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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를 구원하리라 (렘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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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구원하리라 예레미야 Jeremiah 1:4-10

사명은 생명입니다.
생명(生命)은 “살아있으라는 명령”입니다.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려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고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주시면 먹을 것, 입을 것, 삶의 모든 것을 다 채워주십니다. 건강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염려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내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어서 “너를 구원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단순히 죽어가는 우리를 생명으로 돌이키심 이상의 뜻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우리를 부르시고”
          주님의 부르심이 없는 사람은 “버리운 자”입니다.
          그러나 불러주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종”입니다.
      2. “죄를 사해 주시고”
          이사야를 부르셨을 때, 제단의 숯불로 그의 입술을 지져서 입술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3. “사명을 주시고”
          우리가 받은 은사는 모두 사명입니다. 재능은 모두 사명입니다. 혼자
          즐기라고, 죄악 된 일에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은사는 사명입니다.
      4. “그 사명을 감당할 여건을 마련해 주심”이 있습니다.
          이 여건에는 건강, 인간관계, 물질 등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5. “그 사명을 성공적으로 다 마칠 때까지 함께 계십니다.”
          모세가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          여 내리이까?” 주저하던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임마누엘”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우리 모두는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 다섯 가지를 확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모두 “예”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우리를 부르심을 믿습니까?
      2. 우리의 죄를 사해주심을 믿습니까?
      3. 우리에게 사명을 주심을 믿습니까?
      4. 우리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심을 믿습니까?
      5. 그 사명을 성공적으로 다 마칠 때까지 함께 계실 줄 믿습니까?

오늘 우리는 김인성 장로님의 “원로장로 추대”와 이창보 집사님의 “장로장립”을 맞습니다.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생명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셨습니다. 예레미야는 핑계를 댔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여호와여. 보소서. 저는 아이입니다. 말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는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이(child)라고 대답한 예레미야는 나이를 문제 삼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생물학적 나이”라고 꼭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하나님 앞에 서면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실제로 생물학적 나이에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디모데도 그랬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딤전 4:12

저는 25년 전 충남 당진의 개척교회 담임전도사로 나갈 때 21세의 청년이었습니다. “전도사님”으로 부르는 교인들 앞에 늘 부끄러웠습니다.

12년 전 금문교회를 개척했을 때 34세였습니다. 젊고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12년이 지난 지금도 강단에 설 때마다 부족함을 느낍니다. 긴장하고 떱니다.

사명을 주신 것은 생명을 주심입니다. 그러므로 “생명 있을 동안에 주를 의지합니다.”라는 찬송처럼, 생명 있을 동안에 주님께 헌신할 마음을 가졌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1:29, 개역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실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섭리요, 그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는 각각 모양이 다릅니다. 은사의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은사, 만들기를 잘하는 은사, 음악을 잘하는 은사, 다 다릅니다. 우리의 교육(Christian education)에서 이런 ‘은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개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어떤 은사를 받았는지 깨닫게 하고, 그래서 “자기가치”(self-worth)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니, 이런 자부심은 교만과 다릅니다. 남보다 우월하다는 우월의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깨달음은 오히려 “두려움”이며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는 헌신”의 길로 인도합니다.

모든 은사는 이기적인 목적을 채우라고 주신 바 없습니다. 혼자 부자되라고 은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마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어떤 은사가 있습니까?
그 은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우리를 살려주시고 거룩하게 만들어 주신 은혜의 증거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어떤 사명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은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모두 드리는 은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다 드리는 은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 위하여 우리의 은사를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옛날에 예레미야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사명 주신 사람에게 “여건을 마련해” 주십니다. “건강”은 여건 중의 여건입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이다.

이 말을 100%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좋지 않은 건강으로 주님의 일을 훌륭하게 이루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건강의 중요성”을 제대로 말했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자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모든 사명자의의 병을 다 고쳐주시지는 않습니다. 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사명을 받은 사람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1. 사명을 주시고, 2. 그 사명을 감당할 ‘여건’들을 마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건강은 ‘여건’ 가운데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스스로 절제하고 운동과 식이요법 등을 철저하게 하지 않아서 건강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도구’를 망치는 것과 같습니다.

