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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로뎀나무 아래서 (왕상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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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가운데 가장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장면을 뽑으라면 신약과 구약 가운데서 두 군데를 뽑겠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죽음과 절망과 슬픔이 변하여 부활과 소망과 기쁨이 된다. 구약에서는 아이러니 하게도 그 반대이다. 구약에서 가장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장면은 오늘 본문과 관련이 있는 왕상 18장과 19장이다. 18장에서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한다. 18장에는 환희와 기쁨과 승리와 자신감이 넘친다. 그러나 19장에는 절망과 침체와 탈진이 있다. 갈멜산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승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오늘 엘리야는 브엘세바의 한 광야에 엎드려 있다. 엘리야가 쓰러져 있었던 브엘세바는 인간이 떨어질 수 있는 최악의 절망의 모습이다. 왕상 18장과 19장은 우리들에게 가장 단순한 메시지를 준다.

“인간은 이렇게 약하다”는 것과 “가장 위대한 승리의 순간이 우리가 가장 취약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고전 10:12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누구든지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왕상 19장에서 사탄이 사용하는 전략들을 깨달을 수 있다. 마귀는 수천 년 전에 엘리야에게 성공했던 똑같은 수법을 오늘날도 여전히 써먹고 있다. 오늘 성경을 통해서 “왜 엘리야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가?”를 배운다. “그가 가진 위험성이 오늘 나에게는 없는가?”를 배운다.

엘리야가 가졌던 위험성

1. 환경을 바라보는 위험성

  엘리야는 아합의 왕비 이세벨로부터 전갈을 받는다. (19:1-2)을 보라. 한 마디로 말하면 “너 가만히 있어. 죽여 버릴테다.” 그러자 엘리야가 취한 행동은 무엇이었는가? 갈멜산에서 보여준 담대함이었는가? (3절)을 보라. 그는 브엘세바로 도망한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죽기를 기도한다.

  생각해 보라. 이세벨의 위협이 오늘만 있었던가? 갈멜산에서 대결할 때는 이세벨의 위협이 없었던가? 아니다. 그 때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왜 그는 이렇게 절망에 빠져있는가? 왕상 18장과 19장을 비교해 보면 달라진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이 달라졌다. 갈멜산에서 그는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다. 그때 까지 엘리야의 비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었다. 그 하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것도 크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제 마치 망원경을 거꾸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갑자기 그의 시각이 왜곡되기 시작한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던 그의 눈은 갑자기 주변 환경을 보기 시작한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 있던 주님께 말한다. “주님, 저를 주님에게로 오라고 하십시오.” 주님은 “오라”로 하셨다. 베드로는 조심스럽게 발을 바다에 옮겨 놓았다. 함께 있던 제자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곧 주님에게서 눈을 떼고 환경, 즉 바람과 파도를 보자마자 그의 몸은 가라앉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어? 나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어. 난 어부에 불과해.” 그는 바다에 가라앉았다.

  베드로가 어떻게 다시 배까지 되돌아 왔을까? 성경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업고 갔다는 말씀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걸어서 돌아갔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배까지 돌아가는 내내 예수님께 눈을 고정했을 것이다.

  ※ 용기의 원천인 주님으로부터 내 눈을 떼는 순간 우리는 용기를 잃는다.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공급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그 분께 초점을 맞추는 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엘리야에게 필요했던 것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자기의 시선을 계속 집중시키는 일이었다. 환경에 여러분의 시선을 고정시키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곧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추락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나의 시선을 고정한다면 우리는 나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요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기도>

  하나님! 환경과 여건에 내 눈이 머물러 있을 때도 나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내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너무 거기에 나의 마음이 뺏기지 않게 하시고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2. 어리석은 기도의 위험성

  엘리야는 이세벨을 피하여 갈멜산에서 이스르엘 평지로, 다시 남쪽으로 줄행랑을 쳐서 브엘세바까지 이른다. 갈멜산에서 브엘세바 광야까지의 거리는 약 193Km나 된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세벨과의 거리를 193Km까지나 벌려 놓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광야로 하룻길을 더 들어간다. 그리고 로뎀 나무아래서 그는 퍼져 버린다. 그가 그렇게 지쳤을 때 그는 어떻게 기도했을까? (4절)을 보라.

