 말하기를 이 믿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태초부터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심기어진 은혜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증거를 얻었느니라"에 대한 원문 그대로는 '증거로 나타나 있다'로 되어 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창 4:1-5).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습니다(창 5:22-24).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습니다(창 6:9-22).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부르심에 순종하여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창 22:1-4).
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습니다(창 18:11, 12; 창 21:2).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에게 축복했습니다(창 27장).
야곱은 믿음으로 요셉의 각 아들을 축복했습니다(창 48:15-21).
요셉은 믿음으로 자신의 해골을 언약의 땅에 메고 가라고 했습니다(창 50:24-26).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했습니다(출 2:11-15).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습니다(수 2:1-24).
여러 성도들이 믿음으로 빛나는 신앙의 영예로운 행진을 계속했으나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왕상 18:4, 13; 단 3:23-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궁극적인 신뢰가 극대화되고 충만할 때 믿음에 대한 여러 편견은 설자리를 갖지 못합니다.
예컨대 잠깐 믿다가 배반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13절에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5절에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했습니다.
적은 믿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31절에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큰 믿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보아야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9절에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연약한 믿음이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절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강한 믿음이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절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라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5절에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5절에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인간의 본분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다는 소극적인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 믿음이 인간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내리신 선물이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이 믿음을 행동화시키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을 행동화할 때 온전한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행동화할 때 사탄의 방해 또한 적극적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믿어야 될 의가 있고 행해야 될 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의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결코 추상적인 산물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주 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의 삶은 자기의 것으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논리나 명상과 기도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데 있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할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17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거나 주어진 환경에 운명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미래의 세계를 지향합니다. 궁극적으로 미래의 세계는 하늘나라를 가리키지만 일차적으로는 이 땅에 있는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역대상 29장 15절에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의 삶 곧 나그네의 삶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만 천하에 공개하므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입니다.

공개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말입니다. 복음전파 과정에 있어서 오늘의 교회가 사자(lion)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 10장 3절에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고 했습니다.
호세아 11장 10절에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라고 했습니다.
아모스 1장 2절에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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