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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하여라!(1) (마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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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마5-7장 까지를 산상보훈 또는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를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신학자 부르스(Bruce)는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전 교훈의 요약이다` 라고 말하였고,
일본의 흑기(黑崎) 주석가는
    `수백의 보석으로 꾸며진 왕관`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전 생애와 교훈은 산상복음의 주해였다고 합니다.

`산상보훈은 천국의 대헌장(Magna Charta)입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불신자까지라도
산상보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심오한 교훈 앞에
        찬탄과 감복을 금치 못합니다.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 <간디>는 비록 비기독교인 이었으나
평생에 산상보훈을 애독하였고 그의 기본생활, 이를테면
그의 유명하였던 단식, 무저항주의, 비폭력주의는
    산상보훈의 교훈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란 책으로 잘 알려진 <오스왈드 쳄버스>는
산상보훈에 대해
[ 산상보훈은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
        그저 매끈하고 멋있는 금언으로만 들린다.그
래서 우리가 사는 복잡한 세상 일과에서는 아무 실용성이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한다면
산상보훈이 성령의 다이너마이트를 내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만약 우리가 산상보훈을 실생활에서 실천하게 되면
    엄청난  폭팔력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런 은혜가 믿으시기 바랍니다.

산상보훈은 계명이 아닙니다.
산상보훈은 복음서의 핵심적 가르침이라 할 수 있는 말씀으로서
성령이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할 때에
    우리가 영위하게 되는 복된 삶을 진술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산상수훈 가운데 8복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복된 삶을 누리기 위해 복 있는 사람이 먼저 되시기 바랍니다.
산상수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2>
1. 예수님이 왜 산에 올라가 제자들에게 가르쳤다고 생각하십니까?(1절)
1-2절 [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
성경에는 따로 명칭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상상수훈을 설교하신 산을 후에 팔복산이라 하여
1938년 이탈리아 건축가 <바루치>(Barluzzi)의 설계로
이곳에 팔복을 상징하는 8각형의 기념교회가 세워졌있고
교회의 바닥에는 라틴어로 여덟 가지 복에 관하여 모자이크로 새겨 놓았습니다.
이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갈릴리 바다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위 경관이 좋고 분위기가 좋아서
      이 산에서 설교를 하셨을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4:23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기적을 나타내시기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많은 무리를 보시고는
따로 산에 올라가 앉아서 나아오는 제자들에게
    산상보훈의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산상에서 설교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입을 열어 가르쳤다는 것은

1) 예수님이 구약에 약속한 선지자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이는 사40:9절에
[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리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 는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밝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 이 뿐만 아니라 마태가 
예수님의 입을 열어 가르치시는 구체적인 행동 하나까지 라도 기록한 것은
구약에 예언된 선지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시편78:1절에
[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
  라는 예언을 성취하심이다.
이와 같은 예언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고
또 무리에게 입을 열어 가르치시는 구약 예언을 성취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선지자 즉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는 말씀입니다.

2)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합입니다.   
[ 예수님은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상에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
  세상을 뒤집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 라고 합니다.
즉 산상수훈은 세상을 뒤집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속국이었으며
  자유와 행복이 이미 오래 전에 없어진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들에게는 남을 비판하는 능력은 발전했으며
        율법주의와 더불어 패배의식이 지배적이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기쁨과 소망이 보이지 않던 때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다고 하나, 하나 설명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듣는 청중들은 아주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7:28절에 무리들이 그 가르침에 놀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산에 데리고 올라가신 것은
        바로 세상과는 역설적인 진리를 교훈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산산수훈을 듣는 사람들이 누군냐? 는 것입니다.
1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많은 기적을 행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서 몰려들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고치시고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셨지만
요6:26에서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 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 무리들을 신뢰하시지는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또 주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주님 앞에 있었지만 주님이 입을 열어 가르치신 대상은
  주님이 올라가신 산으로 나아온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산상수훈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산에 올라가 앉으셨으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본받아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들뿐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산인 교회에 나아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산상수훈 중 8복에 관한 말씀으로서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8복에 대한 기록으로, 예

