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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기에 결실이 있습니다 (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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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비가 한번 오니까 금년도 어느덧 가을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앞에 주어진 일들을 쫓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날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지고 주변엔 아름답게 물들어 가는 가을 단풍들이 우리를 눈부시게 만들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 둘 그 동안 노력했던 결실들이 주변을 풍요롭게 하는 열매들이 마음 마져 풍요롭게 하지 않습니까?

시인 김준태 씨의 "감꽃" 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이 짧은 시속에 시인의 살아온 생애가 풍자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자라 어릴 적에는 감꽃 떨어지는 것을 세다가,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때에는 전쟁으로 인해서 죽은 병사의 시체를, 현재는 자리를 잡아 번 돈을 세고 있는데 앞으로 자신은 무엇을 세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이 시간 여기까지 살아오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세셨습니까? 이 질문은 곧 "무엇을 하고 살아가십니까?" 라는 의미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라는 의미도 됩니다. 이제 결실의 계절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깨닫습니다.

오늘 같이 나눌 말씀, 성경전체의 서론이기도 한 시편1편은 보람된 삶의 결실이 어디에 있는지 명쾌하고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열매, 결실의 수확 속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여기 3절에 보게 되면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좆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 자!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시내' 라는 단어는 저절로 옛날부터 흘러내리는 시내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를 의미합니다.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마른 땅을 파서 수로를 만들고 그 수로에 물을 흘려보내는 시내입니다. '나무'라는 단어도 그저 잡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과 의미를 두고 구한 나무를 가져다가 그 곳에 심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누군가의 도움과 수고가 없이는 열매를 맺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 나무를 시냇가에 심어놓은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 수로를 만들면서까지 수고한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좋은 열매가 맺히기 위함이 아닙니까?

여기 예배드리는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살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만 해도 2년이 멀다하고 가뭄이 찾아와서 농사를 망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의 아버지 얼굴엔 수심이 가득해지지 않습니까? 수고는 너무도 많이 했는데 거둘 것이 별로 없을 대 농부의 심정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물론 어쩌다 풍년이 들기도 합니다. 벌레도 별로 없고, 비도 적절하게 잘 와 주고, 햇살도 좋아서 온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해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논둑에 앉아서 알알이 속이 차 가는 이삭을 어루만지며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으시곤 했습니다. 이처럼 농부가 그토록 애쓰고 힘쓰는 것은 가을 들녘에 황금 물결을 이루는 풍성한 수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면서 도랑도 파고, 잡초도 뽑아내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허리가 휘도록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우리를 향한 기대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농부의 심정과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거기에 머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습니다' 하고 고백함으로 구원 얻기만 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은 만족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오산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도 소원 중의 하나지만, 낳고 나면 또 다른 소원이 생깁니다. 애를 낳기 전에는 자식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고 바라지만, 일단 낳고 나면 보다 중요한 소원을 품게 마련입니다. 그 자식이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소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 더 큰 소원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에게 붙어 있다고 하면서 잎만 무성한 가지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무성한 잎을 사방으로 뻗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주인으로 하여금 쉬게 만드는 그런 가지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풍성한 수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두 송이 열매 맺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더 많은 과실을 거두기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 위해 해야할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결실을 맺기 위한 삶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1절 상반 절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는 한마디로 거룩에로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도 알지만, 세상의 격량 어린 물결 속에 거룩한 삶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파도에 휩쓸려 무너졌습니까? 보세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일생을 살았던 다윗도 시시각각으로 부딪쳐오는 세상의 죄더미 앞에 절규하며 기도하는 장면이 시 141:4절에 나옵니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여 죄악을 행하는 자와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저희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 다윗의 이 고백의 심정이 무엇입니까?

