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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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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회사에 근무하는 20대의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는 교양이 있고 얌전하고 착한, 밉지 않게 생긴 아가씨였습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별로 말이 없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잘 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한달 휴가를 내고 난 후 회사에 출근했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왔습니다. 그의 외적모습은 여전하게 보였지만 그의 성품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명랑하고 친구들이나 이웃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수심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그가 변화가 왔는지 알고 싶어했으나 거기에 대하여는 전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아주 친한 사람에게 변화의 이유를 말해주었습니다.
사유인즉 그는 오랫동안 자기 코가 잘못생겼다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 미운 자화상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본다고 생각하고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쌓여있었습니다.
자기는 코 때문에 사람들에게 조롱감이 되고 애인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늘 우울하고 사람을 피하고 근심 어린 얼굴을 가지고 지냈습니다.
그 후 돈을 모아서 그는 휴가를 얻어 성형외과에 가서 코 수술을 받고 마음에 드는 코를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의 자화상이 확 달라졌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예쁘고 사랑스런 자기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녀는 삶에 자신을 얻고 명랑하고 활달하게 변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어떠한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가
거기에 따라서 우리의 삶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악에 열등감에 자화상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모습을 삐뚤어지고 일그러진 형상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늘 삶에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는 되는 일이 없으며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으며 무능한 사람이라는 자화상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 앞에 나오면 놀라운 자화상의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하면 오늘 본문에 말씀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남녀노소 빈부 귀천할것 없이 누구든지 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 내가 가난하고 낭패를 당하고 실망을 당했을 지라도 이것은 나의 진실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실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된 내 모습이 진실한 내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속아서 살아 왔습니다.
내 욕심과 이기주의와 열등감과 낙심이 만들어 놓은 헝클어진 모습으로 우리는 세상을 살아 왔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면목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예수님게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소망찬 우리의 모습이 바로 진면목의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마음 판에 자기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 모습을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자화상이 부정적이고 열등하며 패배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대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하여 소망차고 낙관적이며 긍정적인 모습이면 그렇게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성공과 실패가 우리의 외면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나를 어떻게 보느냐 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인정하지 않고 다 버렸다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 나와서 우리는 새 사람이 되고 새로운 자화상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마음에 강하고 담대하여 생활 속에 위대한 승리를 가져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났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워질 수 있다는 약속의 말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왜 새로워져야 합니까? 우리가 새롭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새 옷을 입었다고 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새아침이 되었다고 새로워집니까?
우리가 새 해를 맞았다고 해서 새롭게 변화가 되고 복된 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거듭나고 새로워지는 데는 "그리스도 안(in Christ)"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앞과 뒤도 아니요, 좌나 우도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회복될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기본사상은 in Christ 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운 사람이 될 수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중생의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아직도 그 신앙이 덥지도 차지도 않다면
이는 내가 아직도 그리스도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닫혀진 마음에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영국의 화가 “헌트”가 그린 <세상의 빛>이라는 명화가 있습니다.
계시록 3장 20-22절의 성구를 주제로 그린 그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린 왼손에 등불을 가지시고, 못 자국난 오른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 집의 손잡이는 안으로 달려 있고 바깥쪽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문을 두드리며, 안쪽에서 열기를 기다리시고 있습니다.
밤도 침침하게 깊었고 예수님은 문을 두드리시며, 들어가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에 담쟁이 넝쿨이 휘감겨 있는 것을 보면 오랫동안 문이 열리지 않은 집입니다
누구와도 교제를 끊고 지냈습니다.
이기적이며 외고집의 닫혀진 마음 절망에 쌓인 마음의 주인이 살고 있습니다.
그 집안 사는 주인공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가 그 집에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변에 많은 사람들과 담을 쌓고 있습니다.
마음에 문이 열리지 않았고 대화가 없으며 미움이 대신 가득찮습니다.
닫혀진 문을 열고 등불을 든 주님을 맞아들이면
주님과 함께 소망의 빛을 누릴 것인데 우리는 아직도 고집이 있음으로 마음에 문을 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마음에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소망의 빛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이란 말은 성령의 은혜로만 새로워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하나님은 스가랴 예언자를 통해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고 오직 내 신으로 하리라"(슥4: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듭나고 새로워지는 것은 내 힘이나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자기 옛사람이 죽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너희는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골3:10)고 하였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린 새 사람된 도리는 무엇일까요?
우리 인생은 눈물이요, 탄식이요, 괴로울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새로운 세계는 기쁨과 소망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새로워지려면 자신이 먼저 십자가에 죽는 체험이 있어야합니다.
죽지 않고 새로 날 수는 없습니다. 죽지 않고는 새로운 창조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밀 알 하나가 죽어야 그 속에서 새 싹이 나옵니다.
