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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삶 (고후 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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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고후10:7-18)

우리 다같이 기도드리겠습니다. 정성껏 준비한 시온찬양대의 찬양을 주님께서 들으신 줄로 믿습니다. 입술을 벌려 찬양을 하는 시온찬양대의 지휘자와 반주자, 대장, 온 대원들에게 하늘의 좋은 것, 땅에 기름지고 좋은 것으로 가득히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비로 말미암아 슬픔을 당한 가정, 재산의 피해와 어려움을 당한 분들이 계십니다. 이 시간도 그들을 기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 받으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주실 줄로 믿사옵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린도후서 10장은 고린도에 있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사도바울에 대하여 인신공격을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7절에서 18절까지는 이런 인신공격에 대한 바울의 답변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바울의 답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삶은 외모를 보고 남을 판단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본문 7절을 보세요. “너희는 외모만 보는 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의 외모를 보고를 흠을 잡았습니다. 바울의 외모는 시원치 않았습니다. 이 세기에 기록된 바울과 대클라 행전을 보게 되면 사도바울은 키가 작았습니다. 왜소한 체형에다가 다리는 안짱다리였고 눈썹은 마주 붙어 있었고 매부리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외모는 아니었습니다.
또 본문 10절을 보세요.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바울을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말이 시원치 않다. 즉 어눌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을 잘할 것 같지요? 말을 잘 못했습니다. 말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12장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장 13절-14절을 보게 되면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거시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사도바울은 고질적이고 만성적인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대적들은 바울의 이러한 것들을 악선전에 재료로 사용을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외모를 가지고 판단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무엇을 보신다고 하셨지요?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명령하시기를 베들레헴에 있는 이새의 집에 찾아 가서 이새의 아들들 중에 하나를 왕으로 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명령대로 이새의 집을 찾아가 이새의 아들들을 하나하나 불러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새의 장남 엘리압이 들어왔습니다. 사무엘이 보니 엘리압은 대단한 인물입니다. 키가 컸습니다. 아주 용모가 준수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을 자가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무엘상 16장 7절에 보세요.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막내아들인 다윗을 택하시고 사무엘로 하여금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겉꼴 안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꼴」은 ‘겉모습’입니다. 「안꼴」은 우리의 ‘속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겉꼴이 아무리 좋아도 안꼴이 사람이 아니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볼 때 외모를 보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겸비해야 합니다.

7절 하반 절을 보세요.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아니했다는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 겸손해집니다.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모든 사람이 다 존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바로 ‘저 형제와 자매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구나.’ 예수님의 피를 흘리신 저분을 볼 때 우리는 존귀하게 보아야 합니다. 은혜 받으면 다른 사람이 존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잘 못 받게 되면 반대현상이 일어납니다. 본문 7절의 말씀대로 “나는 그리스도인에게 속한 사람이지만 당신은 그리스도인에게 속하지 않았다.” 나는 구원을 받았지만 당신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라고 함부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이비 이단일수록 그렇습니다. 사이비 이단을 보세요. 자기들만이 예수를 잘 믿고 자기들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자기방어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신앙생활에는 언제나 겸비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 속해 있는 것처럼 저 믿음의 형제들도 다 그리스도안에 속한 사람들이라!』

