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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중심(重心- 무게 중심)을 바로 세웁시다 (삼상 1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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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 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취업 전문지인 '리크루트'가 전국에 있는 402개 기업체 인사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가 우리에게 충격을 준 적이 있습니다. 여사원 면접 시에 '외모'가 합격 영향을 묻는 질문에 71.4%가 긍정적으로 응답했습니다. 어느 기업체에서는 '절대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외모가 시원치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외모 합격 변수가 차지하는 비율이 71%인 것으로 나타난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상품이건 사람이건 간에 외적인 아름다움에 최선의 가치를 두는 그런 사회로 둔갑하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유감스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 한때 유행했던 노래방도 이제는 물 건너갔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업종이 무엇인지 아세요? '찜질방' 아니면 '에어로빅 강습소'와 '다이어트 식품점'이라고 합니다. 에어로빅에는 애 어른 구분이 없답니다. 그저 밥만 먹으면 비싼 돈 주고 가서 마구 흔들어 대고 있습니다. 몸매를 가꾸고, 살을 빼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 쓰고 있습니다. 다이어트 식품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부작용이 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요즘 최근에 대학생의 헌혈을 위해 피를 뽑아 조사했는데 놀랍게도 쓸 수 없는 피가 대부분이라는 충격적인 보도도 있었습니다. 알고 보면 제대로 먹지 못해서 면역력이나 기능이 정상이 아니라는 이야기 입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습니까? 바싹 마르면 건강에 좋아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 입니다. 에어로빅이나 다이어트식품 가지고도 안 되니까 이제는 칼을 몸에 대고 있습니다. 요즈음에 새롭게 유행하는 것이 '성형수술'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뜯어 고치고 있습니다. 그래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이어트와 성형수술은 21세기의 신흥종교”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경향신문 '매거진 X'가 PC통신사 네티즌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아름다워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성형수술을 하겠다’라고 응답한 사람들이 남성이 61.3%, 여성이 77.1%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열명 중에 일곱 명이 절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형수술을 할 경우 ‘가장 바꾸고 싶은 부위는 어디인가?’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여성들 같은 경우는 1위가 지방제거 수술(24.6%), 2위가 코 수술(23.1%), 3위가 쌍꺼풀 수술(20%), 그 다음이 다리요, 턱이요, 가슴순서로 나타났습니다. 마음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가치관은 이제 뿌리 채 흔들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모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돈 아까운 줄 모르고 과감하게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에는 본래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그대로 가꾸고 보존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총각이 처녀의 외모에 반해 끈질기게 쫓아다닌 끝에 결국은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답니다. 서로 사랑했고, 1년 후에는 사랑의 열매로 딸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라면서 보니 너무나 ‘아니올시다.’였습니다. 10층 아파트에서 떨어진 메주 같았습니다. 전혀 부모를 닮은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 의심을 하기 시작한 남편이 혈액형을 몰래 조사하는 등 문제를 제기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럴 때 부인이 실토를 하는데, 얼굴 전체를 성형 수술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인으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따라합시다." '원판 불변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선을 본다든지, 데이트를 한다든지 할 때에는 꼭 지참해야 하는 것 가운데 옛날에는 건강진단서였는데 이제는 "아기 돌 때 사진을 가지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원판부터 확인하겠다는 얘기 아닙니까?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좌우간 아름다워 질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느냐는 생각들입니다. 의를 위해서는 순교하지 못해도, 미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여성들의 심리입니다.

지난번에 신문을 보니, 아주 미모가 뛰어난 인기 ‘연예인’이었습니다. 내가 볼 때에는 그만하면 아름답고 예쁘게만 생겼습디다마는 더 예뻐지겠다고 성형수술을 했다나요? 그런데 그것이 부작용을 일으켜서 재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고발하느니 마느니 하면서 나왔더라구요? 보세요. 예뻐지고자 하는 것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우선 눈에 보이는 외모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의 결혼조건도 90%가 외모를 우선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꼭 이래야만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번번이 여기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엘리압’을 보고 기름을 부으려는 사무엘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을 하신 부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보는 기준과 같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기준과 사람의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서로 차별이 있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대부분 사람들은 무엇부터 봅니까? 우선 외형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레서 용모와 신장을 봅니다. 겉을 봅니다. 외모를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인 모습을 보고 완벽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로 선정하려니까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거절하셨는데 하나님의 관심은 외모가 아닌 중심이었고,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외모가 잘났든 못났든 그것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데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키가 크든 작든 그것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살피시는 것은 중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속사람이요, 사람들의 마음이요, 사람 됨됨이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여덟 명의 경쟁자 가운데서 선택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형제 가운데 그가 선택된 이유는 단 한가지 입니다. 그의 중심이 다른 형제들보다는 아름다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3:22절에도 보면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중심이 어떠했더란 말입니까? 오늘 헌신 예배를 드리는 한나 여전도회원들과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중심은 어떠해야 합니까? 본문을 통하여 교훈을 얻어 본 받고자 합니다.

