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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삶④ : 전심전력하여 진보를 나타냅시다 (딤전 4: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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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성도로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늘 대하게 되는 문제이고 처리해야 될 삶의 상황입니다. 어디까지가 우리에게 가능한 범위이고 어떻게 우리가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난 3주간 동안 우리는 우리가 성도로서 살아갈 삶의 기본적인 지침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뱀 같은 지혜로움과 비둘기 같은 순결함의 동시적 소유를 통한 균형있는 삶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선별적 집중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을 통해서 선의 능력을 발휘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번 주에는 이 모든 것이 가능케 될 수 있는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한 노력과 준비의 부분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교회 목회구호를 잘 알 것입니다. ‘준비는 철저히, 훈련은 가혹히, 전투는 치열히, 그리고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것’ 여기서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아름다운 때를 위해서도 그것을 위한 치열한 전투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철저한 준비와 가혹한 훈련입니다. 그와 같은 준비와 훈련이 없다면 우리는 힘을 얻을 수 없고 힘이 없다면 전투에 승리 할 수도 없고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우리는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지지도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역사의 상황 속에서 굉음을 내며 지척이고 혼돈하는 상황을 만들다 역사의 무대 밖으로 밀려 떨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의 삶은 늘 준비와 그 준비를 위한 훈련이 전제 되어야 실제 상황에서 그 모든 일을 가능케 됨을 봅니다. 예수님은 이미 탄생시부터 천사들의 화답이 있었고 동방박사와 목자들의 경배를 받았습니다. 어린아이 때 성전을 방문했을 때 이미 성경박사들과 더불어 해박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느 때건 사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30년을 기다리셨고 그 이후에도 광야의 시험을 거치시고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제자들을 선택하셔서 훈련을 하시고 계획을 가지고 준비케 하셨으며 자신의 십자가의 과업을 진행하셨던 것을 봅니다. 그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다 내질러 이루어도 되실 텐데 이와 같은 복잡한 순차를 가졌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인간의 수준까지 내려오셔서 인간들을 이해시키시고 또 그와 같은 역사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끊임없이 이루게 하시려는 아름다운 역사임을 봅니다.

오늘의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서신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너는 교회를 맡아서 목회할 때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너의 연소함을 사람들이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너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그리고 모든 믿음의 사람에게 본을 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는 읽는 것 권하는 것 가르치는 것에 힘을 기울이라 그리고 네가 하나님 앞에 받은 은사를 아주 조심스럽게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권면을 하고 나서 사도바울은 또 다른 종류의 새로운 차원에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즉 너는 현재 네가 가지고 있는 능력만 가지고 이 모든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너는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사람들에게 나타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힘과 재능과 모든 역량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네 능력과 역량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지경에 도달할 수 있도록 전심전력하여 그와 같은 지경에 이르러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여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까지 은혜를 끼치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언어 몇 가지를 연결하면 우리 성도들의 삶의 길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번 따라서 해보시기 바랍니다. ‘준비는 철저히, 훈련은 가혹히, 전투는 치열히, 그리고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것’ ‘한번하면 능력이다.’ ‘상향 진보적 사고’ ‘큰일도 없고 놀랄 일도 없다’ ‘힘들어서 싫어서 못해서 귀찮아서 안하고 못하면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없어진다’ ‘위기관리능력과 복원력’ ‘정서적 설득과 반복적 훈련’ ‘한계영역의 확장’ ‘노력도 성령 충만이다’ ‘한 박자 빠르게’ ‘자기부인’ ‘절대복종’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라’ ‘헌신하고 잊어버리라’ ‘능력은 최고가 아니라도 노력만은 최고로 하자’ ‘선언적 교회되지 말고 실천적 교회되자’ 지난해 표어를 여러분 기억하시는지요? ‘헌신합시다’ ‘한 수준 높입시다’ ‘마음을 넓힙시다’ 올해 표어는 이러했습니다. 