형제를 존귀하게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옆 사람에게 인사해보세요. “형제는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모두는 다 존귀하신 분들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하여 피 흘릴 만큼 여러분들은 다 귀하고 존귀한 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파괴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본문 8절을 보세요. “주께서 주신 권세는 파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주신 것이니” 라고 말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주께서 주신 권세’라고 하는 말은 사도의 직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면 목사의 직분, 장로의 직분, 안수집사의 직분, 권사의 직분, 남녀 서리집사의 직분, 교회에서 맡은 직분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직분들은 주께서 주신 거룩한 직분들입니다. 바울은 이 직분을 가지고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너희를 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파하다’는 말은 ‘파괴하다’라는 말입니다. 이 직분을 가지고 파괴하려고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려고 하는 것이니 이 말씀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께 받은 직분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합니까? 파괴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건설적으로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파괴는 쉽지만 세우는 일은 어렵습니다. 파괴적인 행동, 파괴적인 말은 나쁜 일입니다. 말에는 견인력이 있습니다. 말에는 행동을 유발하는 힘이 있지요. 우리나라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라는 말을 기억하시지요. 말이 씨가 됩니다. 민수기 14장 2절에 보세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조그만 한 어려운 일을 당해도 그들은 입버릇처럼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차라기 광야에서 이 고생을 하지 않고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파괴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말이 씨가 되어서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 된 모든 백성들이 그들이 말한 대로 광야에서 다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파괴적인 말을 조심을 해야 합니다. ‘못살겠다. 차라기 죽고 싶다. 미치겠다.’ 미치는 것은 귀신들리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말, 신세타령, 팔자타령 파괴적인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미국사람들의 인사를 보세요. 아침에 만나면 “Good morning!” 얼마나 멋진 인사입니까? 비가 와도 “Good morning”입니다. 비가 쏟아져서 수재를 만나도 아침에 만나면 “Good morning”하고 인사를 합니다. 부모가 죽은 슬픈 아침에도 “Good morning”입니다. 불쾌지수가 하늘을 찌르는 아침에도 “Good morning”하고 인사를 합니다. 스스로 병들어 죽어가는 아침에도 “Good morning”입니다. 그 말이 그들의 정신을 온종일 감싸고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비해 우리나라 인사는 어떻습니까? 보릿고개를 겪은 민족이니 “아침 드셨어요? 진지 잡수셨어요?” 옛날부터 강대국의 침략과 일본의 식민지아래, 6․25사변과 혁명으로 안녕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바꾸면 어떨까요? 믿는 우리들은 “할렐루야!” “샬롬”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인사를 바꿔봤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남녀가 열렬히 사랑한 결과 드디어 결혼에 골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1년 후에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이혼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가정 가운데 한가정이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가정이 이혼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봤더니 남편이 직장에 갔다 오면 날마다 기타를 쳤는데 이별 곡을 연주했다고 합니다. 이별 곡을 매일 부르고 일년이 지나고 나니까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별이라는 각인이 찍혀있었습니다. 아무런 부작용 없이 서로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에는 각인력과 견인력과 성취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말은 씨가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말을 할 때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소망적이고 미래적인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귀한 직분을 주신 것은 파괴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덕을 세우는 말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늘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줄로 믿습니다.” “앞으로 교회가 더 뜨거워질 줄로 믿습니다.” 좋은 말만 하세요. 좋은 말을 하시게 되면 그렇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지만 10절에 보세요. “그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이 시원하지 않다 하니” 사도바울의 외모뿐만 아니라 말이 시원치 않았지요? 바울이 서신에는 분명히 중하고 힘이 있었습니다. 빌레몬서까지 합쳐 13서신과 히브리서까지 합친 14서신을 바울이 기록을 했습니다. 그 편지를 보면 얼마나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인물을 대하고 보니 말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4장 8절에서 18절을 보게 되면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설교를 할때 놀라운 이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말이 시원치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을 증거 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능력에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바울에게 약점이 있었다고 하면 저와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약점이 있겠습니까?

디엘 무디라고 하는 목사님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왔습니다. 초등학교 중퇴를 했습니다. 무식하면서도 세계적인 부흥사로 쓰임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존 밀턴을 아시지요? 소경이면서도 실낙원을 써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베토벤은 말년에 귀머거리이면서도 세계적인 악성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약점 때문에 하나님께 더욱 매달리게 되고 결사적인 기도를 통해서 새 역사기 일어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고린도전서 1장 21절, 29절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슬기로운 자들은 부끄럽게 하시고 하나님은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하나님은 없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래야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은 육체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만을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역사하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무슨 약점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무슨 부끄러운 일이 있습니까? 절대로 좌절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약점! 여러분들의 부끄러운 것을 들어서 더 강하게 사용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절대로 어떤 경우를 당해도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낙심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내 약점을 들어 더 강하게 해 주심을 믿으면서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아야합니다.
본문12절에 보세요.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칭찬하는 자는 이단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 하반절에 보게 되면 결국 이단자들은 지혜가 없도다. 미련하다고 했습니다. 이단자들은 자기를 자랑합니다. 여기서 자랑하는 자들은 이단자들을 말합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미련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 부잣집에는 오리가 수 만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주인은 미련하기 때문에 자기 집에 오리가 몇 마리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고작 셈을 하는 방법이 두 마리씩 짝을 지어보는 것입니다. 짝을 딱 맞춰 보아서 맞으면 그냥 맞나보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오리 한 마리가 모라랍니다. 한 마리가 짝이 안 맞습니다. ‘종이 오리를 잡아먹었구나.’ 사실 종이 오리를 잡아 먹었습니다. 주인은 종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네가 오리는 먹었지?” “안 먹었습니다.” “짝이 안 맞는데” 오리 지키는 종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종이 한 마리 잡아먹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내일 당장 한 마리를 갖다 놓겠다고 주인과 약속을 했습니다. 종이 생각을 해보니 자기의 꾀가 약했습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주인이 오리를 셈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니 남은 한 마리도 잡아먹으면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한 마리를 잡아먹었습니다. 종은 오리고기를 배불리 먹고 편하게 잠을 잤습니다.

그 다음날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말씀대로 오리 한마리를 갖다 놓았습니다.” “오 그래. 세어보자!” 셈이 딱 맞았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과연 벌이라고 하는 것이 효과가 있군. 어제 종을 때렸던 매가 오리를 채워놓는 것을 보니...” 그러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어리석음을 모릅니다. 도리어 자기가 똑똑한 줄만 압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단자들은 자기들 스스로 칭찬하는 이단자들은 스스로 자랑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것처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크게 두 가지 기준 가운데서 살고 있지요? 언제나 자기 기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삶의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하기가 아주 곤란합니다. 이단자일수록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삶의 기준은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사람은 남을 판단 할 때는 한없이 너그럽지만 자신을 판단 할 때는 매우 엄합니다. 우리의 삶이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바울을 통해서 외모를 보고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겸비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파괴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창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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