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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제 사랑에 더욱 힘쓰라 (살전 4:1~2,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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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지 며칠 안 된 쌍둥이의 불가사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쌍둥이 중 한 아이가 심장에 큰 결함을 안고 태어났는데, 의사들은 하나같이 그 아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며칠 동안 그 아기는 병세가 계속 악화되어 죽기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 한 간호사가 쌍둥이를 하나의 인큐베이터에 함께 넣자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병원의 방침에 어긋나는 일이었기에 담당 의사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엄마 지궁에서처럼 두 아이를 한 인큐베이터 안에 나란히 눕히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쌍둥이는 한 인큐베이터 안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아이가 팔을 뻗어 아픈 동생을 감싸 안았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동생의 심장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체온도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생은 조금씩 나아졌고, 현재 두 아이는 완전히 정상으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문을 들은 한 신문 기자가 인큐베이터 안에서 서로를 포용하고 있는 쌍둥이의 사진을 찍고는“생명을 구하는 포옹”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동물은 먹이를 먹고 살지만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랑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이미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9절에“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해 본문 10절에 권면하기를“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하셨습니다. 사랑의 실천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누군가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의 사랑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과 목소리에는 치유의 능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치료, 사랑, 승리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자신의 필요에서 눈을 떼고 남에게 복을 전달하는 도구 역할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요구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복으로 우리에게 갚아 주십니다.
누가복음 6:38에“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하셨습니다.

一. 왜 형제를 사랑해야 할까요?

1.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입니다. 성경찬송을 들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 자녀의 증거 가운데 하나가 되지만 이보다 더욱 확실한 증거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교회에 나와서 예배는 드리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의 신앙은 믿을 수 없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20-21의 말씀에“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옛말에“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처갓집 울타리에 앉은 참새도 사랑스럽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속성 중 한 가지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나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성도 즉 같은 믿음이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눈에는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허물까지도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혹 이웃의 허물이 자꾸 보입니까? 미운 마음이 자꾸만 일어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마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2.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빛에 거하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참된 신앙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9,11에 말씀하시기를“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캄캄한 어두움 속을 헤매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흑암 속을 헤매는 사람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방향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원하는 곳으로 갈수가 없습니다. 남는 것은 고생뿐, 결국은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빛이 없는 곳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이 강단의 화초를 보시기 바랍니다. 빛이 들어오지 않으므로 낮에도 형광등을 켜서 빛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 식물들은 곧 죽고 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에게 있어서 빛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형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어두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악한 영 즉 사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미혹된 사람이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3:14에“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하셨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신앙이 아니고, 어두움의 세력인 사탄이 기뻐하며 인정하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더욱 분명하게 밝히는 성경이 고린도전서 13:1~3에 있습니다.“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떠한 믿음이라도 모두가 쭉정이라는 것입니다.

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토록 형제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일까요?

1. 이웃을 먼저 배려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4~7에“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모두가 이웃의 처지를 먼저 이해하며 고려하는 것에서 나타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인 것입니다.

어느 일본인은 겨울에 집을 팔고 이사를 떠나면서 그 집에 이사 올 사람을 생각하며 배려한다고 했습니다. 추운 날씨에 이 집에 이사 오는 사람이 추위에 떨 것을 생각해서 작은 난로 하나에 불을 피워두고 갔다고 했습니다. 새 난로에 기름을 가득 채워두면 이사 올 사람이 부담스럽게 느낄까봐, 버려도 아깝지 않을 난로에 적당한 량의 기름을 부어 불을 피워두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에서“사랑은 관심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아닌 상대방에 관심을 두는 것, 상대방을 먼저 이해하는 것 이것이 곧 사랑인 것입니다. 자기입장, 자기처지만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2.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자꾸만 주고 싶어 합니다. 많은 것을 주고도 아직도 적게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야고보서 2:13~17의 말씀에“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하셨습니다.

영화“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부분에 사랑이 무엇이지를 보여줍니다. 오스카 쉰들러는 유대인 학살에 환멸을 느낀 독일인입니다. 그는 평생토록 유대인 구출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어 놓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나는 충분히 하지 못했다. 내가 타고 다닌 이 차를 팔았더라면 열 명은 더 살렸을 터인데, 아, 이 반지를 팔았더라면 세 명은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三.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 위대한 사랑, 이 고귀한 사랑을 어떻게 하면 행할 수 있을까요? 사랑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의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의지적 인내요, 예의요, 섬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더욱 많이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인 다짐과 노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아가페 사랑 즉 끝없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만 이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부어 주셔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엄청난 사랑, 그 큰 사랑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성으로 교회를 섬겨온 어느 목사님 사모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중풍으로 안면마비가 왔습니다. 그분은 너무도 속이 상해 하나님을 몹시 원망했습니다. “하나님, 어쩐 일입니까? 그토록 주님을 위해 정성 다해 교회를 섬겨왔는데, 이 몹쓸 병을 주시니, 너무 억울합니다. ”이렇게 몇 날 며칠을 울면서 기도하는데 문득 깨달음이 오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교인이 아니라, 자녀들이 아니라, 남편이 아니라 저에게 이 병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하다면 이 한 몸 사랑의 제물이 되겠습니다.”라고 다짐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후 중풍은 말끔히 치유되었습니다. 이분은 사랑의 승리자였습니다. 사랑으로, 오직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긴 것입니다.

한 무명 시인은 그 사랑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했을 때,
참 많이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하여...

내가 나의 사랑으로 남편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울어야만 했습니다.
남편을 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나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화를 내야만 했습니다.
아이를 잘 키워야 하는 욕심 때문에...

내가 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했을 때,
참 많이 참아야만 했습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윤리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니 사랑하는 일이 쉬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일이 감사가 됩니다. 사랑하는 일이 기쁨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별 수 없습니다. 내 사랑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더 큰 사랑,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충만케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끝없는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여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약속하시기를“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누가복음 11:11~13)라고 하셨습니다.

한 미국인 소녀가 아버지와 함께 이스라엘 성지 순례에 나섰습니다. 그때 한 테러리스트가 쏜 총알이 아버지의 머리를 관통했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소녀는 범인을 찾아내 복수를 할 생각으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위싱턴 포스트 기자가 되어 이스라엘 근무를 자청했습니다. 그녀는 법원기록을 뒤져 12년 만에 범인의 소재를 확인했습니다. 테러범의 이름은 오마르 하티브였습니다. 복수의 기회를 맞은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범인과 가족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인 그녀의 마음속에 갑자기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드려왔습니다.“진정한 복수는 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리적 복수는 동물적 본능일 뿐이다.”

그녀는 테러범과 가족에게 오히려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범인의 가석방을 위해 청원서를 제출하는 차원 높은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로라 블루멘펠트 전 워싱턴 포스트기자의 이름입니다. 세상의 싸움은 때려 눕혀야 승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상대를 용서해야 승리합니다. 용서는 최선의 복수입니다.

잠언 25:21~22에“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하셨습니다. 이렇게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이르러야할 사랑의 경지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우리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더욱 힘쓰기를 권면하시는 사랑의 대상은 형제입니다. 이 형제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구원받은 같은 교회의 성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모두 믿음 안에서 한 형제자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빛에 거하는 증거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참신앙의 증거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며 기도하므로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아가페 사랑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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