따라서 합니다. ‘목표를 가지고 살자’ ‘선언이 아닌 실천을 하자’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자’ 이와 같은 언어들을 조합해 보면 우리 성도들이 가는 길이 어떤 것인가 생각을 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즉 현재의 상태에서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앞을 향해 진보하며 전심전력하여 우리의 진보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는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고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끼치고 섬길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 늘 진보를 갈망하고 은혜를 소망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애쓰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전심전력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조금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첫 번째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모든 일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수행해야 될 모든 일은 내 기호나 내 선택에 의하여 빠뜨려 지거나 혹은 취사선택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역사를 위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다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목회자로서 수행을 하기 위하여 디모데에게 권면하기는 성경을 읽는 것,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 자신의 믿음과 인격을 성숙시키는 일, 은사를 올바르게 활용하는 일에 대하여 바울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같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속에 주어지는 모든 일들, 우리들이 이루어야 할 일들을 언급하며 우리에게 전심전력하여 그 일 가운데 진보를 이루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 봉사와 헌신의 삶, 복음을 전파하는 삶, 우리의 삶의 장면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을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가 거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하는 직장이나 일터나 아니면 사업장이나 아니면 가정이나 모든 사회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악취로 오염된 곳이라도 우리가 그곳에 있으면 그 모든 것이 희석되고 하나님의 향기가 날 수 있어야 합니다. 눈물을 짓고 사람들이 슬퍼하고 음울한 지경 속에 우리가 거하게 되면 소망이 생기고 웃음이 있고 화기가 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소망이 없어 낙심할 지경에 우리가 그 자리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작되어서 그 분위기가 반전되어 새로운 소망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어디 가든지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적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들의 논리가 무력화되고 오히려 감동이 되어 주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는 반드시 있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주님의 일을 맡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주님이 좋아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해질수록 우리들에게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좋아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 결국 내가 좋아하는 일이 됩니다. 주님이 좋아하는 일과 내가 좋아하는 일이 일치된 성도는 성숙한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내 기호 따라 어떤 일을 하지 않고 내 기호 따라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안좋아하고를 결정하지 않고 내가 편안한가 불편한가를 결정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유익하고 아름다운 일인가가 우리의 판단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기쁨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숙해지면 우리는 해야 할 일의 일부가 아니라 점점 잘할 수 있는 분야가 확장되어지고 깊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능력은 고정되어있지 않고 그 한계가 날마다 더 넓어져야 합니다. 전에는 할 수 없던 일이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못해’라고 생각한 것들이 ‘그 정도밖에 안돼 나는 더 하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야 하고 나는 더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나는 못해’라고 생각하면 안되고 ‘하나님 능력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합니다. 내 여건이 좋지 않으면 여건 때문에 ‘나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 이 여건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하나님의 도움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우리의 능력으로 제한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한,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행해야합니다.