  그는 너무나도 어리석은 기도를 하고 있다.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한다. 죽고 싶다고 한다. 정말 엘리야는 죽기를 바랬을까? 그의 내면을 살펴보자.

  엘리야는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도망한 모습을 보면 된다. 정말 죽고 싶었다면 그는 이세벨이 그의 목숨을 찾을 때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순교를 각오했을 것이다. 그는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193Km나 도망했다.

  그러면 왜 엘리야는 이렇게 기도했을까? 그것은 그가 자기에게 벌어진 상황을 왜곡되게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을 왜곡되게 볼 때는 언제든지 그것에 정직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 기도조차도 그렇게 된다. 엘리야는 우리에게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두 번째 위험성을 보여주는데 바로 어리석게 기도하는 것이다. 엘리야는 죽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상황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했다. 이 말은 그가 능력의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진짜로는 원하지 않는 것을 기도하게 되었다.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황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능력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능력의 하나님을 통해서 상황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리석은 기도를 할 때가 많다.

  우리가 이렇게 어리석게 기도할 때가 많은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이것이 우리에게 복음이다. 만약 엘리야가 이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그대로 해주었다면 엘리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로뎀 나무아래서 곧 죽었을 것이다.

  나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으로 인해서 여러분은 하나님께 감사한 적이 있는가? 내가 기도한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기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왜 내가 그토록 간구하는 물질, 건강, 형통을 주시지 않았을까? 엘리야를 보면서 생각해 보라. 그 물질이, 그 건강이, 그 형통이 이루어졌다면 과연 나는 오늘 어떤 모습이었을까?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시 37:4)을 보라.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우리는 뒷부분을 좋아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앞부분이다. 기도할 때도 우리는 뒷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내 생각과 기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은 내 마음의 소원이었지 하나님을 기뻐함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내 소원을 이루어주시옵소서”가 아니라, 내 일평생이 걸린다 해도 “내가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나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과 일치할 수 있도록 나의 소원을 바꾸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

  능력의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는 어리석은 기도를 하지 말게 하옵소서. 나의 소원과 나의 욕망에 빠져 나를 기뻐하기보다 주님을 알기 원합니다. 주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되기 원합니다.

  나의 간구가운데서 들어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과 기쁜 마음을 주소서.

3. 나의 필요를 소홀히 하는 것의 위험성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사용하는 속임수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속임수는 자신을 소홀히 여기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감추어져 있어서 별것 아닌 것 같은데 굉장한 파괴력을 가진 것이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다른 필요들(정서적, 육체적, 영적) 필요들이 저절로 감소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리스도께 헌신한다고 해서 나의 육체적이고 정서적인 필요들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엘리야가 빠진 위험이 바로 그것이었다. 엘리야는 오랜 시간동안 일했다. 갈멜산에도 그는 사실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었다. 갈멜산의 승리 후에 그는 이스르엘로 갔는데 그 거리는 약 56Km가 된다. 그런데 성경은 그 거리를 아합의 수레보다 앞서서 엘리야가 달려갔다고 했다. 능력을 받았다고 해도 놀라운 마라톤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남쪽으로 193Km나 떨어진 브엘세바 광야로 간다. 다시 하룻길을 더 깊은 광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로뎀나무 아래서 쓰러진다.

로뎀나무 이 말이 참 재미있다. 로뎀나무는 영어로 broom tree인데 해석하면 빗자루 나무가 된다. 빗자루 나무 아래 털썩 주저앉아 있는 엘리야를 보라. 그는 깨끗이 쓸려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정신 나간 기도를 드린 것도 그래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너무 너무 피곤한 그는 정신없는 말을 하며 기도한다.

