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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출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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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인웨이'라는 피아노가 있습니다. 이 피아노는 140년과 동일하게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피아노를 만들 때는 한 두 명도 아닌 200명의 전문기술자들이 2만개의 부속품을 가지고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보면 뭐 절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엄청납니다. 18겹이나 되는 단풍나무를 휘는 작업부터 시작해서 건반하나를 만들 때에도, 두드리는 방에 가서 만 번 이상을 두드려보고 건반의 소리가 변함이 없을 때 사용이 됩니다. 아름답고 정확한 소리가 있기 때문에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이 이 피아노를 찾습니다. 그만큼 다듬어 졌기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연주자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악기가 되었고, 그랬기에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이 찾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고난을 받고 난 이후에 내 인생을 연주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나의 아름다운 인생을 연주하시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내 삶을 연주하기를 원하시는 주님 앞에 엉뚱한 음을 들려드리는 인생이 아니라 조화와 아름다운 소리로 하나님께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지금 우리 교회는 사역별 박람회를 열고, 또 새벽마다 이 예배당을 가득 채우는 믿음의 발길들이 모여 아침마다 부르짖는 기도가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목자로서, 광야의 벌판에 서 있는 모세에게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모세야 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목자의 상징인 지팡이를 들고 있는지 몰라서 묻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열등감으로 가득 차 광야에서 의미 없이 살아가던 모세를 일깨우고, 그의 인생을 아름답게 사용하시기 위해 하셨던 주님의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모세는 히브리인이었지만 바로의 공주 아들이 되어 왕족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왕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모세는 Thutmoses 3세 때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모세라는 이름이 히브리어로는 '물에서 건진 아이'이지만, 이집트 언어로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뜻으로,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애굽을 포함한 근동지방을 통치할 만한 능력과 지식과 힘을 가지고 있었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 역사를 분석해낼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했던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민족을 위해 힘썼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 민족들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자기 생명하나 건지기 위해 왕궁을 떠나 광야로 도망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왕자로 있다가 광야로 도망치게 된 모세는 아마도 마음에 수많은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게 아닌데, 원래 꿈꾸던 삶은 이게 아닌데…. 일어서야지, 일어서야지.' 다시 한번 일어서야 한다는 꿈으로 몸부림쳤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입니까? 40년의 세월 속에 자신의 꿈과 희망을 모두 이 광야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활동무대는 더 이상 왕궁이 아니었고, 고상한 인격과 세계역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 민족을 이끌고 나갈 수 있기 위해 받은 훈련들이 이 광야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단지 좋은 목초지가 어디 있는지를 살피고, 어린양의 울음소리에 긴장하고 달려가야 하는 평범한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이미 그의 영성은 황폐될 대로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민족의 지도자로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한결 같이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변명이나 핑계를 계속 다섯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답답하지 않습니까? 지금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신 분이 아니십니까?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아끼던 것을 내 놓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던 것을 포기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그 주님께서 이제 모세를 통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로 세워 일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계속해서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변명을 합니다. 이에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하나님은 진노하셨어요. 여러분 상상해 보세요. 주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만 진노하고 내가 악한 짓 할 때만 진노하는 줄 알지만 그보다 또 한가지 무서운 진노가 있는데 우리 자신이 할만한 자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순종할 때'나는 못합니다.' 하고 핑계 대고 변명할 때 하나님이 진노하시면서 그에게 가혹한 책망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모세가 이렇게 못한다고 끝까지 버티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세에 미디안에 들어가 80세가 될 때까지 그는 그가 모든 것을 상실해 갑니다. 그는 젊음의 박력을 다 잃어갑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에 "이제는 나이가 들어 내 인생은 끝장이구나! 내가 바로의 궁궐 속에서 그 당시의 세계의 문화 속에서 내가 지성과 무예를 배웠는데 이제 나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는가 나는 이제 바로의 궁궐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봤는데 이제 미디안 광야에 내 눈에 비취는 것은 양떼와 가시밭길 밖에 없지 않는가 나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런 좌절감으로 자기라는 울타리에 완전히 가두어진 것입니다. 바로 그 절망을 하며 살아가는 그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뭐냐"는 그 질문 앞에 그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손안에는 양들을 치던 지팡이 하나가 그의 전부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 모세에게는 다 없어져버렸지만 그래도 그 손에 그가 마지막 양떼를 치고 그가 그것 때문에 자기, 장인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살 수 있는 그 지팡이, 지팡이는 양떼를 인도하는 것이요, 또 피곤할 때는 지팡이를 의지하고 그가 길을 걷는 도구요, 그 지팡이는 무서운 어떤 야수가 침입하면 그것으로 막는 무기요, 그의 생에 유일하게 남은 것이 지팡이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 잃어버렸지만 지팡이가 남아있는 것을 아시고 "모세야 네 손에 있는 것이 뭐냐" "예, 지팡이니이다." 어쩌면 자신의 처지와 같은 이 보잘 것 없는 이 지팡이를 지금 하나님은 땅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3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자! 보세요. 모세가 던졌더니 갑자기 뱀으로 바뀌었습니다. 광야생활에 익숙한 모세는 뱀의 무서움을 압니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서 피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뱀은 애굽의 상징입니다. 애굽 왕의 왕관 속에는 나라의 상징인 뱀이 그려져 있어서, 어려서부터 모세는 애굽과 뱀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뱀을 피하면서 모세는 바로 이 애굽에서의 권력과 죽음의 위협을 피해 광야로 도망쳐온 자기를 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 죽음의 위협 앞에서 피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저 뱀 앞에서 피할 수밖에 없는 나는 그런 존재구나. 이것이 나구나..'