저는 제가 목사이지만 제 자신을 돌아볼 때 도무지 강단에 서기에 어려운 것 같고 앞으로도 남은 일을 감당하는 것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 능력과 제 사람 됨됨이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에 사로잡혀 있을 때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 또 언제든지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서 마음에 드는 생각은 ‘주님 오늘부터 또 새로운 출발입니다’라는 기도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시작을 이루고자 합니다. 잠자리에 들자마자 여기서 끊고 내일 새벽에 일어나면 또다시 시작한다 그 뜻이 무엇일까요? 이전까지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이 마음에 시원치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마음에 시원치 않다는 것이 결코 우리를 실망시켜 낙심시켜 주저앉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간구하는 기회와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전의 삶이 마음에 안 들면 그 마음에 안 드는 것 때문에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극복할만한 힘을 하나님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마음에 안 드니까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는 좋아서 하는 일도 있으나 해야 할 의무감 때문에 하다 보니 그것이 좋아지고 기뻐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착각이 있습니다. 꼭 좋고 마음에 들어야 그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일은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일을 즐거워하는 사람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노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노력도 안하고 그 일을 즐거워해서 하는 사람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즐기지 않는 일은 아무리 노력해봐야 최고의 수준에 이를 수 없지 않는가?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노력하다보면 그것이 즐거운 일이 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내게 즐겁지 않아서 억지로 노력하고 힘들고 인내하며 그 일을 시작했는데 조금 지나다 보니까 익숙해지면서 그 일이 즐겁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력의 수준이 그 일을 누리는 수준으로 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운동도 그렇고 공부고 그렇고 모든 일이 그렇지 않습니까? 즐기는 수준이 되려면 일정한 수준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운동을 하나 배운다고 하면 일정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폼을 만들기까지는 얼마나 귀찮고 어렵고 힘들고 모양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시간이 걸리고 힘이 걸리고 또 여러 가지 애를 써서 일정한 폼을 이룰 수 있다면 이제는 보다 유연해지고 또 기쁘게 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것 말씀드릴까요? 교회 처음 나오시는 분들 기도하기 참 어려울 것입니다. 3분 동안 기도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1분 동안 기도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다 잘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다 끝난 것 아닙니까? 더 기도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금요기도회 나오면 20분씩도 기도하고 어떤 때는 1시간씩 기도하는 것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나는 기도에는 소질이 없나보나 나와는 과가 틀린가보다’라고 생각하고 기도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도하다 할 것이 없어도 그래도 “주여, 주여”하고 고개라고 숙이고 있다 보면 어느 날 반복되는 그와 같은 기대 속에서 내 마음에 기도의 줄기가 잡히고 기도의 맥이 열릴 수 있지 않습니까? 전에는 산만해서 기도 중에 도저히 한가지로 집중이 안 되다가 기도하는데 몰입할 수 있게 되고 그 가운데 우리는 오랜 시간 기도할 수 있게 되고 기도가 성숙되어지게 되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할 수 있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성경을 가지고 제가 잠깐 말씀드릴까요? 여러분 성경 읽어 보셨지요? 성경을 즐겨야하는데 꿀송이보다 달아야 되는데 성경을 읽어보니까 어디 그렇던가요? 제 경험으로 말씀드리면 성경을 다섯 번 정도 읽기 전에는 도저히 아무리 읽어도 읽고 나서 생각나는 것은 글자만 보았다는 생각만 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 한번 읽어 보신 분들 무슨 생각이 드셨어요? 저는 성경한번 읽어보니까 그때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아, 성경은 글자와 종이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내용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반복, 반복, 또 반복을 하다보니까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은혜가 다가오지요? 첫째는 단어가 은혜를 끼칩니다. ‘아, 이 말이 나에게 은혜가 되더라’ 그 다음에 또 계속 읽어 나가다 보면 구절이 은혜를 끼칩니다. 그 다음에 또 읽어 나가다 보면 어떻게 되지요? 단락과 스토리가 우리들에게 은혜가 됩니다. 그 다음에 또 읽어 나가다보면 어떻게 되지요? 그때는 작중 의도가 우리들에게 와 닿게 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하는 동안 점차적으로 그것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노력을 하면서 하루에 세장씩 하루에 여섯 장으로 이것은 의무적으로 나는 도저히 안 되면 소리라도 내서 읽고 끝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노력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처음에는 노력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즐기는 일이 되면 노력을 능가하는 우리의 아름다운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제와 봉사, 멀리서 보면 참 힘들어 보이지만 직접 참여하여 그 일을 이루어 보면 이렇게 기쁜 일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하고 우리는 새로운 세계가 우리의 안전에 전개되는 것을 봅니다. 헌신의 삶, 고통스러워 보이고 헌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만 헌신하게 되면 ‘야, 내가 이런 삶을 왜 이전에 살지 않았을까? 어떻게 이렇게 기쁜 삶을 내가 그냥 놔두었을까’ 생각이 들 것입니다.