1. 먼저 단점(열악한 환경)과 열등감을 극복해야 합니다.

본문 7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처음 외모를 중시하여 왕을 선택했던 일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사실을 사무엘로 하여금 회고케 함으로써 그 같은 실수의 재발을 방지 하려고 하셨습니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고 하신 본문에서 "용모"(* , 마르에)는 '보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라아'(*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곧 얼굴 생김새나 풍채 등 겉으로 보이는 모습(appearance) 자체를 가리킵니다(창 2:9; 12:11; 민 8:4).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머리에 기름 부을 자를 택할 때 결코 외적인 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해석할 때 ‘용모나 신장은 무조건 배격하고 무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다윗을 보면 ‘당시 용모는 보잘 것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경우 ‘자신의 열등감의 문제를 극복한 인격과 중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선 다윗은 형들에 비해 키가 매우 작았습니다. 그는??'키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좌우간 전쟁터에 자원하여 났던 모습을 본 골리앗이 개로 여길 정도였으니까요? 어디 그뿐입니까? 사울의 갑옷을 입혀 놓았더니만 ‘걸음걸이가 자유롭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체구가 작고, 키가 작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도 보면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바로 이 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아이"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때의 다윗의 나이가 얼마였느냐? 어떤 주석학자들은 약 15세로 정도로 이야기합니다. 한마디로 ‘어리고, 작고, 별 볼일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요. 키가 작다는 단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본문 11절에도 보면,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이 말의 뉘앙스가 역시 좋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아버지 이새가 꼭 하고 싶은 말이 빠져 있습니다. “시원치가 않습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여 선지자가 온다는데도 그를 들로 양을 지키고 다른 형들을 오게 하려고 내 보냈습니다. 우리 집에 왕이 탄생한다면 '너는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새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형들은 또한 그를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한 번은 아버지 이새가 형들이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에 형들의 안부를 물으려고 다윗을 보내게 됩니다. 그때에 형들이 다윗을 보고 빈정거리며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네 가 여기는 도움이 안 되는데 웬일로 찾아 왔느냐? 전쟁터에 오히려 짐이 될 뿐이라"는 식으로 나무랐습니다. '즉, 양들이나 칠 것이지, 네가 전쟁터에는 무엇 하러 왔느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여러 가지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다윗은 얼마든지 자기 열등감을 가질 만하다고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더군다나 여덟 번째 아들이었다면, 아마 모르긴 해도 제 밥그릇 찾아 먹기도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옛날 아들 많은 집에서 말째아들, 별 볼일 없었습니다. 옷이고, 신발이고, 가방이고, 책이고 간에 새 것을 접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형들이 입고 신었던 것을 그대로 물려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난 서열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그가 여덟 번째 아들이기에... 막내이기에 선택 받은 것은 아닙니다. 여덟 번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가 작은 아이이기에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작은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선택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열악한 환경을 항상 믿음으로 극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단점과 열등의식을 극복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골리앗도 두려워하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갔던 중심을 항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바로 이런 점을 높이 보셨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스타일이 되었습니다.

오늘 헌신 예배를 드리는 한나 여전도 회원들이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나는 단점도 많고, 자랑할 만한 것도 없고, 적고 부족하지만 다윗처럼 자원하여 헌신해 보시기 바랍니다. 5병2어의 기적은 적은 것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드리겠다는 자세와 믿음으로 헌신할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의 기적도 이런 자세로 헌신한다면 분명히 기적이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했습니다. “이가 그”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별 볼일 없었을 런지는 모르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저의 25년 짧은 목회 경험 가운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아래 사람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크면 얼마나 크고, 작으면 얼마나 작다는 것입니까? 상대방이 배웠으면 얼마나 배웠고, 못 배웠으면 얼마나 못 배웠다는 것입니까? 사실 동창생들을 만나보면 애 낳고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고, 못났으면 얼마나 못났다는 것이냐?