여러분, 지금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이 장소는 어디입니까? 그 장소는 초라한 딸기나무 앞에서였습니다. 아더 핑크라는 유명한 성경학자는 가시떨기나무는 실상 모세 자신의 모습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시떨기나무는 모세의 그림자입니다. 사막에 아무렇게나 버림받은 그 흔하고 흔한 가시떨기나무, 이 보잘것없는 가시떨기나무, 이것이 바로 모세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모세는 한때 오만과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이 가시떨기나무의 모세는 자기 힘으로 불을 붙이는 혈기에 가득 차 뛰어다녔습니다. 그러나 한 시간도 채 타지 못하고,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연소되어, 재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할 때 연기를 피우고 다닙니다. 마음속의 향기를 뿜어내지는 못할지언정 아름답지 못한 연기를 피우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쉽게 꺼집니다. 이와 같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4절에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모세는 뱀으로 변한 지팡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어떤 일이 전개될지도 몰랐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뒤로 물러서서 피하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또한 뱀처럼 엄청난 애굽을 상대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도 광야로 피해왔듯이 도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뱀은 머리를 잡아야지 꼬리를 잡으면 오히려 위험합니다. 아마 모세는 얼떨결에 뱀의 꼬리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꼬리를 잡자마자 뱀은 다시 지팡이로 바뀌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상식 밖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에 그 일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나오는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출 4:17)."

모세가 피해서 도망간 뱀, 그것도 뱀의 머리가 아닌 꼬리를 잡았는데 다시 지팡이가 되어 그의 손아귀에 돌아온 것을 보고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습니다. 그의 실패와 그리고 깨어진 꿈의 상징이었던 지팡이가 하나님 앞에 높이 들려지면서 자신의 인생이 새롭게 쓰임을 경험한 모세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갔고 있던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닌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갈 때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 주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기 내려가 4:20절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여기 '지팡이'가 나오죠? 그런데 무슨 지팡이입니까?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모세가 양떼를 거느리던 그런 미디안 광야의 지팡이가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가는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그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려져 있습니다. 수많은 양떼를 거느리던 그런 지팡이가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지팡이로 그 지팡이를 잡고 걷던 연약한 모세가 이제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당당하게 그는 출애굽을 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 말씀을 듣고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를 때 홍해가 딱 갈라져 육지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지팡이로 호렙산 반석을 쳐라" 할 때 반석이 깨지면서 생수가 흘러 목마른 이스라엘 백성이 마셨습니다. 드디어 모세의 지팡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내는 위대한 하나님의 지팡이였고 목말라 갈증에서 사경을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수를 마시는 하늘의 기적의 지팡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쓰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의 행복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내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와 가격은 다른 것입니다. 그의 재산이 얼마냐? 지식이 얼마냐? 월급이 얼마냐? 하는 것은 가격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곧 그 사람의 가치는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어떤 일에 쓰임을 받느냐? 무엇을 위해 사느냐에 따라 평가됩니다. 때문에 사람은 그가 어디에 가든지 쓸모 있는 사람, 꼭 필요한 존재,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집안에 작은 그릇 하나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들락날락 쓰임 받는 밥그릇, 국그릇이 있는가 하면, 찬장 맨 꼭대기에 언제나 모셔져 있는 그릇이 있습니다. 이사갈 때 한번씩 꺼내 먼지를 닦고 제일 먼저 챙겨지는 비싼 그릇, 그러다가 밥 한번 담아 보지 못하고 깨져서 버리는 그릇! 우리는 그런 인간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란? 밥을 먹고사는 존재가 아니라 보람을 먹고사는 존재, 가치를 먹고사는 존재입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살면 행복할 줄 알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다. 거기에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간, 「나는 아무쓸모 없는 존재다. 나는 아무데도 유익하지 못한 존재다.」 낙심하고 고개를 떨구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당신을 필요로 하는 분이 계십니다. 당신에게 기대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건강해야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병든 사람도 당신의 사역에 쓰십니다. 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있어야 쓰임 받는 것 아니고 재주가 많아야 쓰임 받는 것 아닙니다.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은 쓰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 현실 이대로, 내 과거 그대로가 다 하나님의 손에 있었던 소중한 의미를 가진 사건들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소명이요 행복입니다. 