우리는 멀리서 걱정하며 쳐다보지만 말고 한번 뛰어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힘대로 뿐 아니라 힘에 진하도록 전심전력하여 우리의 삶의 진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늘 자신이 없어도 주님 믿고 시작하다보니 자신이 생깁니다. 못하고 안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못하고 안 할 일도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면 그 일을 시도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용기와 소망을 주십니다. 우리는 힘이 없어도 믿음은 주님의 힘을 믿고 진행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모든 진보가 나타나야 합니까? 신앙의 인격을 닮음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변하기 어려운 것이 인격의 변화입니다. 기술의 변화는 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내 마음을 나눈 것도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적 지식도 늘 수 있고 기도도 잘할 수 있는데 인격의 변화는 가장 완만하며 그리고 속도도 느리고 또 오래 걸릴 수 있는 것을 봅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15년 동안 느낀 것이 ‘정말 사람은 잘 안 변한다’ 그럼에도 느낀 것은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인격, 정말 봉사하고 충성하고 헌신하다가도 정말 인격적인 문제 때문에 우리는 어려워하는 경우를 많이 겪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인격을 닦아 아름답게 빛내는 일을 해야 합니다. 복음전파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없다가 문득 자신이 생깁니다. 제자들이 무서워 떨며 도망치다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다시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는데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고 나니 이들은 다른 사람이 되어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우리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봉사와 헌신의 사역, 여러분 잃어버릴 것이 많은 사람은 항상 불안하게 삽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잃어버릴게 많은 사람은 항상 불안하게 삽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잃어버릴 것이 많은 사람은 항상 불안하게 삽니다. ‘이것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지? 누가 가져가면 어떻게 되지? 이것 날라 가면 어떻게 되지?’ 항상 불안합니다. 그런데 줄 것이 많은 사람은 항상 기대가 됩니다. 내게 있는 것이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인가? 내가 주려고 준비해 둔 것인가? 우리는 여기에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는가에 따라 다릅니다. 줄 것이 많으면 날마다 기대가 됩니다. 새로운 날이 기대되고 만나는 사람이 기대되고 누구에게 내 것을 줄 것인가 누구를 세워 줄 것인가 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도 과연 이 교회가 시대 속에서 무엇을 하고 갈 것인가 생각을 합니다.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어차피 한세대가면 또 없어질 것이 자명한데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낡아진 건물, 화려했던 명성, 어떤 프로그램이나 업적, 모든 것이 다 시들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요즘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보면 전에는 그렇게 좋은 프로그램으로 많은 사람이 사용해도 조금 지나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조금 지나면 새로운 프로그램이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어차피 지나갑니다.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다 주고 또 주고 또 주어서 사람들을 세워주는 것이 남는 일입니다. 그 일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최대화하여 갈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입니까? 지금 이 모습이 아니라 내 모습 이대로 주님 받으시옵소서에서 나아가서 전심전력하여 진보된 모습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내 능력가지고 힘을 다하여 주를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에서 넘어서서 내가 더 진보해서 그 모습으로 주님 앞에 헌신하여 주님께 내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는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때와 기한이 있다고 했지만 과연 우리는 그 때와 기한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명분과 논리와 때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명분이 있어야 하고 논리가 서야하고 그것이 적당한 시간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하다보면 실기하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현직에 있을 때 봉사합시다. 힘이 있을 때 헌신합시다. 시간 없을 때 봉사합시다.” 현직에 있을 때, 힘이 있을 때, 시간이 없을 때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항상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너무 바쁘니까 지금 내가 현직을 다 마치고 시간과 여유가 있을 때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모든 기회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참 모든 일을 잘하고 능력이 있을 때는 세상일에 분주하다 보면 정말 주님 앞에 헌신할 때 헌신하려고 해도 헌신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내가 힘이 있고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을 때 주님 앞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힘까지도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전의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나는 못하겠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시간이 없을 때 하는 헌신이 하나님께 더욱 귀중하고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양을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중심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향하여 뜨거운 열정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많을 때 10시간 봉사하는 것 보다 시간이 없을 때 1시간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야 비로소 시간이 있을 때 참된 봉사와 헌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려울 때 남을 도와준 사람이 모든 것이 풍족해 져도 남을 도울 수 있지.’ 내가 어려워서 남을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풍족했을 때 절대 남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풍족하면 더 쌓아두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 상태가 여의치 않을 때 그때가 바로 우리의 때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명분과 논리와 시간이 정확해야하지만 우리는 지나치게 매이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바로 지금 현재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 일을 이루는데 전심전력해야합니다.