그저 ? “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산다. 야~야~야~야!”라는 유행가 가사도 있는데 ‘고~저 당당하게 살아야 합네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하루 밥 세끼 먹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못났다고 기죽을 것도 없고, 잘났다고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열등감 가질 것도 없고, 그렇다고 목에 힘줄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그 환경과 그 조건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택하여 쓰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오히려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리는 종종 환경에 대하여, 또는 자기 자신의 못난 부분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뜻을 그릇 칠 때가 많습니다. 소위??‘지나친 열등감’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한 가지 이상은 흠이 있고, 약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환경이 좋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건, 부자건, 권세가 있던 심지어 미모가 빼어나 잘 생긴 사람이건 간에 한 가지 이상씩은 자기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표현과 말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한번 물어보세요. 미모가 출중한 사람에게 어떤 부분을 뜯어 고치고 싶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모두가 다 같이 어떤 부분을 고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열등감을 일컬어 ‘만인 공통 병이요. 불치의 병’이라고 했습니다. 이 병을 고치기가 가장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결코 완전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가만히 보면,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열등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이상한 행동들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하거나 어느 가정을 심방을 가면 제가 뭐라고 무시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유명한 사람이나 권세 있는 사람, 이름만 들어도 다 알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성을 과시합니다. 스스로가 자신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 무시하지 마시오.’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자기 열등의식이 많은 사람 같이 선전하고 있는 것과 같이 느껴집니다. 저는 오히려 ‘바로 저걸 극복해야 되는 데’라고 말해주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대하고 삽니다. 그 중에 가장 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열등감'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슨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고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모두 다 오해로 받아들이니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 '고질적인 병'입니다. 무엇이라고 설명해 줘도 이해가 먹혀들지가 않습니다. 매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려고 하기에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는 사람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을 대하면 피곤하지 않습니까? 같이 마음을 나누고, 교재를 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가장 부담이 없는 사람은, 가장 대하기 좋은 사람은 열등감을 극복한 사는 사람입니다. 가만히 보면, 그런 사람은 못난 부분까지도 오히려 개성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렇게 매사에 당당하게 행동하니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심지어 주의 일도 열심히 할 수도 있고, 깨끗한 봉사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저는 환경이 남보다 좋다는 얘기가 결코 아닙니다. 꼭 같은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했다는 차이가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J. 하비스’라는 사람이 승자와 패자를 비교한 재미있는 글이 있어 소개하려고 합니다. 9가지로 비교했는데, 한번 들어 보세요.

① 승자는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하는데, 패자는 '예스'와 '노'를 적당히 한다.
② 승자는 넘어지면 일어나서 앞을 보는데, 패자는 넘어지면 뒤를 본다.
③ 승자는 눈을 밟아 길을 만드는데, 패자는 눈이 녹기만을 기다린다.
④ 승자의 주머니에는 '꿈'이 들어 있는데, 패자의 주머니에는 '욕심'이 들어 있다.
⑤ 승자가 잘 쓰는 말은 ‘다시 해보자’인데, 패자가 잘 쓰는 말은‘ 해 봐도 별수 없어’이다.
⑥ 승자는 걸어가면서 '계산'을 하는데, 패자는 출발하기도 전에 '계산부터' 한다.
⑦ 승자는 강한 자에게는 강하고, 약한 자에게는 약한데, 패자는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하다.
⑧ 승자는 '행동으로 말을 증명'하나, 패자는 '말로 행위를 변명'한다.
⑨ 승자는' 인간을 섬기다가 감투'를 쓰는데, 패자는 '감투를 섬기다가 결국은 바가지'를 쓰게 된다.

자! 보세요, 승자나 패자나 꼭 같은 상황입니다. 꼭 같은 환경이요, 형편이지만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행동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열등감이나 나의 단점까지도 나의 부족한 모든 것을 극복한 사람, 그가 '진정한 승자가 된다.'라는 얘기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도 원망하려 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태어 날려면 첫째로 태어날 것이지 왜 하필이면 말째란 말인가?’, ‘기왕이면 형들처럼 키도 크고 용모도 준수하게 태어날 일이지 왜 하필이면 요 모양 요 꼴로 태어났단 말인가?’, ‘어머니 왜 날 나으셨나요?’ 얼마든지 원망하고 비관할 수도 있겠으나 그는 이 모든 단점이 되는 문제를 극복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얼마나 성격이 좋았던지 말입니다.

