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여우와 새 (마 8:18~22)

  • 잡초 잡초
  • 442
  • 0

첨부 1


여우[fox]와 새(마8:18~22절)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에 있어서는 특별히 '서기관'과 '랍비'라고 하는 신분의 지도 계층이 있었습니다. 랍비는 랍비학교를 졸업한 '율법에 대한 전문가로 회당에서 가르치는 선생'을 가리킵니다. 서기관은 주로 성경을 기록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일을 맡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성경에 대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가르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계속해서 성경을 읽고 배우며 그 뜻을 보다 깊게 해석하여 실천케 하는 특권과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율법에 대한 이해와 해석으로 그 본래적인 의도를 매우 충격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2:27)라고 하셨는데 이때 한 서기관은 이 말씀에 큰 관심을 갖고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지금 이 서기관의 마음속에 일어났습니다.

상당한 결심을 하고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라며 각오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 염려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훌륭하고 놀라우신데 함께 다니는 그 제자들이 너절한 게 못마땅해 보였습니다.

갈릴리 촌사람들, 게다가 무식한 어부 출신들, 뿐만 아니라 허락받은 강도라고 까지 하는 세리인 마태, 등등의 사람들이 주렁주렁 따라다니는 등 당시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볼 때도 개운치 않은 잡스러운 친구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못마땅하고 따르기가 꺼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니고데모 같은 유대인 관원은 밤에 조용히 찾아와 영생의 도리를 묻고 간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밤에 찾아 왔느냐고 한다면 어쨌든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에서 보면 갈릴리 어부출신들에 비해 당대의 지도급 인사인 서기관 출신이 하나 따라 준다면 참으로 고마워해야 할 텐데 주님은 이 서기관의 좇음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좇겠다."는 것이 대단히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배운다는 것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함께 한다는 것을 뜻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집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하여야 했습니다. 적어도 당시의 랍비의 제자가 되려면 이제는 그 랍비와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고로 지식의 습득을 위한 존경만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즉 운명을 같이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비상한 결단을 요구하고 계셨기에 이런 희생의 각오가 없이는 따를 수가 없으니 그 높은 값을 지불하고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20세기 신학자인 '뵨 회퍼(Bon Hoeffer)'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너무 값 싼 은혜를 구한다." 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은혜는 쉽게 주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받은 편에서도 쉽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영생의 도리’와 ‘구원의 길’이라고 할 찐대 상당한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마13:44) 여기에는 엄청난 값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고 그 지불 또한 조금도 무리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본문 속에서 새와 여우의 비유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새와 여우의 비유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첫째로 시험과 동시에 권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끝까지 나를 따르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을 두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은 내용의 말씀이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시간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죽는 일에까지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따질 것 다 따지고, 말할 것 다하고서는 진정한 충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서기관을 향하여 "네가 언제까지 나를 따를 것이냐? 인기가 좋고 영광스러울 때는 따라다니다가 인기가 사라지고 위기가 오는 날에는 그만두고 떠날 것이 아니냐?" 는 뜻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죽는 날이 졸업식이 될지언정 살아 숨 쉬며 살아 있는 동안에는 졸업식이나 방학은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 생활을 시작했으면 이미 좁은 길에 들어온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좁은 길은 거룩하게 주님을 닮아가는 목표가지 포함되어 있지만 주님과 함께 출발했으면 롯의 처와 같이 뒤를 돌아보면 천국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순교를 한다.’는 것도 살아가다가 순교를 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순교하여야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내일 죽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어제 이미 나는 죽었다."고 여기며,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여우와 새'를 비교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는 주로 산림지대에 살지만 인가 가까운 숲이나 초원, 때로는 사막 등에서 살기잔 저들만의 거처가 있어서 잠잘 수 있는 굴이 있고,??공중에 나는 새들도 깃 들일 곳이 있다. 그러나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라고 하신 본문은 이 얼마나 처절한 이야기입니까?

따라서 주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면 거처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뒤를 따르노라면 경제문제가 해결되고 출세도 할 수 있겠지 하는 그러한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주님과 같은 자세와 정신으로 참으로 대단한 각오를 가져냐 신앙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를 부인하고 희생을 각하고, 나를 죽은 자로 여기는 믿음이 필요 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분명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신앙이라면 여기까지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너무나 쉬고 편하게 예수를 믿기 원합니다. 직장 때문에 친구 때문에, 사업 때문에, 집안일 때문에 예배시간이나 ‘주일 성수’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거나 온전한 십일조 하나 제대로 결단하여 드리지 못할 때가 간혹 있지 않습니까?

직장에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신뢰해 주어서 오히려 인정받는 사람으로 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장에서 신앙생활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직도 지구상에는 선교사의 피를 요구하는 곳들이 무수히 있으며 예수를 믿음으로 가정과 소속 공동체로 부터 추방되어야 하는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 지역에서 선교를 하는 '모 선교사'는 “엄격히 금지되어있는 세례를 어떤 분이 자꾸만 받겠다고 하여 몰래 세례를 주었는데 그만 발각이 되어 추방을 당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가문과 직장으로 부터 쫓겨나게 되었다.”고 선교 보고를 했습니다. 신앙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머리 둘 곳이 없는 방랑객이 된 것입니다. 저들에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지금까지 속해있던 공동체로 부터 완전히 추방되어 또 다른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으로 얼마나 괴롭고 두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이는 '너도 추방당할 각오를 하라는 뜻입니다. 집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며칠 후로 다가 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너희들은 제자로서 희생하고, 순교하고자 하는 합당한 각오가 되어 있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시간 우리에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우와 새와 같은 처지가 되어도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또한 '여우와 새'로 비유하신 데에는 또 다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두 번째 주님을 다르고자 한다면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 서기관의 과거나 자라온 환경을 조금 아셨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부모 밑에서 배울 것을 배우고, 평안하게 살아 온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안일하게 살아온 사람이 주를 따르겠다고 하는 데 이제부터 당할 고난을 각오하지 아니하면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선교사로 가려고 조언을 구하는 사람이 오면 가정이 어떠했고, 어떻게 자라왔는가?'를 물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만두라고 한다고 합니다. 선교사란? 마음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저 이 마음만 가지고 갔다가 되돌아 온 사람이 많습니다.