2. 예수님의 복의 개념은 무엇입니까?(3절)
우리 한국 사람처럼 유대 백성은 ‘축복’을 추구했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사회적 생활의 기준이었던 모세율법은
    ‘복과화’(福과 禍)로 엮어져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버리면 화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비단 한국인뿐만 아니라 복 받기를 바라는 것은 인류의 공통이지만,
소원대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복 받는 방법 즉,
      복의 정로를 알지 못해서라고 하겠습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본문에 사용한 복이란 말?
<마카리오스  makarios> 는 3가지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신의 존재나 특성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딤전1:11절-복되신 하나님이라 합니다.
      이 말은 복의 근원은 하나님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2) 하나님께 바치다 란 뜻입니다.
  영어에 복- Blessing - 피의 제사란 말에서 유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 바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에게 드리는 것을 배울 때 비로소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3) 고대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사막의 오아시스를 마카리오스라 했다고 합니다.
  목마른 자에게 주는 물과 같은 것
  그래서 하나님은 렘2:13절에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와같이 복이란?
1.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
2.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
3.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로 채워지는 삶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하나님과 바른관계를 말합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관계를 맺기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Doing 보다 Being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기 이전에 무엇이 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복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먼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는 것입니다.
그럼 팔복의 첫 번째 복은 무엇이며                     
    나는 이 복을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습니까?

3. 팔복의 첫 번째 복은 무엇이며 나는 이 복을 어떻게 받아 드립니까?(3절)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육신적으로 가난한 것과는 다릅니다.
육신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하나님 앞에 [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존재 ] 라는 것을 아는 사람
        즉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말은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인생의 Standing Point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 행복의 Atanding Point가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 교회 장로님 권사님 기도할 때 이런 기도하지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지요.
바로 사42:3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야할 Standing Point를 말하고 있습니다.   
상한 갈대 꺼져 가는 등불이란                       
사41:14절에 나오는 지렁이 같은 야곱이란 말과 같은 의미로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 것을 바로 알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아니한다면
  나는 아무 쓸 모짝 없고,
  도리어 남에게 해를 끼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의 특징은 무엇이든지 잘 받아드립니다.
가난이란 말 <프토코스> 철저하게 가난하다는 뜻입니다.
  흥부전에 나오는 가난같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란 말입니다.
밥주걱으로 맞아 뺨에 붙은 밥알 하나까지라도
  떼어 먹으려고 하는 철저한 배고픔의 가난한 마음입니다.
도저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 가난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가난하여 배고픈 사람은 무엇이든지 잘 먹는 것같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무엇이든지 다 받아드립니다. 
특히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6>
    갈급해 하고 잘 받아드립니다.
즉 은혜를 잘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영적 갈급함을 ‘헐떡이다’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시119:131절에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특징은 영적인 헐떡임입니다.
금요 기도회 때 보면 헐떡이는 갈급한 심령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목말라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겔47:11절에 경고의 한 구절이 나옵니다.
[ 진펄과 갯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
새물을 받아 드리지 못하면 소금 땅이 되어
    생물도 살 수 없는 아무 쓸모 짝이 없는 땅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 앞에 늘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시기 바라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같은 존재 왔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절로 임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때 누리는 복이 무엇입니까?4.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최대의 복이 무엇입니까?(3절)
3절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 - 바실레이아” 으로 나타냅니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는 말입니다.
이 땅이 살기 싫어 복지국가로 이민을 가려고 하면
      어느 정도 재산과 학력이 있어야 합니다만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입니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복이 있다는 말이 현재시재로 되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장차 천국을 소유할 것이다 라는 말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지금부터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에 너무 시달린 민족이라 가난 이라는 말 조차도 거부를 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소유한다는 것
    마음을 새롭게 하여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세상 잔치가 끝날 때, 이 말씀이 실감이 날 것입니다.
여기에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는 말씀은             

1.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자신이 무능한 자인 것을 알 때에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손길을 받아드립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배부른 사람은 구원의 손길을 거절합니다.
    세상 잔치가 끝나지 아니한 사람은 구원의 손길을 외면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주님을 만나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한 자들입니다.

2. 그리고 롬14:17에                             
[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 ]
이 말은 임하는 천국 즉 천국의 은혜, 평안과 기쁨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면
    성령 안에서 천국의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때는 1000원 짜리 가짜 보석을 달고도 예쁘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가짜를 달고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짜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의 은혜를 맛본 자는
이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거나 만족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세상에서 얻는 평안이 아니라
주님 주시는 참된 평안과 기쁨을 아는 자는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까?(4절)