달걀이 죽어 깨져야 병아리가 나옵니다. 새로운 변화는 죽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만 우리의 환경이 바뀌고 새로운 존재로 탄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는 변하지 않고 주변 환경이 달라지기를 바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먼저 달라져야합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어떤 신비스러운 보자기를 쓴 사람이 자기를 끊임없이 따라 다니면서 방해를 하고 위협을 하고 못살게 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굴에 보자기를 섰기 때문에 누구인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돈을 많이 모았는데 이 보자기를 쓴 사람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자기 돈을 모두 쓸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려고 하는데 또 이 보자기를 쓴 사람이 나타나서 가정에 행복을 쓸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밥을 먹으려고 하면 또 이 보자기를 쓴 사람이 나타나서 밥을 못 먹게 상을 엎어 버립니다.
공부를 하려고 하면 보자기를 쓴 사람이 나타나서 공부를 방해하고
그래서 어느날 보자기를 벗겨서 누군가 보려고 쏜살같이 살아져 버림으로 그 보자기를 쓴 사람이 누군지 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길거리를 가는데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이 보자기를 쓴 사람이 또 나타나서 싸움을 붙이고 아내와 남편과 화평하게 살아가려면 또 이 보자기를 쓴 사람이 나타나서 아내와 남편과 싸움을 붙이는 것입니다.
한번은 자기가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고 출세하려고 하는데 또 이 보자기를 쓴 사람이 나타나서 명성과 출세의 길을 또 가로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것 실패를 보고 알거지가 되어서 자포자기가 될 즈음에 또 보자기를 쓴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격분한 이 사람이 그 보자기를 쓴 사람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누군데 내 앞길을 가로막고 가정에 문제를 일으키고 나를 이렇게 실패의 길로 인도하느냐 도대체 누구냐 네 정체를 밝혀라?
이 때 마침 보자기를 쓴 사람이 한눈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살같이 달려가서 보자기를 쓴 사람의 얼굴에 보자기를 벗기고 보니 놀랍게도
그 얼굴은 바로 자기의 얼굴이었습니다
바로 모든 방해꾼에 원인은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원인은 알았지만 그러나 이 사람의 나이는 벌써 환갑이 지나서 늙어서 다시 일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답니다.

여러분 바로 꿈속에 주인공이 여러분이 아닌지요
모든 것에 원인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핍박하는 적군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가장큰 원수요 나를 막는 사람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요 우리의 운명을 망쳐 버리는 것도 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인 것입니다.

문제는 내게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라진 것도 없고, 달라질 수도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오직 내 탓이오 라는 고백이 있어야합니다.
세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가는곳 마다 여전히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으며 악한 것은 늘 여전합니다.
앞으로 세상도 죄악의 세상일 뿐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에 행복이 있고 천국처럼 되리라고 속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변해야 합니다. 내안에 천국을 세워야 합니다.
집을 새로 수리한다고 행복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집 주인이 변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내가 주인이었으나 이제는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는 삶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으므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인생에 내가 주인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은 만큼 세상은 변화됩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야곱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된 우리가 어떻게 서원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새사람으로 변화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세가지 서원을 했습니다.
창세기 28:20-22절을 읽어보면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첫번째 서원은 21절에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라고 서원하였습니다.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겠다는 서원을 한것입니다
'여호와'란 약속의 하나님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바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에게 복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야곱은 이제 자신의 하나님으로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약속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세상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만족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마음에 평화와 만족함이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마음속에 무엇을, 누구를 모시고 살았습니까?
명예입니까? 승진입니까? 자식입니까? 아파트입니까? 물질입니까?
이제 우리의 마음속에 여호와 하나님만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믿고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서원한 것은 22절에 보면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라고 서원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잠자고 있던 그 장소 그곳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에서 깬 야곱은 그가 배게 하였던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이 장소가 하나님의 전이 될 것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야곱은 들판에 혼자 잠을 자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곳을 벧엘이라고 이름지었으니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자는 곳이 어디이든 그곳을 바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있는 곳을 경건하고 거룩한곳으로 만들고 기도할 때에 벹엘을 찾아 오셨던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거처에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꼭 교회만 나가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가정이나 직장에서 또한 내가 일하는 어느 곳이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 어디든지 그 속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믿음의 향기를 나타낼 때에 바로 그곳이 벧엘이 되며 하나님의 전이되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에는 두개의 기둥이 성전을 떠받들고 있었는데 이름이 각각 야긴과 보아스입니다.