인생은 짧고 허무합니다. 우리 손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을 삼으사 그런 기적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게 있는 재능이 내 재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재능으로, 내게 있는 시간이 내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으로, 영생으로, 내게 있는 물질이 내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물질이 되어 기적을 이루는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주께서는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나를 사용해 달라는 목마름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모세의 손에 든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면 다시 독사가 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마지막 남은 것을 가지고 지팡이를 삼으려고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팡이는 의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지팡이를 의지하는 사람들, 늙으면 늙어가면서 무엇인가 의지하려고 할 때 그것은 독사가 되어 나를 물려고 달려든다는 사실입니다. 물질을 지팡이로 의지하고 거기에 살려고 할 때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게 됩니다. 자식을 지팡이 삼아 살려고 했던 많은 사람들이 결국 그 자식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독사처럼 물려 가슴에 한이 멍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 땅에 사람을 믿고 의지하다가 그 사람으로부터 버림당하여 한 맺혀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 땅에서 권력을 지팡이 삼았다가 권력으로 마지막 물려 죽는 권력자가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지금 무엇을 지팡이로 의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지팡이 삼으세요.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하나님의 지팡이로 바꾸세요. 그것을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으로 바꾸어 놓으세요.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기 전에 내 몸에 삶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 올 때 꽤 괜찮은 존재인 줄로 압니다. '나는 많이 배웠잖아. 이만하면 나는 중산층 이상이 돼. 나는 이만하면 신실하게 살아왔잖아. 'I'm somebody. - 나는 꽤 괜찮은 존재야.' 어깨를 세우고 주님 앞에 섭니다. 그러다가 날 구속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존재를 발견하고 나면 'I'm nobody. -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고백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시 한번 나를 세워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게 될 때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I'm everybody.' - 나는 주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예수 이름 앞에 능한 존재로 세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모택동 시절에 지하교회 지도자와 전도자로 유명한 왕명도(왕밍따우)목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한때 중국 공안당국의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지독한 핍박당시 체포되어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고통에 못 이겨 예수를 부인하고 감옥에서 풀려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석방되어 나오자 그는 주님에 대한 송구스런 심정으로 더 큰 정신적인 고통을 겪게 됩니다. 두통이 떠나지 않고 그를 괴롭힙니다. 그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징계임을 깨닫고 다시 기도하고 결심한 다음 북경(베이징)거리로 나와 목에다 간판을 걸고 거리를 다니며 울면서 외쳤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있었습니다. "저의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저는 저를 사랑하신 저의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제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즉시 다시 체포되어 그후로 19년 동안의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의 회복의 소식은 지하교회 지도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어 그의 뒤를 따르는 많은 지도자를 일으켜 세웠고 하나님은 중국 지하교회들 가운데 기적적인 임재로 놀라운 부흥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왔을때 라비 재커라이스(Ravi Zacharias)라는 유명한 인도출신 전도자가 그를 만나 그가 감옥의 무서운 고난을 어떻게 이겨낼수 있었느냐고 질문을 했을 때 그는 웃으며 대신 찬송을 부르고 싶다고 했답니다.

몸은 늙었고 손마디 마디는 뒤틀려 있었고 그의 아내는 앞을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빛나는 눈동자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찬송 후에 그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이 찬송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찬송의 가사처럼 하늘의 위로가 주님의 위로가 저에게 있었기 때문에 19년 동안 저는 행복했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이 비록 다윗의 손에 들리어진 물맷돌처럼 하찮은 것이라도, 저 삼손에 손에 들려진 나귀 턱뼈처럼 쓸모없는 것이라 할 찌라도 이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그것은 더 이상 물맷돌이 아닙니다. 더 이상 나귀 턱뼈가 아닙니다. 이 무더운 계절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합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이 고백이 넘치는 교회, 그것은 분명 소망 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이제 이 무더위 속에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며,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소원하는 여러분 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날마다 충만하게 역사 할 줄 믿습니다.
아-멘.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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