저는 심령이 가난한 것이 하나님 앞에 서야할 Standing Point 라면
    애통하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Express way인 것입니다.
시1:1절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
      이 길과 자리 잘 선택해야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4절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어떻게 들으면 역설 같습니다.
세상에 기준에 볼 때는 가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애통해야 위로가 있고 울어야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체험한 자만이 아는 은혜입니다.
눅6:21절[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
토마스 왓슨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지 않고는 천국에 이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애통한다고 다 복이 있느냐? 참 애통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8>
성경에 보면 상한 마음 - 상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시51:17절「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 즉 애통하는 마음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상한 마음이라도 참 애통이 아닌 상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세속적 상심이라고 합니다.
  노예 흑인들의 예 - Broken heart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 추구하다 못하면 오는 좌절입니다.
  이것은 애통이 아니라 Broken heart 입니다.
참 애통은? 바로 회개의 애통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말합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에 통회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죄는  - 무지(우둔)하게 만듭니다.
  무능하게 만듭니다. 망하게 합니다.
사66:2절[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애통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
      심판 중에라도 하나님이 권고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오래 믿을수록 눈물이 말라갑니다.           
    경직화된 신앙으로 변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경직화 되어 애통하는 눈물이 마르면
    나중에 원통의 눈물을 흘릴 때가 온다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25: 달란트 비유에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주인이 하는 말이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한 달란트 받은 종이 하는 말이
[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내가 두려워 하여
    당신의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 라고 합니다.
주인이 굳은 사람이 아니라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마음이 굳어있는 것입니다.
    지금 굳어 있는 사람은 나중에 애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자로 나아가야 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에
      하나님 앞에 통회할 줄 아는 자입니다.

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할까요?
  애통은 마음의 고통입니다.
  마음이 아플 때 우리는 애간장이 탄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심령에 애간장이 타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까?

세계적인 외과의사이자 나병 치료의 최고 권위자인 <폴 브랜드> 박사  <9>
일평생 나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며,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나병환자들과 함께 살면서 깨닫게 된 것이               
`고통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하며
          세계의 고통 받는 자들을 힘 있게 위로합니다.
`나는 고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한센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 가운데,
        그보다 더 훌륭한 선물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잘 이해 안 되는 말이지요.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고통의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여러분이 끊임없이 눈을 깜박이는 이유?
            눈이 통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눈의 통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눈을 깜박이는 기능을 상실한다고 합니다.
    그 결과 안구가 마르고 결국은 시력을 잃게 되는 것이지요.       
이를 치료하기 위해 폴 박사는
나병 환자의 눈꺼풀 근육 세포와 입을 움직이는 근육세포를
    서로 연결하는 치료법을 개발해 내었습니다.
그래서 환자가 껌을 씹으면, 자연히 눈을 깜박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멋지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육신의 통증은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어 필수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의 `애통`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을 살아 있게 만드는 필수적인 기능을 감당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성을 발견하고 애통하는 것,
    우리의 영혼을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혼의 애통`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Express way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자가 될 때 받는 복된 삶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습니다.
위로라는 말 영어성경에는 Comfort라고 번역되었는데
그 뜻은 안락의 뜻으로 벽난로 옆에 안락의자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슬픔을 당했을 때 친한 친구가 찾아와서
    그만한 다행이다, 그럴 때일수록 정신차리라, 는 말들이
    조금은 마음을 따뜻하게는 할지모르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Comfort는 요새에 둘러싸여 있다는 의미로서  <10>
아무리 곤란을 당할지라도 요새 안에 있는 군인은 안전하듯이
    강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사람의 위로는 우리를 조금 따뜻하게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못합니다만
하나님의 위로는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우리로 강하게 함으로
      문제의 해결을 가져다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문제 당할 때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어야 합니다.
울더라도 창16:에 사라에게 쫓겨난 하갈이 광야에서 방성대곡할 때에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응답하시듯이
      하나님 앞에 울며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주의 위로 받으면 삶의 용기를 얻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고로 복을 좋아 합니다.
소문 만복래, 입춘대길이니
그리고 복 복자 얼마나 좋아하면
    숟가락이고 밥그릇이고 베개 이불 심지어 요강까지
    그리고 복주머니 복조리 복권
    이름은 어떻고요? 금복이 덕복이 순복이 복순 복자 (우리 교인 이름)
우리가 바라는 복이 웝니까? 돈 많이 벌어 부자되는 것
                  부와 명예 몸짱 얼짱 되는 것
그런데 예수님이 말하는 복은 그와 정 반대입니다.
예수님의 복은 영적인 복으로 시작한 영범강의 복입니다.
          영범강의 복 아시죠? 영혼이 잘됨같이........

원문에는 복이 있도다, 너희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여,
      복이 있도다 -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해 하는 자여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자는 모든 것을 소유한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들이여
    복이 있도다 자신의 죄와 무능함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자여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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