시편 139:14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神妙)막측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나를 이렇게 기가 막히게 나를 지으셨냐?’는 것이지요. 기가 막히긴,

제가 성경을 보면서 느낀 소감은 외형적인 면에서는 별 볼일 없던 대요? 그런데도 보세요. 다윗은 신앙적인 차원에서 이미 자신의 단점을 소화했습니다. 이렇게 봐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 감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선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의 중심에는 남달리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는 외모가 시원치 않을수록 ‘내적인 사람에 더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유일한 별명이 ‘정직한 다윗’,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던 다윗’ 아닙니까? 외모가 아닌 정직성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과 마음에 승부를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7절에 "사람은 외모를...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외모'(* , 아인)는 직역하면 '눈'(eye)이란 뜻으로서, 곧 '육신의 눈'(肉眼)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중심'(* , 레브)은 직역하면 '마음'(heart)이란 뜻으로서, 곧 '마음의 눈'(靈眼)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러한 원문의 뜻에 맞추어 본 절을 해석하면,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보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의 눈)으로 보느니라,"란 뜻이 됩니다(Klein). 즉 이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에 있어서 인간의 척도와 하나님의 척도가 전혀 다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는 비록 인간은 육신의 눈을 가지고 사람의 외적 용모, 신장, 배경 등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눈을 가지고 사람의 내적 겸손, 신앙, 인격, 진실성 등을 감찰하신다는 의미입니다(대상 28:9; 시 7:9; 눅 16:15).

우리 교회 한나 회원들과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중심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여자 수상이었던 ‘골다 메이어’수기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재인용할 것 같으면 “나는 어렸을 때에 하도 못 생겨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 심지어는 부모도 나를 시원치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에라, 공부나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했더니 결국은 오늘에 이르러 수상이 되었다." 라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못생기므로 해서 잘된 사람의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약점 때문에 월등히 잘 된 케이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환경을 극복했고, 외적인 ‘컴플렉스’를 극복했고,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열등감을 가지고 고민하는 분들 있습니까? 제발 잊어??버리세요. 떼어 버리세요. 하나도 유익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주의 일을 하고, 쓰임 받는데 장애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그리고 자신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자존감부터 회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귀히 여겨 직분과 사명을 맡겨 주셨는데 왜 할 수 없다. 능력이 없다. 부족하다고 교만을 부리십니까? 주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나의 부족함이 있음에도 불고하고 능력주시는 하나니ㅐㅁ을 바라보고 앞장서서 충성하는 한나여전도 회원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성실해야 합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이새가 다윗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분위기로 보면, 이것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 날은 다른 날과는 달리 ‘사무엘선지자’가 자기 집에 방문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접대위해 새벽부터 소를 잡는다, 양을 잡는다. 모든 식구가 난리 법석들을 피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형들은 ‘아침부터 목욕을 한다. 이발을 한다.’는 등등 야단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날, 이런 순간인데도 다윗은 들에서 오직 양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의 양이 아닌 '아버지의 양들'이었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양들이라지만 마치 자기의 양들인 양 생각하며 돌보았습니다. 여기에 바로 다윗의 '성실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 그의 중심에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헌신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의 그 아름다운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임을 교훈해 줍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시면서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어느 때 부르심을 입게 되었는가를 주목해 보십시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한가한 가운데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두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다 공통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일에 대하여 열심히 움직이며, 최선을 다하여 부지런하게 일하는 가운데 ‘성실성’을 인정받아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되어 부름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고,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렇습니다. 할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 그런 사람은 하나님도 쓰시지 않습니다. 게을러빠진 사람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선택받거나 쓰임 받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부지런 함'이요, '성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본문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모습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선택하여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일의 귀천이 아니라 '성실성''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지거나 맡겨진 일에는 최선을 다해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다윗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의 '성실성 때문'입니다.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라는 말씀이 이를 증명합니다. 잔치 분위기로 한창 들떠 있는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자기 위치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훌륭한 장점이 되었습니다.

성도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성실한 사람은 주인의 일을 나의 일처럼 합니다. 어떠한 일을 맡아도 눈가림으로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책임성 있게 일합니다. 범사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성실함으로 일합니다. '철저한 프로의식'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이 성공하고, 하나님께도 인정받습니다.

요사이는 일본과 미국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아 졌습니다. 일본에서도 반도체를 만들고, 미국에서도 반도체를 만듭니다. 그 기술에서 원리적으로는 미국이 월등하게 낫습니다. 물론 지금은 한국이 세계 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만 저는 앞으로가 걱정이 됩니다. 왜냐하면 ‘주 5일제 근무제’ 때문입니다.

