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공동생활과 화해 (요일 3:15)

  • 잡초 잡초
  • 240
  • 0

첨부 1


공동생활과 화해 

I. 본문 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요한이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초대교회에 임한 강력한 성령의 역사와 사랑의 감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은 여전히 많음을 사도는 목회현장 속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그릇된 가르침을 쏟아놓고, 예수님의 부정하며 대항하는 일들은 떠나온 교회의 형제들을 집요하게 미워하는 자들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의 가장 중요한 표라고 강조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며 영생이 그 안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삶을 보면 이웃, 교회내의 지체들, 심지어 가족들까지 미워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미워하는 것은 살인한 것이며, 영생이 그 속에 없다고 선포하고 있는 이 교리와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합치시켜야 하는지, 그리고 공동생활과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II. 미움과 영혼의 상태

미움과 영혼의 상태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의 몸 외부로 드러나는 현상은 보이지 않는 우리 몸 내부의 건강상태를 판단하게 하는 중요한 징후가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A. 미움의 감정
미움의 감정은 어떤 대상을 집요하게 거부하고 혐오하는 마음과 정신의 작용입니다. 미움은 사랑이라는 감정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감정입니다. 어떤 대상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 대상을 목표로 삼고 집착하고 바라보고 누리려고 하는 마음과 정신의 작용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그러한 아름다움을 발견해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대상으로부터 더 이상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할 때, 사랑함도 아니고 미워함도 아닌 싫증과 권태의 상태를 지나 결국에는 미움의 감정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발견하게 되면 그분을 지속적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쉽게 적응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이미 발견한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 다른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발견해야만 예전에 발견한 그 아름다움까지 감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무한하나 그분의 말씀과 은혜의 경험들을 통해 이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발견해 나가지 않으면 싫증과 권태에 빠지기 쉬우며, 급기야는 그분을 미워하는 상태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아름다운 분이신데 자기 사랑에 깊이 집착하다 보면 나를 대하시는 그분의 모든 것이 더러운 것처럼 느껴지며, 그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릇된 생각과 고집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싫증과 권태감은 육체의 게으름을 부릅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신령한 봉사의 모든 육체적 섬김을 나태하게 만듭니다. 형제를 향해서도 이 원리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게 되면 그 형제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 발견은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를 이룹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형제 안에 있는 자연적 성품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면 형제를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영혼의 침체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할 때를 말합니다. 성경은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에 대한 최고의 증거들을 모은 것입니다. 영혼의 침체에 빠진 자들, 영적 싫증 가운데 있는 자들이 이를 통해 그분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하게 되며, 그 사랑을 다시 고백하게 되는 것도 회복시키시는 말씀의 능력 때문인 것입니다.

B. 미워하는 자의 영혼
미워하는 감정은 그 사람에게서 발견한 허물로 인해 그가 존재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존재와 아름다움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듯 존재와 더러움도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더러움과 추함을 발견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은 그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의지를 거부함
미워하는 자의 영혼의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의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 이룬 형제 자매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셔서 이 땅에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르며 존재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범죄한 악인들조차도 말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이들을 사랑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를 따라 이 땅에 존재하는 그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미워하는 것과 살인하는 것은 양의 차이일 뿐이지 동질의 감정입니다. 흩어져 있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한 지체로 불러서 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는데, 지체를 미워하는 것은 그를 거기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의지와 구원하신 그분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사람의 영혼은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의지 아래 사는 자만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거부함
미워하는 자의 영혼의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름다움을 당신 자신이 가지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인간에게만 나누어 주셨습니다. 모든 만물들은 저마다의 존재 질서를 가지고 있는데, 나를 포함한 사람들, 동물들, 식물들, 그리고 무생물들의 순서로 자리매김합니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명시적으로 사랑하라고 분부하신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형상을 받은 우리의 이웃뿐입니다. 이 둘을 사랑함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와 한계 속에서 나와 다른 피조물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격하게 되면 이웃들에게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많이 발견하게 되고, 그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그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III. 공동생활과 미움