  "오늘날 기독교는 정력이 완전히 소모되도록 일하는 지도자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하워드 헨드릭스)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란 자신을 진이 빠지도록 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다. 또 휴식을 취하는 것이 헌신이 부족하다는 표시가 아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님이 쉬고 싶다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라. 목사님이 너무 지쳐 보이면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쉴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드려라.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 책임에서 저 책임으로, 이 회의에서 저 회의로 불려 다닌다. 우리는 항상 피곤에 절어있고, 아이들은 자신들을 즐겁게 해달라고 우릴 조른다. 또 교회는 성도들에게 더 고갈시키는 경험들을 제공함으로써 가족의 유대를 강화시키기보다는 갈라지게 만드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끼치기도 한다.

  기억하기 바란다. 저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기 때문에 다른 필요들은 별것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들은 여전히 육체적이고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필요를 채워야 산다. 기억해라. 저 사람은 목사니까, 장로니까, 권사니까, 다 이해할 것이다. 그건 헛된 욕망이다. 그 사람도 배려 받아야 할 사람이다. 그 사람도 영적 필요 외에도 더 채워야할 연약한 사람임을 잊지 말라.

  엘리야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 엄청난 영적인 사람이었지만 그가 오늘 그렇게 축 처져 버린 것은 다른 필요들-먹을 것, 다른 사람들의 따뜻한 위로와 돌봄, 쉼-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의 필요를 아시고 천사를 통해서 먹을 것을 주시고, 그를 위로하며, 어루만진다. 그는 소생하여 호렙산을 향한다.

<기도>

  영적인 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다른 필요를 무시하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내게 성급한 판단을 절제할 수 있게 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사 그의 필요를 채워주며, 공급할 수 있게 하옵소서.

4.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느끼는 것의 위험성

  호렙산의 굴에 들어가 있을 때에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신다. “왜 여기 있느냐?”고 묻는 하나님께 엘리야는 이렇게 대답한다. (9-10절) 을 보라.

  엘리야는 하나님을 위한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고 한탄한다. 그는 내가 없어지면 하나님의 일도 여기에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우리가 빠지는 큰 위험이다. 하나님께 없어서는 안 된 존재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손에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기 원하신다. 그러나 위험스러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실 때 우리가 그 승리를 가져오는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용하시기 원하시고 또 사용하신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 보면 잘못될 위험이 거기에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사용하기 때문에,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될거야.” 그러나 천만에 말씀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 있었던 사람들을 엘리야 말고도 7천명이나 남겨놓으셨다.

※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 붙들려 사용되기 원한다.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라. 그 생각 속에는 이미 내게 베풀어 주신 승리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그 일의, 그 사건의, 그 결과의 장본이라고 생각하는 교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겸손하게 사용되자.

<기도>

  내 일생이 주님께 사용되는 인생 되게 하시되, 내가 어떤 일의 장본인이나 공로자라고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겸손하게 쓰여지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병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완도에서 선교하고 청년들을 위해서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섬 지역의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우상과 고집스런 마음들이 떠나가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 지역 교회에 큰 힘이 되어서 전도가 잘 될 수 있도록)기도하자.

맺음말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떠난다. 이번 휴가는 로뎀 나무에서 지내라. 나의 연약함을 바라보되 절망하지 마라. 환경만 바라보지 말고,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라. 어리석은 기도에 빠지지 말고 그 분을 기뻐하라. 쉬면서 충전되고, 여러분보다 앞서서 행하시는 하나님보다 앞서는 교만을 주의하라.

  절망과 자포자기, 탈진의 로뎀 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나라.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위로와 말씀으로 여러분을 보낼 호렙산 (그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을 사모하고 발견하라. 여러분이 가는 바다와 산이, 머물 펜션이, 기도할 기도원이, 여러분이 멈추어 서서 바라볼 모든 자연이 로뎀 나무가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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