사실 이상하게도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제품은 불량품이 100만분의 1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그에 비해 1만분의 1이 불량품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사람을 일본에 보내어 연구하고 조사하게 했답니다. 보냄을 받은 연구원이 일본에 가서 몇 달을 함께 일하면서 그 원인을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사람들은 일을 하다가도 퇴근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일본 사람들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일단 시작한 물건에 대해서는 끝을 내고서야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시간에 대해서 미국 사람들은 얼마나 칼 같습니까? 물론 이런 자세는 좋은 점도 있지만 일에 있어서만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실 일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 날 와서 그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 전날 같겠어요? 일에는 '리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가장 많은 불량품은 '금요일'과 '월요일''에 만들어진 물건들이라고 합니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데는 ‘주 5일 근무제’니까 금요일만 되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바캉스 나가고, 여행가고 놀러 갈 생각 때문이랍니다. 그들은 즐기기 위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월요일에는 '월요병'을 앓게 됩니다. 이틀 푹 쉬고 나서 다시 일을 시작하려니 일손인들 제대로 잡히겠습니까? 그러니 불량품이 자연히 많아질 수밖에요. 어딘가 모르게 불량품, 즉 '하자'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기업부터 시작된 5일 근무제 때문에 저는 앞으로 우리나라에 이런 영향이 미칠까봐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지독하더랍니다. 일단 시작한 물건에 대해서는 '끝을 맺겠다는 자세'로 삽니다. 일 만큼은 철저한 '프로정신'이 있더랍니다. 심지어 일본 사람들은 '노동쟁의'를 할 때에도 숫자는 줄일망정 '불량품을 만드는 일은 절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목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한 때 하자가 많은 자동차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런 자동차를 구매한 적이 있기에 확실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이런 자동차는 대부분 '데모하면서 만든 제품들'이었습니다. '이 놈의 회사 망해 버려라.'라는 심보들이 들어 있으니 온전한 상품인들 만들어 지겠습니까? 그것이 국제 경쟁사회에서 게임에 승산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런 기간에 수출이 부진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몇 년 전에 별 이상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라는 책 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이 역시 '성실성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주인의식과 책임의식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다윗의 이 마음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이것은 외모의 문제가 아닌 성실성의 문제였습니다. 우리 한나 여전도 회원들이 이 부분에서 뛰어나면 참된 헌신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사람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별로였는데, 한두 번 만나다 보니 괜찮은 사람이 있습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호감이 가고,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처음에는 호감이 가고 괜찮아 보였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싫증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저런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안 만났으면 좋겠다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속사람의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외모에 있는 것도 아니고, 조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의 '인간성의 문제'요. 그의 속사람, 그의 '중심의 문제'입니다. 잘 생긴 사람, 물론 처음 만났을 때 호감이 갈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두 번째 만나고 세 번째 만나고부터는 외모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본성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역시 중요한 것은 '인간성의 문제'요, '인격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대로라면 하나님께서 선택한 기준은 역시 '속사람의 문제'요, '중심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간 우리를 보시는 것도 외모가 아닌 '중심'입니다.

본문 13절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부었더니"라고 하였는데 다윗은 모두 3차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즉 여기 첫 번 기름 부음은 비공식적으로 이새의 가족만 참석한 가운데 은밀히 부어졌고, 두 번째의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올랐을 때(삼하 2:3, 4)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마침내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했을 때(삼하 5:3)받았습니다.

본문에서는 "그 형제 중에서"라고 하였는데 첫 번째 부음으로 이것은 형제들이 목격하는 가운데서 다윗이 기름 부음 받았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때 이새의 가족 이외의 사람들은 그 장소에 아무도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형제들은 사무엘의 엄중한 부탁과, 그리고 사울의 보복 등을 우려해 그 사실을 비밀로 유지한 듯합니다(Leon Wood).

그런데 13절 후반부에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 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 이후로" 여호와의 신이 다윗에게 즉각적으로 임했고, 또한 영속적으로 임재하고 계셨음을 시사해주는 문구입니다(Fay).

다윗의 성실함이 변함이 없었고,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재가 변함이 없었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중심이 변함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도 어떤 마음을 가지고 예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오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은 '내적인 아름다움'과' 중심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에 최우선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에게 선택되어 기름 부음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여기에 성령의 함께 하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 3장에서 기도합니다.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헌신 예배를 드리는 한나 여전도 회원들과 모든 성도 여러분들께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중심을 바로 세워 단점과 열악한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해 내며, 나에게 주어진 사명과 직분에 성실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참된 헌신자의 삶을 살며, 아름다운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복 빌어 드립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이 모습 이대로 불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여, 간절히 원하옵기는 속사람을 거듭나게 하사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범사에 새롭게 하시고, 속사람을 아름답게 하시며, 속사람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등감에 사로 잡혀 살았던 속사람이 치유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다윗처럼 중심을 바로 세워 성실하게 나에게 주어진 일들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중심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주의 일에 요긴하게 쓰임 받는 그릇, 성실함 대문에 쓰임 받는 복된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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