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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핍박은 은혜다 (행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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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행복한 삶일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흔히들 행복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남들 부럽지 않은 권세도 얻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돈이 많으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좋은 교육을 받아 좋은 학교에 다녀 많은 지식을 쌓으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부모로부터 양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서 양육을 받게 될 때 좋은 성품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라면서는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이웃을 만나 친구로 사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좋은 동반자를 얻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학창 시절도 중요합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또한 행복을 위한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선생님은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좋은 부모 좋은 친구 좋은 선생님은 다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조력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자라서는 좋은 반려자를 만나는 것 역시 행복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결국은 성인이 되어 한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는 역시 부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동반자를 만나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다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는 가정도 상처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반면에 모두가 다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처지에서도 오히려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겉만 보고는 모른다고 하는 것이요 보는 관점에 따라서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라온 환경을 보면 전혀 행복할 수 없는데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소중한 만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안겨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행복한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핍박자 사울을 생각해 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이 우리들에게 알려집니다. 스데반이 죽어 마땅하다고 증언했던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증인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울은 스데반이 죽인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는 말은 스데반이 말하는 것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울의 입장에서 본다면 스데반은 당연히 죽어야 될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런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도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런 자기를 인정해 주는 유대 지도자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정말 신이 났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교회를 없애려고 아주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그는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인정하는 아주 큰일을 하는 자랑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울만큼 악질도 없습니다. 사울 때문에 교회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사울 때문에 붙잡혀 들어간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누구도 나서서 이렇듯 교회를 힘들게 만든 사람이 없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부터 시작된 이 큰 박해로 인해서 모든 성도들이 다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질 정도였습니다. 교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미쳐도 이렇게 미칠 수가 있을까 싶습니다. 정말 무엇 때문에 스데반이 죽었을까 싶습니다. 헛되게 죽은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놀랍습니다. 이런 사울이 어떻게 나중에 그토록 바뀔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토록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어떻게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최고의 사도가 될 수가 있느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이고 지금의 상황에서는 사울은 정말로 위험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 증인의 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들려주었던 모든 말을 들었고 스데반이 죽어갈 때의 마지막 모습도 다 지켜보았습니다. 너무도 인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돌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감동스러운 모습을 스데반은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서 사울은 몹시도 갈등을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잘못된 사람이 그것도 죽어 마땅한 사람이 저토록 태연한 모습으로 죽어갈 수 있을까 의문이 생겼습니다. 몹시도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어!” 강하게 머리를 흔듭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피를 부르는 사자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도 그 마음속에는 스데반의 마지막 죽어가는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전하고 끊임없이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하며 섬기고자 할 때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큰 어려움 속으로 빠져들어 갈 때가 있습니다. 그토록 오래 기도해왔는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께서 어찌 이 사람은 이토록 날뛰게 만들 수 있을까 싶을 때도 있습니다. 정말 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까짓 사람 지옥에 가든 말든 난 몰라. 더 이상 상관하고 싶지도 않아.” 하는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우리들이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더 악하게 굴고 정말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움이 계속될 때 그냥 주저앉고만 싶습니다. 모두지 사방이 캄캄한 것이 어디로 한 발도 더 나갈 길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밤이 깊다는 것은 새벽이 가깝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짙고 긴 것 같아도 이윽고 밝은 아침이 오는 것입니다. 어둠이 짙고 그토록 추웠기에 아침의 여명은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요 밝은 햇살 아래 따사로움은 그저 감사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힘들어도 복음 증거하는 일과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힘쓰도록 하십시오. 지금은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좋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바뀌는 날 우리는 더 큰 감사를 주님 앞에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날을 바라보며 오늘은 견디고 이기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핍박은 은혜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자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그를 생각하여 몹시 통곡을 합니다. 하지만 통곡만 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울이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집집마다 찾아 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습니다. 자칫 잘못해서 붙잡히게 되면 감옥에 갇히는 정도가 아니라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경건한 사람들은 사도들 외에는 모두 이 박해를 피해서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던 것입니다.

