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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소망의 삶 (벧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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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날마다 많은 고난을 만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이기에 세상 사람들이 만나지 않는 고난까지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보너스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때로는 애매한 고난 힘든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고난을 만날 때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않습니다 .
오히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보면 고난 속에서 더욱 소망을 갖고 이겼던 것을 봅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소망 희망이 있기에 존재합니다. 옛날 로마 속담에 ‘희망이 있는 곳에 삶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삶을 지속하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소망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테의 신곡이라는 책에 보면 지옥의 입구에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는 일체의 희망을 버리라“. 종종 이땅에 살지만 고난이 문제가 아니라 소망 희망이 없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소망이 없는 삶은 지옥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기록하였습니다.
1장1절에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가 기록한 서신임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베드로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4복음서에 소개되는 베드로는 실망스럽고 실수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이후에 변화된 베드로는 능력의 사도로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사도로서 교회를 사역하면서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베드로사도가  베드로전서를 기록한 싯점은 주후63년-68경으로 이해합니다. 이 시기는 기독교가 가장 핍박을 받고 고난 중에 있었을때입니다. 특히 주후 64년에는 로마의 네로황제 때에 대화재 사건이 발생합니다. 네로황제는 기독교를 가장 박해하던 황제였는데 로마 시내에 불을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화재를 모두 면한 두구역에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특히 많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그해부터 대대적인 핍박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313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기까지 계속해서 고난이 벌어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런 고난과 핍박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베드로전서를 기록했습니다. 사도로서 말씀을 통하여 고난을 대비하고 고난을 슬기롭게 이겨내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전서에는 고난이라는 단어가 무려 15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고난 못지 않게 소개되는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소망 혹 희망이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산소망은 어떤 것이며 산소망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1. 산소망이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우리에게 산소망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습니까?
먼저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되었습니다.
2절에 보십시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합니다.

지금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성도들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으로 선택을 받은 자들입니다. 비록 그들이 지금 고난 중에 있지만 그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선택한 사람들을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선택한 한 사람을 위하여 성부 성자 성령 하나심이 다함께 사역하신 것입니다.

여기 택하심을 입은 성도라는 말을 하면서 사도 베드로는 “피뿌림”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피뿌림을 얻은 피의 사람들입니다. 누구의 피뿌림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뿌림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보통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피흘림을 강조합니다. 오른 본문에서는 피흘림이라고 하지 않고 피뿌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피흘림과 피뿌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피흘림’은 속죄의 근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피를 흘리신 사건을 말할때에는 피흘리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피흘림이 나에게 무조건 적용되지 않습니다. 내가 믿을때 그 피흘림이 피뿌림이 되어 나에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때 10번째 재앙이 바로와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길은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12:23 “내가 그 피를 볼때에 넘어가리라”.
그런데 여기 어린양이 한 마리 피를 흘리면서 죽었습니다. 그 가정의 식구들을 구원하기 피를 흘리면서 죽었습니다. 피흘림으로 인해서 그들 가족이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이 피를 흘렸다고 저절로 그 집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흘린 피를 이제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죽음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속죄의 피를 흘리신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공부하여 압니다. 설교 말씀을 들어서 압니다. 100% 동의하고 인정하고 다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예수님의 피흘리심은 인정하지만 내가 그 피뿌림을 당하지 않았다면 나는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으셨습니까?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죽은 어린양의 피를 찍어서 문설주와와 좌우 인방에 바르는 것처럼 오늘 십자가에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피흘리신 예수님의 그 피가 오늘 나에게 적용이 되었습니까?

어떻게 하면 주님의 그 피로 내가 뿌림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을 나의 구원의 주님으로 마음에 믿음으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성도는 반드시 성령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피뿌림을 입게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반드시 믿음으로 내 마음에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선택한 자기 백성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게 하십니다.

종종 어떤 분은 내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인지 아닌지 분간을 못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종종 선택에 대한 질문을 하십니다. ‘내가 선택을 받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은 간단합니다. 한가지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습니까? 믿으면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선택받은 사람들은 믿습니다. 믿음이 바로 내가 선택받은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믿음을 갖도록 하십니까?
죄인된 우리를 선택하신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3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많으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긍휼이란 마땅히 저주해야 할 사람을 저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악대로 마땅히 저주를 받아 지옥에 가고 영벌의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어서 용서하여 주시고 나를 거듭나게 하사 산소망이 있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까?  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에게 산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이땅에서 고난이 있고 눈물이 있고 아픔이 있지만 우리 성도들은 산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산소망이 있는 이유는 바로 나를 선택하신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 산소망은 미래를 향하여 능력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산소망이 있는 자는 미래를 향하여 능력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여기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산소망은 미래와 관련하여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갖고 있는 미래의 산소망의 기업의 능력은 3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4절에 보십시오.
첫째 썩지 아니하는 기업
둘째 더럽혀지지 아니하는 기업
셋째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
먼저 우리 성도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산소망은 썩지 아니하는 기업입니다.
이땅에 모든 것은 부패하고 썩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산소망의 기업은 이땅에 어떤 형태의 부패에서도 방지되는 기업 불후의 기업입니다. 이땅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망으로 삼고 좇는 것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아무리 좋아보이고 가치있는 것들도 모두 부패합니다.

