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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소망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까? (벧전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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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인사합시다. "반갑습니다. 오늘 주일 예배를 통해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힘내시기 바랍니다. 제가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모든 일이 잘 될 겁니다. "

동요 중에 "아빠! 힘내세요."라는 곡이 Tv cf에서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우리들도 한번 적용해서 불러봅시다. ♫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힘내세요. 주님이 있잖아요.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힘내세요. 주님이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도 베드로 사도가 여러 곳에 흩어진 나그네(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하늘 소망을 가지고 이 고난을 이겨나갈 것을 권면하기 위해 '베드로 전서' 편지를 섰습니다.

주후 64년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해였습니다. AD64년 7월 19일 로마에 대 화재 사건이 일어납니다. 로마 거의 전역에 영향을 줄만큼 큰 화재였습니다. 화재가 진압된 후 여기 저기 널려진 폐허의 잿더미가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할 무렵 로마시에는 한 악성 루머가 소리 없이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로마제국의 황제 네로가 술에 취해 자신의 시흥(詩興)을 더 느끼기 위해 로마시를 방화한 것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네로'는 이 소문을 잠잠케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희생양'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 희생양으로 등장한 것이 당시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곧 이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피 비린내 나는 처형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로마원형 경기장에서 십자가형과 화형 그리고 동물의 밥이 되는 끔찍한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박해를 견딜 수 없게 되었고 로마시내에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의 지하 동굴'로 숨어들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를 떠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해외 여러 지역 특히 소아시아 지역(지금의 터키)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당시에는 팔레스타인 본토의 유대인은 약 100만명 정도였고 해외교포, 디아스포라는 2백만에서 4백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이견은 존재하지만 베드로전서는 이때를 전후해서 쓴 서신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3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잘 전달해주는 말씀으로 보여 집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벧전 1: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이제 베드로전서 1:1의 편지 서두의 수신자가 누구인지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신앙의 박해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가 쓰여 지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의 주제는 희망(소망)입니다. 이런 시대의 어둠속에서도 우리가 소망(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심한 박해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조금 후에는 더 견디기 어려운 박해가 있을 것을 내다보면서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이 고난을 이겨나갈 것을 권면하기 위해 이 편지를 섰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편지를 시작하는 첫머리에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흩어진 나그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흩어진 나그네(디아스포라)의 의미를 잠깐 상고해 봅시다.

베드로 사도는 자기의 편지를 받게 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흩어진 나그네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흩어진'이라고 하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디아스포라'입니다. 그리고 원래 이 '디아스포라'라고 하는 말은 유대지역을 떠나서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용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베드로가 흩어진 나그네라고, 즉 디아스포라라고 칭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베드로는 이 디아스포라라고 하는 구약적인 혹은 유대교적인 용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 세상 곳곳에서 살고 있는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디아스포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디아스포라들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느 곳에서 살든지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사는 나날동안 천국본향을 늘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비록 이 땅에 속한 어느 한 나라의 시민권을 갖고 살지라도, 우리의 영원한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세상에서는 스스로를 나그네처럼 여기며, 하늘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와 더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디아스포라라고 불리 우는 데에는 또 하나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뿌려 놓으신 천국의 씨앗들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헬라어로 디아스포라라고 하는 단어는 영어로 번역하자면 scatter로서, 이것은 농사를 짓는 농부가 곡식의 씨를 흩어 뿌리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란 이 세상이라고 하는 밭에 흩뿌려진 천국의 씨앗들이라고 하는 영적인 의미가 이 디아스포라라고 하는 용어에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마13:36절 이하 참조). 하나님께서는 이 불순종하고 패역한 세상가운데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우리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거룩한 천국의 씨앗들로서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열매를 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이 세상 곳곳에 흩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택하신 디아스포라들로서 우리가 사는 곳에서 천국복음의 씨앗이 되고, 거룩한 영적 열매를 맺는 씨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힘껏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약시대의 디아스포라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이는 처소와 예배와 교제의 공동체로 허락해 주신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흩어져 사는 나그네들로서 이 교회에 힘써 모여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고 예배하며, 서로 교제하고, 서로서로 위로하고 격려를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희망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절망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희망(소망)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에는 큰 바위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바위에는 이러한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끝입니다. 이 뒤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위의 글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끝이 아닙니다. 이곳을 넘어서는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외친 사나이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희망"이 위대한 세계를 발견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또한 우리에게 희망에 대해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살아있는 소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절에 나와 있는 도시 중에 '갑바도기아'는 거의 도시 전체가 땅굴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의 크리스천들의 생활이 참으로 어려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들에게 바로 산 소망에 대해서 3절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기저기를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생을 포기하지 말고 우리가 살아야하는 이유 바로 살아있는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낙심, 절망, 좌절하지 말고 희망(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산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여전히 이런 '근심, 걱정, 절망, 좌절, 염려, 곤고한 세상'에서 (소망)희망을 갖고 살아갈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2-3절을 봅시다. 벧전 1: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라고 하였고, 벧전 1: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왜 우리가 소망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까?