만약 우리가 이 거룩함에 실패해버리면 아무리 기도하고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신앙생활은 이미 물이 새는 신앙생활입니다. 은혜를 간직할 수 없게 됩니다. 죄와 가까이 하고, 죄를 짓고, 잘못된 생활에 빠지면 한동안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일은 거룩을 지키는 것입니다. 지금 청량리 사창가에서 다일 공동체를 섬기는 최일도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곳 사창가 굴다리에서 노숙자와 어려운 이웃들에게 무료급식을 하던 가운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의료혜택을 보지도 못하고 병을 달고 사는 모습에 진통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병원을 짓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병원을 짓는데 엄청난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한번은 어느 독지가로부터 5억 원의 헌금이 들어왔습니다. 저들에게는 엄청난 액수였고 병원을 짓는데 큰 힘이 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푼이라도 아쉬운 이들이 그 돈을 사양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돈은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보내 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아들의 돈 때문이 아니라 그 돈의 소득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얼마나 뿌리치기 어려운 결단입니까? 설령 그 돈의 출처가 어떻든 뜻 있게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내 인생이 악인들과 함께 걷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들의 진수도 먹지 말게 하소서." 다윗의 다윗 된 것은 이처럼 바른 결단이 항상 따랐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큰 대형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모두 나쁘다고 손가락질합니다만, 그런 물질, 그런 것들이 내게 돌아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 모두 남의 얘기는 잘하지만, 자기 삶은 바르지 못한 인생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면 이 거룩을 지키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바로 시편 119편 11절에 나옵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이 말씀을 조금 바꾸면 '혹시 내가 하나님께 죄 지을까 두려워서 주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나이다.' 내가 죄짓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가득히 채워야 합니다. 그 결과 이 시편 기자는 죄를 짓는 생활에서 자유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진정한 결실을 맺는 삶은 은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합니다. 2절을 보세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여기 묵상의 '하가'라는 단어는 단순히 '조용히 마음에 되새긴다는 뜻이 아니라 힘을 다해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을 말하는데 말씀을 귀중히 여기고 말씀대로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합니다. 결실을 갈망하는 자는 자기의 경험이나 지식 위에 인생의 기초를 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떠한 인생의 풍파와 어려움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으며 견고하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냅니다. 다윗은 시편 50편10절에 "하나님 내 마음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십시오."하는 유명한 회개의 시에서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범죄함의 원인이 다른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중심에 하나님의 기준이 없었던 데에 있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 자신의 삶 속에 있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고, 믿음으로 살았던 다윗도 성경을 보면 저녁 무렵에 한숨 자고 일어나 궁정을 걷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그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던 탐욕 앞에 서서히 무너져 내려갑니다. 이때부터 다윗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탐욕과 정욕이 인생의 기준이 되어버렸고, 이것이 만나고 싶고 함께 있고 싶은 감정을 일으켜 행동으로 옮기게 합니다. 그 여인을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동침을 합니다. 그 여인의 남편을 죽입니다. 이 모든 행동은 어디서부터 시작했습니까? 육신의 정욕 위에 인생의 기초를 세웠고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 결과입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고 아들에게 쫓기게 되는 징계를 받게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울며 회개합니다. '하나님 내 속에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는 주님의 기준이 끊임없이 자리 잡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결실을 맺는 사람은 자기의 경험이나 지식 위에 인생의 기초를 세우지 않습니다. 결실의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떠한 인생의 풍파와 어려움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으며 견고하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인생의 정글을 헤매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떤 기준을 기초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이야기를 듣고 계십니까?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그 감정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고 내면에 일어나는 생각들과 주위에서 평가하는 말에 두면 우린 더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라 하신 일들을 행할 수 없음도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정글 속에 있는 분들, 말씀을 여러분의 삶 속에 받아들이십시오. 내 인생의 기준이 되도록 하십시오. 거기에 복된 인생의 비결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결실이 없는 인생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보세요. 가을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이 사실이지만, 어떻게 보면 가을은 냉정하지 않습니까? 가을은 찬바람이 오면서 열매를 보여 주지만 또 쭉정이나 열매 없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가을은 바람처럼 쓸쓸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농부는 가을에 거두어 다 집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는 버립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쭉정이도 다 알곡같이 보입니다. 알곡같이 보여도 그것은 가져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제거하고 가져가는데 쭉정이와 알곡을 분리하는 법이 무엇이냐 하면 대체로 원시사회부터 오늘날가지 문명사회도 마찬가지예요. 다 바람으로 날려보냅니다. 겨와 가라지는, 바람에 날아갑니다.

몇 해 전에 중국에 가보니까 추수를 하는데요 어떻게 추수를 하느냐 하면, 삽으로 콩을 퍼서 공중에다 휙 올리니까 알곡은 그 자리에 떨어지고 겨는 바람에 날아가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옆에서 가마니에 콩을 넣는 것을 보았어요. 계속 올리는 거예요. 우리 조상들도 대체로 바가지에 곡식을 담아 바람이 불 때 흔들었습니다. 흔들면 날아갑니다. 부인들이 채를 가져다가 곡식을 담아 바람에 날려보냅니다. 거의 바람으로 합니다. 또 벼를 많이 타작한 집에서는 자리를 다리 사이에 놓고 부쳤습니다. 부치면 바람이 부니까 다 날아갑니다. 알곡은 그 자리에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잘 사는 분은 기계로 떨어지게 합니다. 잘 사는 분이 기계에 돌리지만 그것도 역시 바람입니다. 알곡 같은데 바람에 날려 가는 거예요. 그것은 겨라는 뜻이 아닙니까? 겉모양은 다 갖추었지만 안에 알이 없는 거예요. 오늘 하나님은 알곡만 찾습니다. 바람에 날아가는 것은 겨입니다. 교인인척 해서는 안됩니다. 교인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알곡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성도의 특징은 바람 타지 않는 것입니다. 문화의 바람, 유행의 바람, 죄악의 바람, 음란의 바람, 온갖