두 번째 이 모든 일에 그 중에서도 전심전력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심전력하다의 원뜻은 받은 사명 그대로 교육을 힘쓰라 그 일을 위하여 항상 준비하고 연구하라는 뜻입니다. 전심전력, 받은 사명을 그대로 사역을 이루기 위하여 힘쓰고 준비하고 연구함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훼손시키지 않고 정확히 잘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내 뜻으로 망치거나 그냥 훼손시키면 안되고 그대로 순종해야합니다. 힘이 들고 능력이 모자라면 그것을 키워야지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하는데 힘이 들어요. 그럼 우리 믿음의 사람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힘이 들어서 제가 못하겠습니다. 제 능력의 범위를 벗어난다면 우리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하지요? “하나님 힘들고 내 능력의 범위에서 벗어납니다. 이 부족한 힘과 능력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내 능력의 범위밖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가. 근본적인 자세와 방향을 설정해야합니다. 안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안 되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제게 은혜와 지혜와 능력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고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은 그냥 자연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자연인을 능가하는 신앙인입니다. 내가 자연인이면 그 일을 못하지만 신앙인이면 자연인을 넘어서 신앙의 힘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새로운 역사를 이룹니다. 항상 준비하고 연구해야합니다. 준비 그리고 잘하려고 연구하는 것은 할수록 좋습니다. 여러분 한번하면 능력인데 그것을 가끔 하지 않아요. 여러분 한 번 한 것과 열 번 한 것과 백번 한 것과 천 번 한 것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한 번 하는 것은 억지로 하지만 열 번하면 유려해지고 백번하면 아주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천 번하면 따를 자가 없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도 한 번하는 것과 열 번, 백 번, 천 번하는 것은 다릅니다. 똑같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준비하고 연구하고 실행하고 우리는 또 다시 세련시키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쫓아가는 자세가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야구선수들이 다이빙 캐치도 하고 공을 잘 잡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 좋은 플레이를 했다고 박수를 치는데 순서가 나서 기회가 될 때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안 되지요? 여러분 묘기를 부리는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묘기를 부리지 않아도 될 만큼 그 자리에 정확히 가서 기다리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해가 잘 가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다른 말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고 싶으십니까? 여러분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면 큰일 납니다. 심장마비 걸립니다. 여러분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나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프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프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죽을 뻔 하게 아프다가 낫다 하나님의 은혜다”라는 것보다 “난 하나도 안 아퍼”가 낫지요. 여러분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기적이 필요 없는 삶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내게는 왜 이렇게 기적이 안 일어나지?”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기적이 안 일어나도 될 만큼 내게 이런 큰 축복을 주셨구나.” 제가 늘 말씀 드리잖아요. 오늘은 앞집이 쌀을 주어서 먹고 어제는 윗집이 쌀을 주어서 먹고 이런 것 보다 일터에서 일해서 정상적인 임금을 수령해서 그것가지고 쌀을 사다 먹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까? 여러분 까마귀가 물어다가 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것을 기대하는 것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을 가지고 일해서 수고하는 것 그러니까 시편 128편에서 “네 손이 수고하는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손으로 수고하고 먹는 것을 복되고 형통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항상 준비하고 연구해야합니다. 결국 준비와 훈련과 연구가 우리는 강하게 만듭니다. 리차드 포스터는 훈련은 경건에 이르게 하는 관문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온힘을 쏟아 전심전력해야합니다. 집중해야 합니다. 힘을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봉사와 헌신을 남기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완주 했을 때 마지막으로 내가 가진 것이 많다면 이것은 억울한 삶입니다. 인생을 완주했을 때 모두 다 주고 아낌없이 사용하고 간다 어차피 놔두고 가느니 다 나누어 주고 가는 것이 우리들에게 기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힘을 낭비하지 말고 오직 주를 향한 기쁨에 투자해야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보라는 말의 뜻은 오늘 본문에서 성장을 뜻합니다. 성도들이 목회자를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설교를 잘한다 말씀을 잘 한다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말씀한대로 그래도 사는가가 기준일 것입니다. 설교말씀한대로 저 목사님이 그대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평가의 기준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내 귀에 들리고 내 마음에 느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들었는가 잘 받아들였는가는 그와 같은 느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그대로 실행하는 여부라는 것입니다. 입술로 만이 아니라 전 삶을 통한 메시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보라는 것은 입술로 만이 아니라 전 삶을 통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상황을 당할 때 진정한 실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이럴 때 있지요. “아 내가 실수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심입니다. 선인은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말하고 악인은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말하나니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내 마음에 가득하면 어차피 튀어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실수했습니다라고 말하지 말고 죄송합니다. 제 본심이 그것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실수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정말 내 능력이 그것입니다 라고 솔직하게 용서를 구해하지 실수하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실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한 우리의 모든 본심적인 능력은 극한 상황, 우리가 긴급한 상황 속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중요한 국면에서 그의 본마음의 쌓은 것을 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서 ‘예와 아니오’를 결정하는데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와 아니오’ 한마디를 결정하는 것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갑니다.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이 사람을 선택할까? 