A. 공동생활과 일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그들이 이루고 있는 이 땅의 교회는 궁극적이고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합니다. 비록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녀들이긴 하나 잔존하는 부패한 본성은 끊임없이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 우주의 중심은 자신이라는 자기 사랑을 버리고 온 지체들이 한 마음이 되어야 교회의 완전한 일치는 일어날 수 있는데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부흥은 은혜와 사랑의 부흥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일치는 자신의 모든 욕망과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을 꺾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 그 십자가 앞에서 수많이 자들이 함께 모이게 되는 것, 진리 앞에서의 깊은 깨어짐과 사랑의 감화로 이뤄지는 일치입니다. 그러나 모든 자들이 동시에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자는 말씀으로 인해 자기중심의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또 어떤 자는 자기를 주인으로 섬기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고 회개하며 그분의 질서에 순종하게 됩니다. 또 어떤 이와 반대로 그분을 거스르며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이러한 일들 속에서 하나님을 떠나는 이 보다는 돌아오는 자가, 자기사랑의 깃발을 꽂고 사는 자보다는 하나님 중심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자가 월등히 많이 일어나게 될 때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 축복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B. 말: 다툼과 미움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을 깨뜨리는 것은 미움입니다. 이 일은 어느 한 순간에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형제에 대한 미움은 하나님께 대한 미움을 반드시 포함하게 되어 있습니다. 형제를 향한 사랑은 영적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갑자가 치열하게 그 형제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 형제 안에 두신 그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에서 의지적으로 떠나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싫증의 감정은 미움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이 사실을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러한 진행들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어떠한 이해의 발생으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미움의 감정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툼은 말로써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하면 할수록 사랑하게 되지만, 원망과 비방의 말은 하면 할수록 미움의 감정을 증폭시키며, 그리스도의 몸을 찢어놓는 다툼을 일으킵니다. 생각 없이 쏟아 놓은 말로 공동체를 더럽히는 자들의 입술은 썩은 악취를 풍기는 시궁창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그리스도께 부름 받은 자들은 그렇게 행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로만 고백하는 자들이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난 사랑을 소유한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의 본분과 그 의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저들의 입술로 수많은 다툼과 분쟁을 일으킵니다. 은혜의 물에 잠기게 되면 모든 것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변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혀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고백처럼 능히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자는 깊은 성화의 경지에 들어간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갈등의 한 복판에는 언제나 인간의 말이 있습니다. 거침없이 쏟아놓는 분쟁의 말은 교회의 일치를 깨뜨립니다.

C. 화해의 필요

1. 분노와 증오
분노는 어느 한 순간에 즉각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며, 어떤 사람과 사물에 대해 거부하는 감정의 표출입니다. 그러나 증오(미움)는 끊임없이 의지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 4:26) 인간 이기 때문에 분을 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또 다른 죄를 선택해서는 안됨을 이 구절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자주 분노하고 자주 화해하는 것이 어쩌다 한 번 분노하고 그것을 풀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 라고 말입니다. 분노할 지라도 그것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게 됨을 깨닫게 합니다. 사람에게 분이 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매번 풀고 화해하며 용서할 때에는 상처와 증오로까지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형제를 향한 미움의 의미를 되새기며, 복수의 감정을 쌓아가고, 그가 존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관계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이 관계성의 단절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까지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화해가 필요합니다.

2. 미움과 기도
형제를 집요하게 미워하면서 발전시킨 감정은 형제가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행동입니다. 이러한 감정의 지속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마 5:23). 주님도 형제와의 화해가 제사보다도 급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의 세계가 무너지면 은혜의 공급이 끊어지게 되기에 그러합니다. 미움의 감정이 지속되고 있는데 은혜의 공급마저 단절되면 아주 빠른 속도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자신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는 이미 악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서로가 양보하지 않고 투쟁과 싸움이 시작되고, 행동으로까지 이행하게 되어 그것을 바라보는 수많은 지체들의 영혼이 망가지게 됩니다. 저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하나 자신의 영혼도, 공동체도 모두 파괴하게 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치를 깨뜨리게 됩니다. 자신이 부족할 때에는 지체들의 용납을 받고, 지체들이 부족할 때에는 내가 용납하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미워하는 자가 어떻게 그분과의 실제적 연합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IV. 화해와 관용의 삶
화해와 관용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으로 인해 불화하는 자들이 화해하며, 불일치가 있는 곳에 자신을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항상 고통을 동반하는 삶입니다. 한 사람이 죽으면 이러한 악행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통 하는 자들을 화해시키고 잘 고루어진 말로 그 사람을 사랑으로 연합시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