야긴은 "세우리라" 즉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뜻이고
보아스는 " 능력이 있다" 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세우시면 능력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셔야 능력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도 하나님이 세우셔야 능력있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하나님이 세우셔야 능력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우시고 든든한 기둥 같은 일꾼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자는 곳이 어디이든 그곳을 바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고 야긴과 보아스의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있는 곳을 경건하고 거룩한곳으로 만들고 기도할 때에 벹엘을 찾아 오셨던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거처에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나의 가정이나 직장에서 또한 내가 일하는 어느 곳이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면 그곳이 벧엘이 되며 하나님의 전이 되는 것입니다.
월드컵 크리스천 축구 선수들이 골을 넣은 후 그곳에서 무릎 굻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세요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여러분 이제 우리도 앉거나 서거나 우리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성전의 제단, 기도의 제단으로 만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 번째 야곱의 서원은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 합니다.
28절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앞의 두 서원은 매우 영적인 서원인데 왜 야곱은 갑자기 십일조 서원을 했을까요?
앞에 두서원은 달리 세 번째 서원은 물질의 서원입니다.
야곱이 물질에 대한 서원을 한 것은 물질에 대하여 초연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물질을 탐하여 야곱은 외삼촌을 속이고 물질 메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물질에 노예가 되지 않고 탐욕적인 마음을 버리고 빈 마음으로
오직 많든 적든 주신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십일조를 외면함으로서 하나님게 드려야 할 것을 횡령하는 횡령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것과 하나님 것도 구분하지 못하고
내것도 내것이요 하나님것도 내것이라는 도적 심보를 가져서는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적으로 올바른 믿음의 수준에 이르려면 물질로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물질에 집착하거나 물질에 노예처럼 살아서는 진정으로 새롭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하여 청지기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을 소유로 생각해서는 우리는 결코 행복해 질수 없습니다
오직 물질은 우리가 이 땅에 살 동안 하나님이 잠시 잠깐 맡긴 것이므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새롭게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과 기도로 화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불화하고 하나님과 대화가 막힌 상태에서는
세상에 모든 문제를 내가 노력한다 할지라도 근본적인 해결이 안됩니다.
아무리 사람이 평화를 위해 노력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참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먼저 화해를 해야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기도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놀라운 특권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는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능히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쉽고 상처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안에 성령을 모시고 삶으로서 우리의 겉 사람은 날마다 늙어 가지만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빛되시는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임으로서 성령의 내주 하심을 통해 예수님과 연합한 몸인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 생명을 소유한 존재입니다.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모든 삶은 버려야 합니다.
지나가 버린 슬픈 사연들이 있다면 잊어버릴 것은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음으로 새로운 계획을 세웁니다. 새로운 꿈을 꿉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새로운 소망을 품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갑니다.
결코 사람을 믿거나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선교사가 건축을 계획하면서 2000만원 정도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편지 50여 통을 쓰고 국제전화도 하고 온갖 궁리를 다해서 계산해 보았지만 삼백만원 정도 밖에 나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없어서 그 계획을 취소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갔습니다.
그때 그의 부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시나요?”
선교사가 “그렇다.”고 했더니,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나요?”
라는 질문에
선교사는 하나님이 “너는 정말 나를 믿느냐?’라고 책망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선교사는 사실 하나님 보다 후원자들을 믿었던 자신을 회개하고
다시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올바른 믿음과 잘못된 믿음의 차이는 믿음의 대상에 있습니다.
잘못된 믿음은 사람을 믿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믿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병자들이 치유 받는 과정을 보면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고백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9:23절에서,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러 온 사람을 향하여,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믿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우리들의 기도가 응답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내 믿음의 대상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기도”는 신자들이 필요할 때만 찾는 요술방망이가 아니라,
거듭난 성도들의 생활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바라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는데,
‘실상’과 ‘증거’는 현존하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모습의 믿음으로 승리한 “실상”이요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믿음으로 얻은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새롭게 피조물된 사람은 지난날 잘못된 자화상을 벗어버리고
이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믿음으로 살아감으로서
그 삶에 모습이 믿음의 증거요 믿음의 실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새로운 소망을 품고 미래를 향해 나갑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롭게 변화된 것입니다.
혹시 세상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사람들이 우리를 낙심케 하여도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 새사람되었으니 주님이 주시는 열정과 용기와 꿈을 갖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며 살아 갑시다.
흔히 성공인의 언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하면 되는 일도 안됩니다.
큰 생각을 하고 행동하면 크게 됩니다. 그러나 작은 생각을 하고 행동하면 작게 됩니다."
여러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새로운 피조물로서 용기를 갖고 담대하게 복된 미래를 향해 열심히 나아가 믿음의 증거가 되고 믿음의 실상이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인생을 펼쳐 나가시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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