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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함에 이르는 길(갈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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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속에 자유가 있는가?>
지난 8월 21일부터 30일까지 말레이시아에 단기선교를 잘 다녀왔습니다.
의료와 이/미용을 중심으로 한 선교로서 상당히 좋은 반응이 나왔습니다.
이번 단기 선교를 다녀온 분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교하러 갔다가 오히려 선교 당하고 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특히 원주민 선교지에서 더욱 더 절실하게 들려오는 말입니다.

저희는 이번 선교 여행 중에 '오랑 아슬리'로 불리는 원주민 마을 여러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 때마다 저희는 그 분들의 티 없이 맑고 순수한 모습에 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깊은 산 속 오두막 같은 곳에서 아무 전기 시설도 없이 원시적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신발도 신지 않고 음식도 손으로 먹고 화장실도 없이 그저 자연 그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와 비교해보면 아주 미개하고 문명문화로부터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지만
막상 현장에서 그들을 만나보면 얼마나 행복하게 보이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맑고 순수한 눈동자에 해맑은 미소, 욕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소박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선교지에서 원주민 형제 자매들을 접하면서 자유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저 원주민들은 가진 것도 누린 것도 나보다 훨씬 못한데 어떻게
저토록 여유가 있고 저토록 행복해 보이는데 과연 나는 뭘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말레이시아 여행을 하는 중에도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 복잡한 생각들이 간간이 마음을 어지럽힐 때가 있었던 것이지요.

사람이 지리적인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마음까지 바꾸지는 못합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거스틴에게 둘도 없는 죽마고우(竹馬故友)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거스틴과 고향에서 함께 자랐고 함께 공부했고 함께 뛰어 놀았던 친구였습니다.
어거스틴의 표현 그대로 하면 '자기 혼의 반쪽'이라 할 만큼 아주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했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를 잃어버린 어거스틴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 친구와 함께 공부하고 뛰놀았던 장소에 가면 그 친구 생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 친구와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장소를 바꾸어 도피해봅니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갔지만 그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이 어느 곳으로 간다고 할지라도 그리움과 슬픔은 여전히 따라붙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괴로웠던 사람이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날 경우 조금은 위로가 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가 없이 장소만 바꾼다고 해서 심경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피해 그 어느 곳으로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피해 그 어느 곳으로 도망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디에 간들 우리와 우리의 마음이 따라가지 않을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1990년도에 제가 미국으로 유학갈 때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미국으로 떠나기 석 달 전에 갑자기 어머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슬펐던 마음이 미국에 간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내 마음의 상처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겪었던 슬픔이 전혀 낯선 나라 미국에서도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진짜 자유가 없으면 장소만 바꾼다고 해서
저절로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행을 하면서 이런 체험을 많이 했지만
이번에 원주민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더욱더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제가 군목으로 임관하기 위해 전라도 광주 상무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
같은 동기생 중에 의무 장교 후보생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저보다 나이는 어린데 어떤 훈련을 받더라도 항상 여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본래 체육을 싫어했기 때문에 훈련받는 것도 썩 잘하지 못했습니다.
군대에서 흔히 쓰는 용어 중에 '고문관'이라는 말이 있는데 제가 꼭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힘든 훈련을 받을 때마다 항상 긴장이 되고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혹시라도 실수해서 망신당하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이
앞섰기 때문에 무슨 훈련도 자신 있게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무장교 후보생은 언제나 여유 만만하게
마치 놀이터에서 뛰어 놀듯이 훈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그 형제의 대범함과 거리낌없는 자유를 무척 부러워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유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리낌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까?
사람에게나 무엇에게나 얽매이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지요.
자유에는 집회결사의 자유와 같은 정치적 자유에다가
경제적 자유, 종교적 자유, 등등의 수없이 많은 종류의 자유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자유는 어떤 자유를 말합니까?
불교 용어 중에 '무애'(無碍)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거리낄 것이 없는 철저히 자유로운 상태를 말하지요.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선승(禪僧)이 진흙탕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비가 온 다음에 땅이 질어서 걷기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꼬부라진 길에 이르렀을 때 키모노를 곱게 차려 입은
아주 예쁜 처녀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처녀는 아주 고운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진창길을 건너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탄잔이라는 스님이 이 처녀를 두 팔로 덥석 안고서는
흙탕물을 뛰어넘어 맨땅으로 옮겨다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본 에키도라는 스님은 그 날 밤 목적지인 절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은 채 기분이 몹시 상해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드디어 절에 도착했을 때 화가 난 에키도가 입을 열었습니다.
"탄잔 스님, 우리 중들은 절대로 여색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아시지요?
그런데 스님은 오늘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를 두 팔로 안았지요?
이것은 명백히 불계(佛戒)를 어긴 것이 된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에키도의 따지는 소리에도, 그러나, 탄잔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오히려 입가에 잔잔한 미소까지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처녀를 이미 그 곳에다 내려놓고 왔기 때문에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에키도 스님은 아직까지도 그 처녀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가보죠!"