오락의 바람이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바람이 불지라도 우리는 내 자리를 견고하게 지키지 바람에 날아다니지 않습니다. 여러분 참 신비합니다. 무를 가을에 땅에 묻었다가 봄에 꺼내보면 못쓰는 무가 있어요. 그 무를 모두 바람들었다고 해요. 사람이고 무엇이고 바람들면 안 되요. 짐승이고 뭐고 바람타면 안 되요. 예수 믿는 성도들은 위를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고, 항상 믿음으로 어떤 바람이 불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내 믿음을 지켜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결실은 우리 인생을 형통한 삶으로 가꾸어줍니다. 본문 3절에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형통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찰레아흐'입니다. 이 말은 막혔던 것이 뚫린다는 의미와 굽은 것이 펴진다는 의미로 영어성경의 번역에는 '번성한' 또는 '성공적'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형통한 삶을 살은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요셉을 꼽습니다. 성경엔 항상 그에게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형통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노예로 팔려가 보디발 장군 집에 있을 때도 형통했다 라는 표현이 있고 심지어 옥에 있을 때도 형통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통은 일시적이고 현상적인 축복을 넘어서서 영원하며 지속적인 형통으로 이어졌습니다. 요셉이 자기 자신만 누리는 형통을 넘어서서 가족과 열방과 후손에게까지 복된 영향력이 있는 삶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정말 성공했으며 축복 받은 사람이며 행복한 자기 인생을 살았음을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49:22에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에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잠시 무성했다가 쉬 시들어 버리는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한때 창성하다가 더운 바람, 찬바람이 불면 떨어져 버리는 그런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샘 곁에 심겨진 나무는 가뭄이 와도 두렵지 않아요. 그 뿌리를 강변에 내리고 있기 때문에 태양이 작렬하며 이글거리면 이글거릴수록 더욱 무성히 자라갈 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린 17세에 한창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그가 하루아침에 노예로 끌려간 그 아픔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의 입장에 서 보세요. 여러분 요셉이 무슨 일을 할 재미가 있었을까요? 무슨 의욕이 있겠고 누가 용기를 주고 격려해주며 달래주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어쩌면 눈꼽만큼의 희망조차도 안 보이는 환경 속에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 환경 속에서도 그는 거기서도 좌절하지 않고 결실의 소망을 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침내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잖습니까? 그는 그때 노예로 살면서 가정경제를 성실하게 했던 그 원리로 장기적인 흉년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근동지방의 유명했던 애굽의 복잡한 정치 외교관계를 그가 단숨에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감옥에서 비참힌 삶을 살 때 거기서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섬김과 봉사와 그리고 자기가 해야 될 일을 찾아서 행했던 그 일들이 훗날 하나님께서 쓰실 때 존귀하고 아름답게 쓸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금 내가 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이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야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다리가 없으면 저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요셉은 그 사다리를 타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던 사람입니다. 자기 일에 성실과 최선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낙담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할 일을 찾아서 했던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인생을 새롭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성도 한 분이 개업예배를 드릴 때 잠시 말씀드렸지만, 이랜드가 까르푸를 인수하면서 재계를 굉장히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이랜드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올 수 있는 상황에서도 기차를 이용한다고 합니다. 회사 돈을 절약하는 것입니다. 그 정신과 사상이 그들 속에 있는 한 이랜드는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랜드의 박성수 회장은 1975년 대학 4학년 때에 근육 무력증이라는 병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병은 근육의 마비가 서서히 몸 전체로 확산되어서 죽는 병입니다. 의학이 발달한 현재에도 특별한 치료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자연히 누워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때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독서를 하기 시작했는데 2년 동안 무려 3000권의 책을 읽었고, 이것은 박 회장의 눈을 뜨게 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오늘날 회사를 경영하는데 너무나 많은 정보를 갖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2년 넘게 끌었던 질병은 하나님께서 그를 만지셔서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2동안에 읽었던 3천 권의 책을 통해서 자신이 앞으로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지, 내가 기업을 하면 어떤 기업을 할 것인지, 내가 하나님 안에서 살면 어떻게 살 것인지를 익히는 결실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삼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열매를 맺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황량한 곳, 척박한 곳에 심기를 원치 않습니다. 죄와 사망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접붙여서 생명을 맺는 나무로 만드신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주님께서 시냇가를 만드시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곳에 심으십니다. 땅을 깊게 파되 양분을 흡수하고 공급자 되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과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을 때까지 파 내려가십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바람에 나는 겨처럼 아무런 의미 없이, 죽고 나면 끝나고 마는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오늘 이 결실의 계절 가을에, 어떤 인생의 결실을 맺고 살아야 할지 주님 앞에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의 자리에 있는지 돌아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놀라운 결단이 지금 이 시간, 여러분 마음속에서 시작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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