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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이신 예수 (요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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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신 예수


(8월 27일 주일 설교 말씀) 

 

  설교 : 강구원 목사


성 어거스틴에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그리고 우주가 대 폭발(big bang)로 말미암아 생성되기 이전에 시간 개념은 어떻게 되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때 어거스틴은 "우주가 생성되기 전에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대한 것은 질문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을 위해서 지옥이 존재한다고 할 만큼 신비입니다.

오늘날 과학자들도 성 어거스틴이 한 말 이상을 대답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 어거스틴이야 말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선구자적 대답을 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밝힌 말씀이신 예수는 예수의 신성에 대해 깊이를 더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선재성(先在性)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 )와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 )는 다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피조세계의 태초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태초'라는 것은 시간의 출발점인 동시에 물리적 세계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태초'는 창세기의 태초의 개념을 포함하면서도 시간과 공간이 창조되기 이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1장 2절에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는 말씀은 창조 이전의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태초는 하나님이 만물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태초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더불어 창조 전에 선재(先在)했음을 알려주는 진리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Ⅰ.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본문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태초"( )라는 단어는 시간과 공간의 시초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대 그리이스 철학자들은 말씀의 시초를 아르케( )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영원적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은 영원 전부터 계셨다는 것을 말해주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태초에 말씀( )이 계셨다"는 말은 그때부터 말씀이 계시기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말씀은 태초 전에도 계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태초 전에 이미 선재했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자(啓示者)라는 의미입니다.
로고스( )는 전 성경에 걸쳐 주로 하나님의 권능과 계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은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로고스가 하나님 자신의 계시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했습니다.

1)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본문 1장 1절에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과 함께"란 말은 성자 그리스도의 격위(格位)가 성부(聖父)와 동일(同一)하다는 것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란 말에 전치사 (프로스)는 동적(動的)공존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친밀한 인격적 관계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대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8절에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이 전치사 프로스( )가 대격과 함께 사용된 실례가 600개 이상이 됩니다. 이것은 어떤 장소를 향한 동작이나 방향을 나타낸 말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친밀한 근접과 우정과 친교를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이 전치사를 통하여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창조사역에 동참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근간이 된다고 했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최대의 기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2절에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대제사장으로서 기도에서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5절에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2)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카이 데오스 앤 호 로고스, )고 했습니다. 헬라어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어순(語順)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에서 술어와 주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관사입니다.
따라서 주어는 관사를 가지고 있고 술어는 주어와의 구분을 위해 관사를 취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이 주어가 되고 "하나님"이 술어가 됩니다. 결국 본문은 성자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선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나타내 보이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기독론에 대한 모든 이단들에게 쐐기를 박는 것입니다.

Ⅱ. 예수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본문 1장 2절에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했습니다.
1절의 말씀을 반복하는 것은 이 내용을 다시 강조하여 정리하기 위한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히브리 교육은 반복교육이 특징입니다. 어려서부터 히브리적 교육에 익숙한 사도 요한은 반복적인 문장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특히 '진실로 진실로'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에 25회나 집중되어 있습니다.

1)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본문 1장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만물"( )은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전 우주 공간의 모든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6-17절에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선재하셨기 때문에 만물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말미암아"는 '∼을 통하여'라는 헬라어 전치사 디아( )로 주로 창조사역과 구원 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0절에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창조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소극적인 수단으로서의 사역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에서 나오는 하나님(엘로힘, )은 복수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성부와 같은 격을 가지고 인간창조에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를 제외한 창조는 하나도 없습니다.
본문 1장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요한의 의도는 창조 전에 원물질(原物質)이란 것이 존재했다는 플라톤(platon)의 학설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창조 전에 로고스(말씀)이신 지혜자의 허락 없이 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미물의 벌레 한 마리라도, 보잘 것 없는 풀 한포기라도 말입니다.
1절에 "말씀"이 주어인데 반해서 여기서는 "만물"이 주어입니다. 이것은 말씀이 존재하고 있었고 만물은 말씀을 통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Ⅲ.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본문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생명" 조에( )은 '영원한' 아이오니오스( )와 함께 성경에는 '영생'으로 자주 나타납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이 생명을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시편 36편 9절에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시편 104편 29-30절에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생명이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생명이 영생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 부여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심판의 권을 아들에게 맡겼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2절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8절에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1)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본문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빛'에 대해서 스밀데(E. Smilde)는 빛이란 말이 화육하신 로고스의 역사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빛은 일반 인류에게 비취어 있는 일반적 계시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빛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를 의미합니다. 윤리적인 관계에서는 선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관계에서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 5절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2) 이 생명의 빛은 사람 안에 머무는 빛입니다.
요한복음 11장 10절에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빛은 성도 안에 곧 성도들의 마음에 비취어 성도를 실족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심령에 비취지 아니할 때는 당연히 그 사람은 어두움이 되는 것입니다.

3) 이 생명의 빛을 받으면 빛의 아들들이 됩니다.
요한복음 12장 36절에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고 했습니다.

4) 이 생명의 빛을 받으면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본문 1장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두움은 이 세상을 무질서하게 합니다.
예레미야 5장 30-31절에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라고 했습니다.
어두워진 자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도 찾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17장 27절에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섭섭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를 아는 자가 되게 하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박윤선 박사).
이사야 9장 2절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라고 했습니다.

5) 이 생명의 빛은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빛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어두움에 있으면 죽습니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은 어두움을 헤쳐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어두움을 헤쳐 나갈 이유도 모르고 있습니다.
어두움은 생명이 상실된 죽음과 악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어두움은 빛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부, 성자, 성령은 말로 설명이 될 수 없는 신비입니다. 헬라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이해했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그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지 아니하고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믿으라고 하는 것은 설명이상의 배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믿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요 1:7; 11:15; 14:29; 19:35; 행 17:31; 살전 3:10; 살후 3:2; 약 2:1; 벧후 1:1).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지식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창조 전에 이미 선재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권위와 능력이 동일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창조 시에는 성부 하나님의 창조의 수단으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창조 사역의 주역이었습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과 그를 통해서 창조되었고 그와 상관없는 창조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인간 타락 후에 생명의 빛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 흑암 속에 있던 사람들은 그곳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빛을 미워했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이끌어 내는 견인의 빛입니다. 익숙했던 어둠의 생활로 결별시키는 빛입니다. 어두움에서 나오는 시간은(때)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일찍 어떤 이들은 늦게 이끌려 나오게 됩니다.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고 사랑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감사를 돌리게 하였습니다.
생명을 받은 우리는 잠잠할 수 없습니다. 결코 정(靜)이 될 수 없고 어떤 경우든지 동(動)입니다.

교회 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이 세상 생활에 생명의 맥박이 요동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겨울이 왔다고 죽은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싹트는 봄을 기다리며 겨울을 인내할 뿐만 아니라 새 봄을 구상합니다. 봄은 초록의 여름을 계획하고 여름은 결실의 가을을 대망합니다. 결실의 가을은 동면의 겨울을 몸서리 치면서 무익하게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결실의 가을보다 동면하는 겨울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왜냐하면 겨울이 없으면 가을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빛을 받은 성도들의 삶의 힘입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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