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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주기도문 세 번째 강해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분은 ‘우리 아버지’이시면서,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이는 우리가 기도하는 분의 양면성을 보여줍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처럼 자상하고 우리가 간구하기 전에도 미리 아시는 친밀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하늘에 계신 극히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기도의 생명은 이 친밀감과 긴장감의 양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친밀하기만 해도 우리 신앙생활이 방만해지기 쉽습니다. 현재 우리 기독교의 모습이 이쪽에 많이 치우쳤습니다. 또 하나님의 초월성, 거룩성만 강조되도 율법적이 되거나 두려운 하나님이 되기 쉽습니다. 유대교의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기도는 이런 긴장감과 친밀감의 두 가지를 붙잡고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 보좌의 지성소 앞에 담대히 나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엄위하심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오늘 같이 나눌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초월성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을 ‘여호와’, ‘만군의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 등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됩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10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의 인식은 좁은 팔레스틴 땅에서 전 세계적인 시야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호칭이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좁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우주를 다스리는 ‘하늘의 하나님’이시다는 고백입니다.

또한 하늘은 높고 범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에둘러서 말할 때 이렇게 ‘하늘에 계신 분’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어, ‘여호와’ 라는 이름만 나오면 ‘아도나이(나의 주님)’ 하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 보다는 하늘에 계신 분으로 잘 불렀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잖아요. 높은 분을 부를 때는 직접 부르지 않잖아요. 북당은 북쪽에 있는 집인데 이는 부모님이나 임금을 가리킬 때 에둘러 하는 표현이지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나라를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고도 하고 천국 곧 하늘 나라라고도 하는데 이는 같은 표현입니다. 엄밀히는 하나님 나라가 더 맞습니다. 그러나 다른 세복음서와는 달리 마태복음에서는 이 하나님 나라를 모두 ‘천국’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습니다. 천국은 ‘저 높은 하늘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분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의 독자들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마태가 유대인의 시각에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우리가 기도하는 분은 저 높은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그래서 기도할 때 긴장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 내키는 대로 기도하고, 기도 응답이 속히 안 된다고 불평하고 원망할 만한 만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인정한다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것은 출애굽한 후 시내 산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현현하실 때의 모습을 출애굽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제 삼 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출19:16,18)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천둥과 번개, 빽빽한 구름과 연기, 지진과 불 가운데 임재하십니다. 여러분 천둥벼락이 바로 여러분 앞에 쳤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그처럼 두려워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옛날 제사장들의 옷을 에봇이라고 합니다. 이 에봇 아랫단에는 금방울을 답니다(출28:33-35). 그래서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납니다. 금방울을 왜 다는지 아세요. 성소에 들어갈 때 그 소리가 나야 삽니다. 소리가 나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그 정도로 성소에 들어갈 때 조심했습니다. 이사야서 6장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때 이사야의 첫마디는 이러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니까 자기의 부정이 다 드러나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스랍이 나타나 화저의 숯불로 이사야의 입술에 댑니다.

아마 마지막 최후의 심판 때도 유사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빛 중에 빛이신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음 놓고 죄를 저지릅니다. 그러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중에 마지막 심판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거룩 분이라고 고백할 때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우주가 얼마나 넓습니까? 그 크기가 200억 광년에 이른다고 하고 더 클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200억 광년은 빛의 속도로 200억 년을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런 우주에 비하면 지구는 얼마나 작습니까? 그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정말 개미보다 더 미미한 존재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주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인간과 하나님은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또 우주의 법칙이라는 것을 얼마나 오묘하고 정확합니까? 해는 지구가 형성된 이래로 정확히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 우주는 서로 충돌하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입니다. 뉴턴은 만유인력과 운동 법칙 등 많은 과학적 발견을 한 사람이지만 그는 자신을 “아직 탐구되지 않은 거대한 진리의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는 아이”에 불과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참으로 아는 것도 많지 않고, 수명도 채 백년도 되지 않으면서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안다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하나님이 있다 없다 함부로 말을 합니다. 그리고 조그만 진리를 알면 마치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우리의 고백은 ‘하나님 당신을 모르겠습니다’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마치 먼 데서 산을 바라볼 때는 손에 잡힐 것처럼 느껴지지만 가까이 갈수록 산의 위용에 앞도 되듯이 말입니다.