과거에 자랄 때 저희 어머니가 새이불 새옷 한복 양장을 입지 않고 덮지 않고 농안에 고이 모셔 두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청소하던 중에 꺼내어보니 옷에 좀이 쓸고 이불에 좀지 쓸어서 결국 다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책을 좋아해서 읽고 난 책을 책장에 고이 소장하여 둡니다. 그런데 이미 10년이 넘고 하니까 벌써 책장이 상하고 책이 좀이 쓸어서 점점 망가지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이 타고 다니시는 차도 이미 3년만 지나면 부식되고 고장나고 망가지고 맙니다. 나름대로 사장도 하고 돈을 벌고 명예와 권세를 얻으면 무엇합니까? 그 권세가 얼마 못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솔로몬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기업은 썩지 않습니다. 결코 누구에게 빼앗기지 않는 불후의 소망이 됩니다.

다음 이 하늘의 기업은 더럽혀지지 않는 기업니다.
이 말은 불변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좋은 의미에서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는 측면에서 변합니다. 좋은 것들도 변하고 어제 좋았던 것들이 오늘은 좋지 않고 오늘 귀중한 것들이 내일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도 과거보다 얼마나 변덕이 심한지 모릅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하던 사람들이 금방 남남이 됩니다. 이것은 가정생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생활도 금방 좋다가 금방 싫증을 내고 싫어합니다. 정말 변해야 할 것들이 변해야 하는데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변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너무 사람들이 쉽게 변하고 돌아서고 왔다갔다 하니까 아예 사람들에게 상처받기 싫어서 마음을 닫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 안에서 산소망의 사람들은 쉽게 변질되지 않는 신앙으로 변함없는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고 꿋꿋이 살아가는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늘의 기업은 쇠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영원히 그 아름다움을 보존하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아름다움은 다 순간입니다. 제가 어릴적 티비를 보면서 정말 예쁘다라고 생각한 연예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티비에서 나오는데 항상 할머니 역할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6년전에 올때에만 해도 너무 피부고 얼굴도 아름다고 곱던 집사님 권사님들이 이제는 많이 쇠하여 졌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요즘 쇠하여 가는 체력을 좀 보강하려고 아침마다 테니스운동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과거 30대하고는 다른 것을 느낍니다. 조금만 해도 지치고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지 육체에만 적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이땅위의 모든 소유가 쇠하여 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기업은 쇠하지 않는 불후의 기업이며 불변의 기업이며 불멸의 기업인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이 기업에 동참하게 됩니까?
구원을 완성할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앗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품에 안길 때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 구원이 완성될때에 우리는 하늘의 산소망의 영원한 기업에 동참하여 그 영광과 기쁨을 우리가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죽음 앞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이드신 권사님들만 죽음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저도 여러분도 우리 모두가 지금 죽음 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죽음이 두렵지않고 슬프지 않는 것은 바로 그 하늘의 영원한 기업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중에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진 타이타닉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도 이 영화를 여러번 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죽 음 앞에서 멋진 죽음을 맞이하는 영웅들이 소개됩니다. 우선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마지막 목숨을 내놓고 그 여인을 살리는 제프라는 주인공이 영웅입니다. 또 침몰하는 배를 끌어안고 마지막까지 침착하게 그 키를 붙들고 배와 함께 침몰하는 캡틴 스미스라는 함장도 일종의 영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라이프 보트에 사람들을 실어주고 살리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하는 선원들도 영웅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영화를 보면 가장 감동을 많이 받은 장면은 마지막 순간까지 악기를 붙들고 침몰하는 배 선상 위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악사들의 모습입니다. 이 밴드 팀 단장의 이름이 웰레스 하틀리라는 사람입니다. 다른 것은 영화이기 때문에 각색한 부분이 많지만 특히 이 밴드를 지휘한 월레스라는 단장은 실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밴드의 연주를 통해서 끝까지 침착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며 찬양의 가사 속 메시지를 통해서 하늘의 산 소망을 바라보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는 이 화려한 배로 바다를 횡단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그 배에 탄 악장이었습니다. 배는 점점 가라앉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 우왕좌앙하면서 두려워하는 사람들 완전하 아수라장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월레스 단장은 끝까지 침착하게 자기의 팀멤버들을 격려하면서 마지막까지 장엄한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연주하면서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의지하십시오.그를 가까이 하십시오. 그가 소망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지막 침몰해가는 뱃속에서 이 찬양을 통해서 메시지를 들었스니다.
“내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서 나가기 원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서 나가기 원합니다“
여러분 산소망으로 우리의 미래를 능력있게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3. 산소망은 현재의 환난을 이기게 합니다.

