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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기쁨 (출 36:8, 요삼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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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유명 대학들의 교훈을 보면 성경적입니다. 하버드대학교는 교훈이 ‘진리’입니다. 예일대학교는 ‘진리와 빛’입니다. 프리스턴대학교는 ‘신구약성경’입니다. 옥스퍼드대학교는 시편 36:9절입니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입니다. 이런 역사적 학교들은 그리스도를 본받는데서 출발하였습니다.

  한국 대학교들도 교훈에 진리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는 ‘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입니다. 연세대학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입니다. 고려대학교는 ‘자유 정의 진리’입니다. 숭실대학교는 ‘진리 사랑 봉사’입니다. 가톨릭대학교도 ‘진리 사랑 봉사’입니다. 단국대학교는 ‘진리 봉사’입니다. 삼육대학교는 ‘진리 사랑 봉사’입니다. 동덕여자대학교는 ‘도의 진리 화협’입니다. 서울시립대학교는 ‘진리 창조 봉사’입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는 ‘진리 평화 창조’입니다. 한성대학교는 ‘진리와 지선’입니다. 이화여자대학교는 ‘진선미’입니다. 성균관대학교는 ‘인의예지’입니다. 그런데 국민대학교는 ‘이교위가(以校爲家)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정말 그분은 사필귀정이지요. 많은 대학들이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교훈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우리나라의 교육이,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지성이 진리 편에 서 있을까요? 얼마나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까요? 학문은 그 자체가 진리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시류에 편승하고, 실용만 추구하고, 아집에 깊이 빠져 있는 상아탑을 보면 애처롭기도 합니다. 대학이나 학문을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교회도 진리보다는 독단이 앞서고,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상업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사회를 판단하고 큰 소리로 외칠 수 없을 정도로 권위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시편 86:11에는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성군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진리를 행하는 것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잠언 23:23에는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고 합니다. 진리를 잘 간직해야 하며 절대 진리를 팔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글에 보니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좋아함의 이유는 언제나 ‘그냥’이었다. 이유의 근거를 찾을 수 없어 결론은 언제나 ‘그냥’이다”. 좋은 것은 이유가 없어야 한답니다. 진리는 좋은 것입니다. 왜 좋은 것이냐 하면 이유가 없습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그냥 좋은 것입니다. 진리를 행함에 있어서도 어떤 이유가 없습니다. 진리를 행하는 데는 이유가 없어야 합니다.

  “군대 생활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그 답은 “없다”입니다. 사실은 많습니다. 모든 것을 내게 유익하게 받아들인다면 재미있는 일이 많습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이고, 사회에서 배울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저는 군에 있을 때 한 해에 신구약 성경을 2번 읽었습니다. 참 유익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진리를 위해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답은 ‘없다’입니다. 진리로 살면 왕따를 당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진리로 일하면 실패합니다. 진리로 사업하면 망합니다. 그러나 진리로 살아서 잘 되는 방법도 있습니다. 사실은 굉장히 많습니다. 인간답게 살고, 양심적으로 살고, 준법정신으로 살고, 자기사랑으로 살고, 이웃사랑으로 살고, 성경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여기에 유익함이 있고 재미가 있습니다. 진리는 자유케 하는 영입니다. 내가 손해보고, 조금은 더뎌도,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형제 곧 나그네에게 행하는 일은 신실합니다.

  5절에는 말합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진리를 위하여 행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형제 곧 나그네에게 행하는 것은 진리를 위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나그네에게 선을 행함으로 신실한 일을 하게 되고, 진리를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그네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변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나그네 영접을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나그네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19장에는 하나님의 천사인 나그네가 롯의 집에 와서 롯의 대접을 받습니다. 천사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예고하며 피하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은 나그네이십니다. 마태복음 25:35에는 오른편의 양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그리고 왼편의 염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예수님은 자신을 나그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그네입니다. 구약 신명기 10:19에는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고 합니다.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오래 전에 나그네 되었던 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11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나그네인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낚은 고기에게는 미끼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을 한 후 남자들이 결혼 전의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이유입니다. 원래는 여성들에게 이 말을 명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남성들이 명심해야 할 말입니다. 내게 더 이상 이익이 없으면 선을 베풀지 아니하고, 손익을 계산해서 사람을 대접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름과 얼굴이 나와야 자선하고, 내 이름하고 관계없으면 인색하고, 이익을 위해서는 펑펑 뇌물을 뿌립니다. 이것은 자선도 아니고 진리도 아닙니다.