구약 욥기는 인간의 알량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무지를 폭로하는 책입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라 할 정도도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재앙이 닥쳐 그의 전 소유물을 빼앗기고 맙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자녀들도 전부 목숨을 잃습니다. 그 자신 또한 온 몸에 악창이 돋아 재 가운데 앉아 기왓장으로 가려운 곳을 긁고 있는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의 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그 대화의 주제는 고난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의 주장은 단순합니다. 의로운 자는 복 받고, 죄인은 고난 받는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고난을 받고 있으면 무언가 숨겨놓은 죄가 있기 때문인데 욥에게 그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욥은 자기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 이 고난은 가혹하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낱낱이 센다면 그 앞에 설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결국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다보니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고, 하나님에 대해서 제발 내 인생에 개입하지 말고 가만 놔두라고, 나는 죽는 것이 더 낫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셨으니 왜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해줄 것도 같은데 하나님의 대답은 전혀 엉뚱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세상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고 물어 봅니다. 바다속은 어떻게 생겼으며,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지, 네가 악어를 이길 수 있는 지 악어의 힘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 물어봅니다. 이에 대해서 욥은 묵묵부답입니다.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욥에게 인간의 유한성을 가르쳐줍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욥기의 결론은  42장 1-6절을 보시겠습니다. 욥기의 결론이며 해답입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을 ‘계시된 하나님’과  ‘감추어진 하나님’(abscondus Deus)으로 구분했습니다. 계시된 하나님은 성경이나 자연 계시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빙산의 일각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지식의 짧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을 향하여 우리가 선포하고 싶은 말은 전도서의 말씀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5:2)

인류 역사에서 가장 낙관적인 시대는 아마 19세기였을 것입니다. 이때는 하나님 보다는 인간 이성과 과학을 신봉했으며 이성과 과학에 기초해서 유토피아를 꿈꾸던 시대였습니다. 신학에서는 그래서 자유주의가 풍미해서 성경의 권위를 해체하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땅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과학에서는 진화론이, 사회과학에서는 공산주의 유물론이 풍미하며 유토피아적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 이성으로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 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낙관론은 20세기에 들어와 제1,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정권의 등장과 함께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이성이 만든 결과라는 것은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고, 6백만 명의 유태인이 개스실에서 사라지는 가장 반인간적이고 폭력의 결정판이었습니다.

신학에서는 이때 신정통주의가 등장합니다. 다시 정통을 부활하자는 운동입니다. 칼 바르트가 중심인데 그는 로마서 주석을 썼습니다. 이 로마서 주석은 자유주의자들이 놀고 있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에 비유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성을 신봉했던 자유주의자들은 민족주의와 결탁하여 제1차 세계대전을 지지했습니다. 이때 칼 바르트는 전도서의 이 말씀, 곧 “하나님은 하늘에, 인간은 땅에 있으니 잠잠할지어다”라는 말씀을 가지고 자유주의자들과 싸웠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진리 아래서만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이성은 방종이나 인간 욕심의 합리화로 가고 맙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닌 것이 우리 중심에 자리할 때는 반드시 썩게 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외에 절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공중에 뜨인 돌과 같습니다. 우상처럼 서 있는 인간적인 이념과 어리석은 생각들을 철저히 깨뜨리십니다. 시편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들을 보는 하나님의 태도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2:4) 그래서 기독교인은 영원한 나그네일 수밖에 없습니다. 땅에 있는 어떤 것으로든, 그것이 물질이든, 체제이든, 사상이든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모든 것들은 상대화 되고 영원히 개혁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기도는 순종을 배우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이런 거룩함과 전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분의 지엄한 명령이라면 우리는 그에 순종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더라도 가라 할 때 가는 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저는 그래서 기도는 듣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위엄하신 분 앞에서의 충성된 자의 태도입니다.

앤드루 머레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날부터 순종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 고 말했습니다. 순종 중 최고의 순종은 자기의 도구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 하나님께서 ‘나’라는 도구를 이런 목적으로 만드셨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이런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런 도구로 지음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연세계는 다 자기 처지를 감사하는 데 유독 인간만이 불만스러워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처럼 되지 않은 것 때문에 자기 운명을 한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고백할 때 인간은 정반대로 땅에 거하며, 유한하며, 바람 같이 덧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그저 벌벌 떨고만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하는 하나님이 단지 ‘하늘에 계신 분’일 뿐이라면 그럴 것이지만, 그분은 또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무자비한 폭군이나 불가해한 신비적 대상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십니다. 

하늘에 계신 분이 우리 아버지 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은 무능력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우주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껏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짖는 대로 다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분이 우리 아버지시라면 우리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높은 하늘에서 우리 인생을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2차원적 인간인지라 눈앞에 있는 것만 보지만 하늘에 계신 분은 우리의 먼 미래를 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충분히 우리 인생을 맡겨드려도 안전합니다.

하늘에 계신 분이 우리 아버지시라면 우리는 두려울 게 없습니다. 이 우주에는 하나님을 이길 신이나 세력은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 아버지신데 두려워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 어떤 위협이나 문제나 권세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이라고 우리가 기도하면서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진지하게 무릎을 꿇기를 원합니다. 또한 그 하늘에 계신 분이 우리 아버지 되신다는 사실에서 희망과 안전과 담대함을 얻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은혜를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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