6-7절
성도들도 예외없이 이 세상에서 시험을 당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시험이란 시련의 시험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시련은 환난과 핍박의 시련을 말합니다. 그 시련의 시험을 당할 때에 잠깐 근심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라고 베드로 사도는 말을 합니다.
당시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시련,환난,핍박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전에 시민들을 이용했습니다. 신사들 중 일부는 털옷을 덮어 씌워 개들이 찢어 죽게 하엿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형에 처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불을 질러 태워서 죽이고 밤에 그 불이 등불처럼 환하게 밝히게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핍박과 환난과 순교 앞에서 그들은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당시에 박해를 받은 이그나티우스라는 교부의 글에 의하면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불과 십자가 앞에서도 맹수떼 앞에서도 뼈가 으스러지고 사지가 절단되는 고통 앞에서도 온 몸이 산산조각 나는 아픔 앞에서도 마귀가 가하는 모든 사악한 고뇌 앞에서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즐거워하리라”고 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기쁘게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산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산소망의 성도들이 시련의 시험을 당한다라고 합니다.
왜 성도들에게 이런 시련의 시험이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산소망의 성도들에게 시련의 시험을 통해서 추구하시는 선한 뜻이 있습니다.
우선은 시련의 시험을 통해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십니다.
시련이란 당시 순금과 가짜 금을 감정할 때 쓰던 단어입니다. 시련이 왜 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련이 오는 이유는 진짜 성도와 가짜 성도를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시련이 올때 고난이 올때 우리는 참신앙을 가진 성도인지 아닌지 스스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시련이 올때 고난이 올때 가짜 성도 산소망이 없는 성도는 도망가고 흩어집니다.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인것 처럼 자처하고 본색대로 행동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보는 것은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시련을 당해보고 큰 일을 당해보면 누가 믿음의 사람이고 아닌지 누가 진짜 교회를 사랑하고 충성된 일꾼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때 가짜인 사람들은 변하고 떠나갑니다.
종종 보면 믿음 생활을 하다가 아예 세상으로 가신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직분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때 열심히 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련이 오자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떠나서 삽니다. 그럴때 우리는 타락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척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 생활 하다가 잠깐 방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성도들은 결국 주님 앞으로 돌아와서 믿음생활합니다. 시련을 당해보면 우리의 신앙의 지위를 알 수 있습니다.

더 높이 성숙하기 때문에 시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시련을 통해서 더 성숙해지는 경험들을 한 근거로 학교에서 시험을 치루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시련이라는 단어는 당시 의대생이 치르는 시험을 말할 때 쓰던 용어입니다. 시련을 통과하는 의대생은  더 높은 단계를 향해서 성숙해집니다. 이것은 단지 의대생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은 우리의 실력을 더 높이고 우리를 성숙되게 하는 것임을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더 단련시키고 성숙되게 합니다. 큰 시련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더욱 주님을 의지합니다. 시련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주님을 더욱 닮아갑니다. 그래서 정금같이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빚어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분문에 소개되는 베드로의 경우에도 얼마나 흠이 많고 허물이 많았습니까? 그런데 시련을 통과하면서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의 일꾼으로 성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산소망이 있는 성도들은 현재의 삶에서 이런 시련이 올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찬송해야 합니다.
3절“찬송하리로다”
시련이 올때 찬송하기시 바랍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구원을 주신 소망의 하나님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산소망을 주시고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주신 하나님을 온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 함께 에배를 드릴때에 찬양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괴롭고 힘든 시련의 어둠 가운데 있는 분들일 경우입니다. 그 찬양가사 하나하나가 얼마나 간절하고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힘이 들고 어려울때 마음을 담아 소망을 담아 산소망의 하나님을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받으시고 영광을 나타내시고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시련이 올때 더욱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8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시련이 올때 더욱 우리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우리 주님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산소망을 주신 우리 주님 나에게 영원한 하늘의 기업을 주신 그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함께 주어진 인생 속에서 산소망을 갖고 사는 존재로서 찬송하면서 주님을 더욱 사랑하면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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