어찌 교회가 이렇듯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어떤 나쁜 짓을 해서 그렇다면 이해나 되겠습니다마는 교회는 지금까지 너무도 아름답게 서로를 섬겼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거쳐서 많은 표징과 놀라운 일이 백성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솔로몬 행각에 모이곤 하였고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면서, 주님께로 나아오니, 남녀 신도들이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토록 갑작스럽게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찌 그렇게 쉽게 교회가 풍비박산이 날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도록 증인되어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핍박을 통해서 성도들을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으시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어려움이 없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조금만 편안하다 싶으면 거기에 머물러 있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 끝까지 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서로를 섬기며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일에 있어서 우리만으로 그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이 사랑을 가지고 주님의 은혜 아래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감사하며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런데 처음에 은혜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들이고 난 뒤 우리 안에 있었던 기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때의 감격과 기쁨이 지금도 우리 안에 넘치고 있습니까? 우리가 받은 방언의 은사만 해도 그렇습니다. 처음 방언을 받았을 때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시도 때도 없이 신이 나서 방언으로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누가 보면 미쳤다 소리를 들을 정도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니 어떻습니까? 왠지 기도하는 것도 시들해집니다. 그저 마지못해서 잠시 기도할 뿐 거기에 어떤 열정도 뜨거움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어려움이 생기게 되면 어떻습니까? 잠시 좌절을 하기도 하지만 이윽고는 정신을 차려서는 이 어려움을 물리쳐 달라고 눈물 뿌려가며 기도하게 되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고난도 유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직분을 맡아서 수고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재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떻게 됩니까?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시험이 듭니다. 그리고는 힘이 쭉 빠져버려서는 괜히 시작했다 싶은 마음도 듭니다. 받은바 직분이 그렇게 부담스럽게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직분을 받지 말 것을 하는 마음도 들지를 않습니까? 하지만 결국은 어떻게 됩디까?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지를 않습니까?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하고는 정신을 가다듬고는 다시 힘을 내서 섬기게 되지를 않습니까?

그래요 하나님께서 일꾼을 세워나가는 과정도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일꾼을 세우시고자 할 때 이런 고난과 핍박의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좋은 일꾼을 삼으시고자 하는 것이요 복음이 만방에 펼쳐지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먼저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은혜를 다시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하고 큰 싸움을 하고 나서 정신을 차리기 보다는 모든 것이 평화로울 때 더 기도하고 더 섬기고 더 복음 증거자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상처뿐인 영광이 되지 않도록 먼저 주님이 주신 말씀대로 구제하고 섬기며 모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일에든지 자꾸 꾀가 나고 뒤로 미루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빨리 마음을 돌이켜 다시 은혜 아래 섬기는 자리고 나아오도록 하십시오. 왠지 힘들게 느껴집니까? 그때가 바로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할 때요 그때가 바로 우리가 주님의 공급하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극복하고 넘어가야 할 때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내 입에서 불평과 원망과 시비가 터져 나옵니까? 빨리 감사와 찬양으로 바꾸십시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도 막을 수 없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모든 것의 시작은 내 마음으로부터 기쁨과 평화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감사가 아닌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 빨리 주님 앞으로 다가서십시오. 그리고 내게 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돌이켜 보도록 하십시오. 내가 받은바 은혜와 사랑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내게 있는 것으로 먼저 감사하십시오. 남들과 비교해서 내게 없는 것 내가 불만스러운 것을 보기보다 내게 있는 것, 내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오히려 더 큰 기쁨과 감사와 평안으로 넘치게 될 것입니다. 정말 힘들어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바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입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될 때도 있습니다. 이미 어려움이 닥치고 핍박과 고난이 닥쳐왔다면 잠시 머물러 서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바랍니다. 그때가 우리의 연약한 부분과 부족한 부분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짜증스럽습니까? 신경질이 납니까? 감사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세워나가시는 때요 나로 하여금 말씀 가운데로 한걸음 더 이끄시는 때임을 기억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며 다시금 주님 앞에 나아와 엎드리는 귀한 계기로 삼으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때로 어떤 시빗거리가 생기고 어려움이 닥쳐오게 될 때 우리는 절망합니다. 하지만 그때야말로 우리에게 더 큰 은혜와 복이 준비되는 때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랬습니다. 잠시는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고 큰 핍박이 일어나서 사도들 외에는 모두 유대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마는 그러나 그로 인해서 유대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어려움이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나중에 야고보가 헤롯에 죽임을 당하게 되고 베드로가 다시 붙잡혀 죽기 직전까지 가는 일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성도들을 돌 볼 필요도 있었겠지만 그렇다면 한두 명만 남아 있어도 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생기거든 거기에 매이지 마십시오. 먼저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시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빨리 그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하십시오.

핍박과 고난으로부터 그렇다면 어떻게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기도하십시오. 힘들수록 더 섬기십시오. 힘들기에 더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중 어느 하나라도 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더 큰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도록 하십시오.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를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둡다고 탄식만 하지 말고 불을 켜십시오. 말씀의 불을 켜십시오. 말씀을 붙잡으시란 말입니다. 핍박이 있기에 우리는 그 핍박 속에서 인내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내는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귀한 계기가 되는 것이요 이 온유와 겸손이야말로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복을 누리게 만드는 디딤돌인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로 와서 배우라고 했습니까? 너무도 힘들다고요?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가볍고 지기가 쉽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죽기까지 참고 견디며 섬기십시오. 그래서 고난의 때를 은혜의 때요 큰 복을 누리는 때로 바꾸어나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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