저 사람을 선택 할까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정말 하늘과 땅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순간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순간의 선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온 모든 삶의 능력이 총체적으로 집약되어서 ‘예와 아니오’ 한마디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한마디의 결정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지지되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한순간 실수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내 삶이 구조적으로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전심전력해서 우리의 진보를 이루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도록 우리가 구조화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순간에 우리는 결정적으로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보인다는 말로 숨어지지 말고 사람에게도 그것이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결정적으로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보인다는 말로 숨어지지 말고 사람에게도 그것이 증거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숨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셔,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몰라줘.”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을 알정도면 사람들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을 인정할 정도면 사람들도 알게 됩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하나님만 아실뿐 아니라 사람에게까지 그 진보의 모습을 나타내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중심이 넘치다 보니 밖으로 흘러나와 다른 사람에게까지도 보인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르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흐르고 쌓이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평상시에는 상식으로 사세요.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는 믿음으로 사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입니다. 평상시에는 밥 먹을 때도 기도하고 일어나서 기도하고 평상시에는 믿음으로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할 때는 상식적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결정은 상식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순서를 바꿔야 합니다. 우리의 진보는 먼저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영적인 진보, 경건의 훈련의 기초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는 것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기도훈련 말씀을 읽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이웃을 구제하고 사람을 세우고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고 때로는 내가 손해를 주는 것도 주님의 이름 때문에 참아주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그것 자체가 기쁘다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를 봐도 기쁜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의 말과 행동과 습관과 위기의 순간에 대처능력이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보해야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안정적 심령의 평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과 사람들에게 나타나야합니다. 사람들도 우리의 진보를 보고 진보를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우리를 보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저사람 전에 저런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훌륭해졌지? 나하고 다른 것 아무것도 없는데 저 사람이 나하고 다른 것은 다만 예수님 믿다 안 믿는다 차이뿐인데 그것이 그렇게 다르게 했나?”하는 무언가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용기와 도전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슬픈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면 기뻐질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소망을 잃고 낙심한 사람들 가운데 왠지 모르게 우리를 보고 소망을 가지고 내가 저 사람 보니까 저 사람도 저렇게 되는데 나라고 못될게 있는가?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영적인 실력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실력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으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결국 감동시키는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한사람이 천명을 돕는 성도들 되라고 말씀드렸지요? 이 교회 처음 예배드릴 때 맨 앞에 한사람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전도사님은 제외하고. 그래도 다행이잖아요. 한사람도 없으면 예배를 못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이 앉아있으니까 예배가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즘 주일날 보니까 어른과 아이 합해서 한 만 명 정도가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왜 우리 성도들도 천명을 돕지 못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시는 교회의 성도들이고 성도들을 통해서 교회의 부흥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가정과 직장과 기업과 삶의 부흥을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또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심전력하여 기도하며 살면 내 능력이 그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내 능력은 십인데 그러면 나는 백, 천을 이룰 수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천배의 능력이 되어서 천명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능력 이상을 다하여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셔서 그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고입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의 사고로 생각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예수 믿는 사람만 보면 마음 상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들까지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와 같은 일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쌓이면 결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의 사역할 기간이 길어서 그 사역을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3년밖에 사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기간을 통해 순간마다 중요한 위기의 고비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전심전력하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용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오늘 16절을 보니 내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주의 깊게 보아 즉 이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내 자신과 내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결국 우리는 우리를 보고 다른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행동과 사역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은혜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향기로운 성도들 되어 주의 뜻을 이루고 또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아름다운 주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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