1.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3절을 봅시다. 왜 우리가 고난의 날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광야 길을 갈 때에 노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거듭남의 축복"때문입니다. 거듭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거듭납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말하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절망을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한 공로를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며, 동시에 그 순간 우리는 새 소망을 안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은혜를 덧입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찬송해야 할 이유입니다.

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십자가의 공로로 거듭나게 하신 이유는 "우리를 향한 그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히 여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망 없이 살고 있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 그 엄청난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게 하시시어 구언을 주시려고 우리를 찾아오게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소망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거짓되거나 일시적인 소망과 차별화하기 위해 이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이 소망은 진지한 소망이며 영원한 소망 곧 죽을 수 없는 살아있는 소망인 것입니다.

찬송가 539장 은 '에드워드 모트'가 작시한 곡입니다. 영국의 목공소에서 일하던 가난한 청년이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그에게 인생의 소망과 의욕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한 10년 일하고 난후 그는 드디어 가구 제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제 돈도 명예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자기 공장 뒷 편에 있는 언덕에 올라 산책하다가 널찍한 바위를 발견하고 걸터앉아 아름다운 마을의 정경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는 가슴에 밀려오는 행복감을 느끼며 그가 이런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음은 자기가 걸터앉은 바위가 자신을 편안히 받쳐주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떠 받쳐주는 바위와 같은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행복의 근거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셔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예수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 시가 바로 찬송가 539장(Edward Mote의 시-에드워드 모트)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이 찬송 시는 춘원 이광수 선생이 번역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가사를 본 순간 그에게 감동이 되었다고 합니다.

1) 거듭남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본문 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거듭남의 조건입니다.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며 만일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2) 거듭남(중생)의 증거는 소망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란 본문은 거듭나야 소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는 거듭나지 않아도 소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죽은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산 소망을 가집니다.

고전 13:13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고 하는데 소망은 항상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3) 거듭남(중생)의 결과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본문 5절은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습니다.

거듭남은 내생에서의 복일뿐만 아니라 이생에서 이미 복입니다. 거듭나면 하늘나라에서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에서도 잘 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 같은 환난이나 불같은 시험으로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거듭남의 산 소망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며, 복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이런 근심, 걱정, 절망, 좌절, 염려, 곤고한 세상에서 (소망)희망을 갖고 살아갈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두 번째로,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을 봅시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 기업의 예비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주께서 주의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나라의 기업을 예비하신 때문입니다.

4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소망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확실한 ‘보증된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천국 기업’만은 썩지 않고 더럽히지 않고 쇠할 수 없는 기업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바람이 흔들어 댈 수 없는 하늘에 예비 된 기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 기업, 더럽지 않는 기업, 쇠하지 않는 기업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됨으로 하늘의 기업을 상속으로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본문에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으로 얻은 '하늘나라의 기업은 썩지 않는 것"입니다. '더럽지 않는 것이고, 또한 쇠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기업의 특징이 유한한 것이고 썩어지고, 더럽고, 쇠하는 것인 것과는 반대로 우리가 얻을 하늘의 기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거룩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기업입니다. 보장된 기업입니다.

그러므로 "썩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과 부패로부터 보호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온전한 기업'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모두가 썩습니다. 낡아집니다. 아무리 좋은 집도 헌집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차도 얼마 후에는 헌차가 됩니다. 아무리 잘생긴 사람도 늙어집니다.

세상의 재산 중에 썩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혹시 썩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죽음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일단 사망이 찾아오면 다 놓고 가야합니다.

또한 "더럽지 않는다는 것"은 도덕적 부정으로부터 보호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기업'을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더러우면 버려야 합니다. 더러운 것은 다른 것도 더럽힙니다.