1년 내내 감기가 걸려 죽을 지경인데 무엇이 되겠습니까? 고생도 해 본 사람이 하는 것이지 마음만 먹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경험도 하나의 은사입니다. 만약 나에게 고생을 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큰 선물입니다. 그저 아무데나 누워도 잠을 잘 수가 있고, 아무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되니 이 얼마나 좋은가 말입니다. 그런데 자리만 바뀌면 잠이 안 오고 물만 갈아도 탈이 생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은 부자 집 아들로 생각되는 이 사람을 향해 "당신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3:13절에‘바울’과 동행하던 ‘마가 요한’이 선교 도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선교를 포기하고 돌아간 이유는 ‘산악지대를 여행해야 하는 고통스러움’과 ‘바울이 말라리아를 앓는 것’을 보고는 겁을 먹고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적지 않은 실망을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가 되거나 전도자가 되려면 하나 중요한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아직 서기관에게는 허영심이 있어서 완전한 희생을 각오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시합에서 승리를 하려면 적어도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1)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2) 집중하는 해야 합니다.
3) 총력을 기울어야 합니다.
4) 인내해야 합니다.
5) 절제해야 합니다. 이런 요소가 최소한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목표가 분명할 뿐 아니라 거기에 집중하여 총력을 기울이며, 인내하고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절제가 없고 서는 신앙생활은 흐지부지하기 쉽습니다.

따라합시다. 롬 8:17절에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 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옆 사람에게 물어 봅시다. 귀하도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주님은 서기관 외에 또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먼저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 먼저가 중요하다. 가서 부친을 장사하다는 것은 ‘효도’를 의미합니다. 이는 우선순위의 문제인데 '무엇을 우선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에서 아프리카의 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와서 공부하라 했더니 편지로 회답하기를 부모님이 계시는 데 장례를 지낸 다음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 측에서 부모님의 나이가 얼마냐 ? " 물었더니 지금 40세이다. 라는 회신이 왔다 이래가지고는 언제 공부합니까? 만약 부모가 죽으면 제사를 지내야 하고 제사를 지내면 그 후에는 자식을 공부시켜야 하고 키워 놓았으면 장가를 보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끝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매우 단호하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고, 눅14:26절에도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왜 사랑의 예수님께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내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감옥에 갇히거나 순교하는 분들이 가족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정적인 순간에는 가족을 미워해야 함은 물론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합니다. 마침내 그렇게 하고야 주님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향한 최우선이 되지 않고서는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가족을 사랑할 수도 없으며, 결국에 가서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도 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떠나려고 할 즈음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니 과거 시험장에 나가지 못함은 물론 3년 상을 지내야 했습니다. 도리가 도리이니 만큼 3년 상을 치룬 후에 가리라 했는데 이번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또 3년을 지내고 나니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과거를 볼 수 가 없었답니다. 과연 어느 것이 효자이겠습니까? 어떤 순간에는 인정을 끊어야 하고 가정에 대한 의무도 초월하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목숨도 미워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써 주님을 따르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 왕’은 삼하 12장 자신의 어린 아들이 심하게 앓으며 죽을 지경에 이르자 금식을 하고 밤을 새워 가면서 땅에 엎드려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7일 만에 죽고 말자 그는 "아이가 죽었느냐?" 묻고는 그렇다하자 당장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며, 의복을 갈아입고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경배한 후 음식을 먹고 직무에 임하였습니다. 이를 본 신하들이 하도 어리둥절하여 감히 왕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그 뜻은 <이제는 하나님이 데리고 가셨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이상 더 내가 슬퍼할 것은 아니다.>고 말한 다윗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바로 결단하라.'는 뜻입니다.

여기는 시간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여우와 새는 거처와 보금자리에 위협이 생기거나 생명보존이나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거처를 포기하고 과감히 떠나는 결단을 잘 합니다.

주님께서 여우와 새의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내 말을 알아들었으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다시 말하면 환경이 변화되기를 바라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나를 따르라.”는 결단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보다 남의 일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며 저가 핍박과 순교를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자 옆에 있는 요한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냉정하게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남겨둘지언정 너와는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비유를 통해 교훈하신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하여, 어리석은 서기관처럼 되지 않기를 부탁합니다. 참된 것을 위해 세상적인 것을 포기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여우'와 '새'처럼 주님을 따르는 일이 때로는 참된 안식이 없는 것 같지만 참된 안식은 주안에서 앋을 수 있습니다. 좁은 길을 걸어가야 영생과 구원을 얻는 것이요. 고생스럽다고 할지라도 십자가를 져야 영광의 나라에서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지라도 우리는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때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지 올바른 결단력으로 주님을 올바로 섬기고 끝까지 영생의 길을 다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며,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