여러분, 에키도와 탄잔 두 스님 중에 누가 더 불도(佛道)가 높은 사람입니까?
탄잔과 같은 사람을 우리는 아마 '무애자유인'(無碍自由人),
아무것에도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세 가지 요소들>
오늘 여러분들에게는 자유함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요 8: 32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진리되신 예수님을 이미 안 여러분들에게 자유함이 있습니까?
고후 3: 17에서 사도 바울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선언했는데, 여러분에게 자유함이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짐은 없는지요?
어느 곳에 가더라도 늘 마음을 억누르는 장애물은 없습니까?
사람들 앞에 서도 뭔가 떳떳치 못하고 항상 죄지은 것 같은 죄책감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자유함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죄를 지으면 자유함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 속에 왜 자유함이 없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짓는 순간 자유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친밀했던 관계가 깨어지고 자유함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영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의 죄에 있습니다.
죄가 있으므로 떳떳치 못하고 늘 불안합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 몰래 거짓말을 했다든지 부모님이 아끼시는
물건을 깨뜨렸다든지 하면 그 순간부터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부모님이 기침만 해도 깜짝 깜짝 놀라게 되고 자유함이 사라집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진짜 영적인 자유함을 얻으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죄의 용서를 받아야만 합니다.
부모님 몰래 죄를 저질렀을 경우 부모님께 다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그 때부터 자유가 찾아옵니다.
그 때부터 두 다리 쭉 뻗고 평안히 잠잘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진홍같이 붉은 죄도 흰눈처럼 용서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하나님께 다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유함을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욕심에 사로잡히면 자유함이 없습니다.
약 1: 14-1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옳습니다.
욕심이 지나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잘 해보려는 욕심, 실수하지 않으려는 욕심, 그것은 일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지나칠 때 오히려 우리의 자유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장영희 교수가 쓴 수필집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주일 아침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는데 신부님이 '나눔'에 대해서 강론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강론 도중에 갑자기 무엇이든 좋으니 옆 사람과 나눠보라고 했습니다.
그 때 장영희 선생은 헌금만 들고 성당에 갔기 때문에 차 열쇠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황한 장교수는 순간 자기 몸에 걸친 액세서리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숫자에 무감각했던 사람이 '못 줄 이유'를 찾기 위해
무섭게 빠른 속도로 자기가 지닌 물건들의 가격을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에 맨 스카프는 백 퍼센트 실크이니 한 2-3만원 될 것이고, 귀고리는 금으로 된 것이니
한 돈쯤 쳐서 5만원 정도하고, 목걸이는 더 비싸기 때문에 한 6-7만원 할 것이고.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실반지는 가격은 얼마 안되지만 학생들이 준 선물이기에 줄 수 없고.
브로치는 세트로 된 것이라 하나를 줘 버리면 나머지는 짝짝이가 될 터라 그것도 못 주겠고."
못 줄 이유만 계속 계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옆에 앉으신 할머니는 이미 무엇인가를 내밀고 있는데 자기는 못 줄 이유를 찾으며
계산을 하다가 결국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박하 사탕 하나가 집혔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 음식점에서 입가심으로 준 박하사탕이었는데 원래 박하 사탕을 싫어해서
먹지 않고 그냥 버리는 수고가 아까워서 주머니에 넣어둔 것이 집혔던 것이지요. 
그 순간 장영희 교수는 "주님, 감사합니다!"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아무 필요도 없는 물건, 아니 오히려 주어서 속 시원한 물건을 발견하게
해 주신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탕을 할머니께 내밀었다는 것입니다. 

그 날 장교수는 '줄 이유'보다는 '못 줄 이유'만 찾은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욕심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자유함이 사라집니다.
여러분의 욕심을 경계하십시오!
그리하면 주께서 주시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셋째로, 두려움이 있으면 자유함이 없습니다.
우리 속에 두려움이 들어오면 자유함이 사라집니다.
이 세상에는 무려 628가지 정도의 공포증이 있다고 합니다.
'폐소공포증'(claustrophobia), '독거 공포증'(anuptaphobia), '도로 횡단공포증'(dromophobia),
'언어 공포증'(verbaphobia), 등은 여러분이 아마 많이 들어보신 용어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공포증이 있습니다.
'만사 공포증'(pantaphobia)과 '공포 공포증'(phophobia)이라는 증세입니다. 
숫째 온 세상 만사가 모조리 두려운 것이 '만사 공포증'이며,
'공포'라는 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쫙쫙 끼치는 증세가 '공포 공포증'인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이 세상에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오직 두 부류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들과 정신 이상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고 제 정신인 사람들은 반드시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자유함을 잃게 됩니다.
칼 월렌다(Karl Wallenda)는 고공 줄타기에 평생을 보낸 아주 유명한 곡예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1978년 푸에르토리코, 샌 후안에서 수 천명의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70 피트 높이에서 공중 줄타기를 하다가 떨어져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줄타기에 있어서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최고의 기술을 가진 월렌다가 그 날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중에 그의 부인이 이 문제를 철저히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부인이 발견해낸 이유는 너무나 단순했습니다. 
월렌다가 세상을 떠나기 전 몇 주전부터 자기의 안전에 대해서
지나치게 두려워한 나머지 실패 공포증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 하면 고공 줄타기 연기를 훌륭하게 해낼까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지만 일단 실패 공포증에 빠진 후부터는 어떻게 하면
떨어지지 않고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을까 에만 집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무엇인가를 잘해낼 수 있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실패하면 어떡하나 하고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는 것을
월렌다 요인(Wallenda Factor)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갑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체면 손상에 대한 두려움, 왕따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등등, 두려움이 우리 마음 속에 평안과 자유를 빼앗아갑니다.

요일 4: 1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서 두려움을 내어쫓으십시오!

<참된 자유를 찾아서>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도종환 선생이 쓴 시 중에 「책꽂이를 치우며」라는 시가 있습니다.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식자우환(識字憂患),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너무 많이 알려고 하는 것도 자유함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원주민 선교를 다녀와서 저는 그들의 선하고 맑은
눈망울과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들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들보다 더 행복하다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고민스러웠습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참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봉독한 갈 5: 1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제 다시는 주님이 주신 자유를 잃어버려서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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