"쇠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과 시간으로부터 보호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고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가지 못합니다. 권세도 십 년을 가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권세는 다 꽃처럼 시간이 가면 시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기업은 영원히 쇠하지 않습니다. 단단한 대리석도 녹이 슬고 부스러집니다. 강력한 왕조들과 제국들도 붕괴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새 것이 없고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하늘 기업은 녹도 슬지 않고 붕괴되지도 않습니다. 쇠하지 않는 기업이란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천국에서 누리게 될 기업만이 영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영원히 변치 않는 기업, 즉 영혼의 구원받음이 있기에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기업을 물려받는 성도는, 지금 그가 가는 길이 비록 눈물 나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노래하며 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저 천국에 있는 단단하고 견고한 기업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이미 소개한 찬송가 539장을 작사한 '에드워드 모트'라는 분이 그랬습니다. 그가 천국 소망을 가지고 욕심 없이 가구 업을 하다 보니 기업은 점점 더 융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천국 소망을 이웃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가지고 전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 그의 기업과 재산을 정리한 후 교회당을 짓고 침례교 목사가 되어 복음을 훌 타임으로 전하는 일에 20년 이상 헌신하다가 그의 나이 77세 되던 해에 그의 평소의 소원처럼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부르심을 받아 그가 소망하던 천국으로 떠났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함께 부른 찬송가 539장의 3-4절을 기억하십니까?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4절)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앞에 서리라.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이 사라져도 변할 수 없고, 사라질 수 없는 천국의 소망, 이 소망이 있음으로 우리는 고난의 시대를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이런 근심, 걱정, 절망, 좌절, 염려, 곤고한 세상에서 (소망)희망을 갖고 살아갈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세 번째로,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 때문입니다.

본문 5-7절을 봅시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우리가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소망은 천국 소망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보장해 주신 다음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지 그대로 버려두시는 분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지켜지도록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본문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두 가지 면에서 특히 성도들에게 함께 하심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1) 우리의 ‘구원이 유지되도록 그의 능력으로 도와주시겠다는 것(성령의 인도하심, 성도의 견인)’이고,
2) 우리가 ‘시험이나 시련 속에서도 잘 버티도록 그의 능력으로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한번 얻은 구원이 언제라도 다시 잃어 버려질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선물을 언약하시면서 “아무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이 선물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보장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 가 없느니라.”(요한10:28)고 하셨습니다.

본문 5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느니라.”고 약속합니다. 이 약속을 신학에서는 “영원한 안전(eternal security) 혹은 성도의 견인”이라고 부릅니다.

5절의 "보호하심"이란? 의미를 보면 '보초를 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보초를 세워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언제나 지켜주신다는 말씀입니다(시121). 할렐루야! 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능력으로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상속자의 안전보장인 셈입니다.

여기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는 "보호하심을 입고 있나니"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는 과거에 한 번 임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편 121:8)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우리가 구원받는 그 날까지 지키시고 보호 하신다는데 이것보다 더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니 고난 가운데 있고 현재의 삶에서 눈물 골짜기를 걸어가지만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지키심을 믿음으로 위로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6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해 잠간 근심하지만 크게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련이 우리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가져다주는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을 더 영광스럽게 하는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의 고난이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한 것이었듯이 성도들의 시련도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벧전4:12).

그리고 7절을 봅시다. 성도들에게 시련과 환란이 필요한 것은 시련들이 믿음을 제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환란은 오히려 믿음의 연단이 됩니다. 하지만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성도가 당하는 시련은 금보다도 더 귀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환난은 가면을 쓴 축복’이라고 말했습니다. 환난은 가면을 쓰고 축복을 주려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 가면을 벗기고 보면 거기 축복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축복하시기 전에 받을 그릇이 되는지 시험해 보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움에서도 산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어려움과 시련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유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7절).

'레냐 마리아'라는 여인을 아십니까? 그녀는 스웨덴의 37세 된 여인으로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스펠 가수 중 한 사람입니다. 사실 그녀가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는 짧은 기형아로 태어났을 때만 해도 그 부모가 의사들부터 시설로 보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슬픔과 절망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절망과 슬픔의 상황을 극복하고 지금은 오히려 건강한 사람보다 많은 활동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입니다. 슬픔과 고난 중에 노래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기자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느냐고!’ 물어보았답니다. 그렜더니 그녀가 세 가지 이유를 드는데,
그 첫째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
둘째는 사랑하는 부모,
셋째는 하나님 때문 이었다고 가능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그였기에 절망 가운데 노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였고, 비록 장애인이고 고난의 삶을 살지만 그분이 사랑하시고 지키신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눈물 골짜기에서도 노래하며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당하는 시련을 보고 실망하고 낙망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련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상급이라는 완성된 작품을 향해 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완성된 작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괴로움도 있고 고난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더 아름다워져 갈 것입니다. 점점 연단되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과 시련, 환란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이유와 찬송(크게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산 소망이 우리 안에,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 나는 광야 길이라도 기쁨으로 노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거듭난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또한 부활하신 주님이 내 안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련과 고난이 우리에게 믿음의 성숙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우리는 찬송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결국에는 우리 주님 앞에서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진 자들이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 기업을 유산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이 있을 것이기를 믿기 때문입니다. 삶 가운데 이 은혜와 감격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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