군대 생활할 때 “너희들의 몸은 너희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육군의 것이다.” 그런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군인은 “국가의 부름”을 받아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원리를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군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몸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대장 예수님”의 명령을 거스른 것입니다. 우리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품은 사람은 억울하게 죽지 않습니다.
흔히 장례식장에 가면 “아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심정적으로는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인지상정입니다.

나는 “죽은 사람이 사명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명을 가졌지만 스스로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해서 죽거나, 마땅히 해야 할 ‘조심’을 하지 않아서 죽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사람의 죽음은 자기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반대를 말해 보려고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사명이 있다.”
이 명제는 “언제나” 옳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옳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적어도 오늘 주신 예레미야 본문을 통해서 이 진리는 분명합니다. 

모든 살아있는 사람은 사명이 있습니다.
세상에 “사명 없이 살아있어도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베이지역(Bay area) 대개의 개봉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 "Gridiron Gang"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내가 본 것이 아니라 지난 주 내 아들 명인이가 보고 와서 해 준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어떤 주부나일 센터입니다. 말하자면 청소년 갱생원 같은 곳입니다. 주인공은  드웨인입니다. 원래는 그 센터의 매니저였습니다. 드웨인은 유명한 배우였고, 또 레슬러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풀려나게 되면 다시 오거나 죽는 경우가 75%나 되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습니다.

주부나일 센터에 들어오는 청소년들이 계속 같은 악순환이니까, 얘들이 뭘 하면 제대로 자기가치(self-worth)를 이해(understand)하게 하는지 연구했습니다. 드디어 미식축구(football)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팀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팀웍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기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어떤 일을 위해서 태어났다!”

어떤 아이들은 football scholarship을 받고 대학에 진학하고, 프로팀으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happy한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닙니다. 그 중 한명은 다시 갱으로 돌아갔다가 죽었다. 큰 슬픔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대세’는 회복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true story; actual document)를 바탕으로 영화화 한 것입니다. 

금문교회는 주부나일센터와 비슷한 곳입니다. 교회의 신앙생활을 통해 치유 받고, 자기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하나님께 여쭈어 “할 일”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팀웍이 중요합니다. 각 지파는 살아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합력하는 가운데 “마약중독” 같은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중독이 어디 ‘마약’ 뿐입니까? 교회에서 고치지 못하면 아무데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갈 데 없는 종착역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성공해야 합니다.

생명은 “살아있으라는 명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단순히 ‘한문풀이’가 아닙니다. 성경말씀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여건 속에 있어도 ‘파괴적’ ‘반 생명적’ 활동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생명과 사명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면, 어떤 열악한 환경 중에 있어도 헤어나올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은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불러주시고, 죄를 사해주시며, 사명을 주신 이유입니다.

사명 감당할 때의 자세는 “죽기까지 충성”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우리교회 임직패에 늘 담기는 말씀입니다. 죽기전까지는 “충성”입니다.

      아직도 일하나?
      왜 하나?
     
그 대답은 “내가 아직 살아있으므로 최선입니다.”

충성의 다른 말은 ‘헌신’입니다. 충성이거나 헌신이거나, 그 기본적인 뜻은 “주님께 다 드림”입니다. 주님께 드리고 남는 것이 하나도 없음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남겨놓은 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물론, 성령님을 속인 거짓말 때문에 죽었습니다.
왜 거짓말을 했을까요?
남겨놓은 것을 지키려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충성합시다.
일을 맡기기 전에 찾아서 합시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사명 있는 사람에게는 “그 일이 눈에 보입니다.”
사명감 없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시키면 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한 두 번 더 시키면, “왜 나만?” Why me only? 그럽니다. 이런 일에 열매가 있을까요?

차선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최고”가 아니라 “최선”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일의 가치입니다.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차선은 더 잘 할 수 있는데 게으름이거나 기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최선은 더 잘할 수 없도록 집중해서 한 일입니다.

오늘 장로장립과 원로장로 추대를 비추어 우리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돌아보았습니다. 끝까지 충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최선이라는 꽃을 하나님께 피워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마 25:21, 개역

충성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미모 문제가 아닙니다. 충성입니다.
      결과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세입니다.

충성하는 인생은 “이미”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일”하는 것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은 “일”에서 “보람”을 찾습니다.

우리는 아무 일이나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명을 따라 일합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사명 실천 여부에 달렸습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삽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을 불러 주시고 사명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기쁨과 감사함으로 충성하게 하옵소서.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차선에 머물지 말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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