  두 형제를 둔 어머니가 집에서 빵을 굽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도덕 교육을 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기 계시면 자신은 양보하고 형제에게 먼저 먹게 하실거다”. 이 말을 들은 형이 동생에게 “너, 예수 해” 그랬답니다. 실리와 얕은 세상의 이익 때문에 쉽게 예수를 버리고, 진리를 외면하고, 작은 이익 때문에 형제를 이용하는 것이 요즘 우리 주위의 세태입니다.

  요한이 형제 곧 나그네에게 베풀라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7절에는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순회전도자들은 물질적 보조를 받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스스로 벌어서 선교를 하는 자비량 선교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0:34-35에는 “내가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바울도, 다른 전도자들도 다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나그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하니”라고 합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피스토스’입니다. 신앙이란 말은 ‘피스티스’입니다. 두 말이 비슷하지요? 신실은 신앙적 표현입니다.

  칭찬과 아첨을 구별하는 차이는 무엇일까요? 칭찬은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아첨은 이빨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실한 행동은 가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실한 행동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섬김이 뭐냐 하면 섬자 빼고 기는 것이랍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섬김이 아닌 모든 것은 도둑질이다”고 합니다. ‘섬김’이란 서비스(service)입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서비스 정신이 없으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시인 호든은 “우리는 타인에게 선행을 베풀기 위하여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타인들이 무엇을 위해 이 곳에 존재하는지는 나는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탈무드에는 향유와 기름을 미덕을 논할 때 등장시키는 소재로 삼습니다. “좋은 기름은 아래쪽으로 흐르지만 선행으로 얻어진 명성은 위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기름은 부자만이 살 수 있으나 선행은 가난한 자도 베풀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진정한 재산은 그가 이 세상에서 행하는 선행입니다.

  욥을 의인이라고 하는 진정한 이유를 보세요. 욥기 31:32에 말합니다. “실상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지 아니하도록 나는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 욥이 의인된 한 가지 이유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우리나라에도 이런 미풍양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림도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그네를 잘 대접하여 진리 가운데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둘째,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8절에는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가이오와 요한이 함께 진리를 위하여 일하는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진리에 동참하고, 진리에 동역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46에는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 하느냐?”고 합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따릅니다,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은 진리입니다 라고 하지만 우리의 삶의 행위는 어떻습니까? 참 제자로 살아갑니까?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까? 진리 안에 살고 함께 일하고 있습니까?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다양한 이름을 가집니다. 첫째는 교인인데 교인은 “종교를 믿는 자”를 의미합니다. 둘째는 신자인데 신자는 “믿는 자”를 의미합니다. 셋째는 제자인데 제자는 “배우는 자”를 의미합니다. 제자는 스승이 있을 때 제자가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과 함께 하는 자이며, 스승을 따르는 자이며, 스승과 소명을 함께 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우리의 소명(Calling)이며 그 소명에 응답할 때 사명(Mission)이 수행됩니다.

  부를 축적하고 부를 제일로 삼는 사회는 자기구원의 사회입니다. 후진사회의 질병은 결핵, 영양실조, 폐렴, 기생충, 콜레라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풍족한 미국은 사실상 아주 새로운 질병을 만들어냈습니다. 비만, 동맥경화, 심장병, 뇌졸중, 폐암, 간경화, 약물중독, 이혼, 아동학대, 자살, 살인 등입니다. 풍족함은 핵가족, 이혼법정과 감옥, 정신병원들이 차고 넘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구원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거의 상실했습니다. 자기구원의 이념만을 가지고는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지 못합니다. 이런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반대의 사회입니다. 나그네를 섬기지 않는 사회는 진리의 사회가 아니며 이런 사회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론

  어느 부자가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이상하단 말일세. 내가 죽으면 내 재산 모두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유언했는데 왜 사람들이 나를 구두쇠라고 비난하는지 모르겠어.” 그 친구는 말했습니다. “내가 암소와 돼지 얘기 하나 해 주겠네. 어느 날 돼지가 암소에게 자신은 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하였다네. ‘사람들은 항상 암소의 부드럽고 온화함을 칭찬하지. 물론 너는 사람들에게 우유와 크림을 제공해. 하지만 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구. 베이컨, 햄, 털까지 제공하지. 심지어 발까지 주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날 좋아하지 않아.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암소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글쎄, 그건 아마 내가 살아있을 때에 유익한 것을 제공하기 때문일거야’라고 했지.” 살아있을 때 선행을 베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베푸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베푸는 일이 진리를 행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특히 전도자들에게 많이 베풀라고 합니다. 이것이 진리와 함께 행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베풂으로 복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선행을 베풀 것에 눈을 크게 뜨세요.

  이 더운 여름에 선행의 은총으로 받는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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